가녀린 그녀

왜 살다 보면 연애에 유난히 곡절이 많은 사람이 있지 않나. B언니가 그랬다. 키가 작고 마르고 피부가 하얀 B언니 앞에서 남자들은 말 그대로 ‘사족을 못 썼’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가게의 지점장이, 친구를 만나면 그 친구의 오빠가, 학원을 다니면 학원 선생님이 언니에게 대시를 해왔다. 얼굴이 색기 있게 생겼느냐 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 눈은 강아지같이 처졌고 눈동자엔 청승맞다는 생각이 들 만큼 청순함이 어렸다. 다행인 건 어릴 때부터 남자들 때문에 인생이 피곤해지리라는 것을 진즉 깨달은 언니는 거절도 늘 단호하게 했다는 건데 남자들은 그런 모습에 새로운 매력을 느껴 언니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한번은 같이 듣는 수업 시간에 언니가 나타나지도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았고 그 상태로 사흘이 지났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하나 고민하던 때 언니가 핼쑥한 얼굴로 나타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B언니는 아르바이트로 야간에 학원 강사를 하고 있는데 학원의 젊은 대표가 오랫동안 언니에게 추파를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 번 거절했지만 임금 관련 이야기를 하자는 말에 만나러 나갔는데 대표는 언니를 차에 태우자마자 그대로 양평까지 끌고 갔다는 거다. 이후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질 나쁜 시나리오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결정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언니는 차도로 뛰어나와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서울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아는 변호사를 동원해 대표를 감방에 집어 넣은 언니는 한국 남자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호주로 건너가 살고 있다. 언니를 ‘소유’하려 들지 않는 남자와 알콩달콩한 결혼 생활을 즐기며. D ( 출판 편집자, 여, 29세)

 

 

진리의 귀여움

A가 잘생겼던가? 곧바로 떠올려봤지만 역시 아니다. 하지만 A를 보면서 내가 깨달은 건 여자들은 ‘잘’생긴 조각 미남보다는 A처럼 웃는 얼굴이 귀여운 남자한테 약하다는 사실이다. 개강 첫날까지만 해도 A에게 눈길을 보낸 건 옆자리에 앉은 나 말곤 없었다. 키는 큰 편이지만 그만큼 덩치도 컸고(강동원의 디올 옴므 핏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신입생의 오기를 드러내듯 염색한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며 그냥 마이웨이로 사는 놈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첫날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이후 늘 붙어 다녔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날 무렵부터 은근슬쩍 나에게 A의 이성에 대한 의중을 물어보는 여자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놈도 연애를 하려나 보다 싶어 여자가 원하는 정보를 흘려줬다. 그런데 그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자 차츰 의아해졌다. 내가 아는 A는 이성에게 크게 관심이 없어 여자들한테 딱히 다정한 편도 아니고 그때까지도 게임에 많은 시간을 쓰는 몸만 큰 초딩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웃는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얼굴로 따지자면 모 기획사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받은 적 있는 내가 더 낫다고 생각했기에 A가 잘생겼다는 생각은 당연히 해본 적이 없었다. A의 ‘포텐’은 머리를 어둡게 염색했을 때 터졌다. 머리 색이 어두우면 얼굴이 홀쭉해 보인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는데 A의 퉁퉁했던 볼이 약간 홀쭉해 보이면서 웃을 땐 입이 팔자로 예쁘게 벌어졌다. A가 웃으면 여자들은 더 크게 웃었다. A의 초딩 같은 면은 ‘구김살 없고 귀여운 성격’으로, 무심한 면은 ‘남자다움’으로 재해석됐다. A가 그중 누구와 썸이라도 탔는지는 (그런 얘기를 나한테 잘 안 해서) 모르겠다.

졸업 후, A를 오래 좋아했던 여자애에게 A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 덩치에 그렇게 귀엽게 웃는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알아? 멋있고 잘생긴 건 딱 처음 볼 때뿐이지만 귀여운 건 24시간 유효한 매력이야.” O ( 약사, 남, 34세)

 

 

이 구역 친절왕

사람 심리가 그렇다. 별 관심 없던 사람도 나한테 관심을 보이면 괜히 자꾸 눈길이 간다. 입사 동기인 C는 말 그대로 그저 회사 동료였다. 출근 시간 사람이 가득한 엘리베이터에서 급하게 정문을 통과하는 나를 보고 열림 버튼을 눌러줄 때까지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인 일은 중요한 회의가 있던 날 벌어졌다. 오래 준비한 자료 발표를 완벽하게 망친 나는 혼자 비상구 층계에 앉아 ‘현자타임’을 맞고 있었는데 C가 몰래 따라 나와 옆자리에 앉더니 말 없이 어깨만 다독였다. 멘탈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라 별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에게 잘 위로받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곧바로 카톡에 ‘자료 발표 할 때 많이 참고했던 영상’이라며 테드 강연 동영상을 보내주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C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C는 멀리 있을 때도 나를 보면 꼭 내 쪽으로 와 ‘일은 잘되고 있느냐’고 물었고 점심시간 10분 전쯤 팀원들 빼고 ‘우리끼리’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며 자기가 찾았다는 회사 근처 맛집을 알려주기도 했다. 길을 건널 때 내 손목을 잡거나 웃으면서 내 팔을 살짝 치는 식의 스킨십이 점점 잦아지는 느낌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모처럼 정시 퇴근을 하던 날 그냥 들어가긴 서운하다며 C는 (데려다주기 귀찮다는 핑계로) 우리 집 근처에서 맥주나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그대로 소주를 각 두 병씩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후에 ‘이불킥’을 하게 되는 사건을 만들고 말았는데 C에게 “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라고 물은 것이다. C는 물음표가 된 눈으로 나를 마주 봤고 나는 ‘네 마음 눈치채고 있었다.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있다’라고 했다. C는 걸음을 멈추고 겸연쩍게 대답했다. “난 너한테 친구 이상의 마음을 품은 적 없어. 그리고 나 여자친구 있는데 몰랐니?” 술이 확 깨는 그 서늘한 순간. 나는 말없이 집으로 들어갔고 창피함을 견디지 못해 이튿날부터 지금까지 C를 피하고 있다. 황당한 건 C의 여자친구가 같은 건물 8층의 누군가라는 사실. 네 여자친구는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알고 있니? K ( 광고기획자, 여, 3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