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마타 하리다

어느 날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면서 장난 삼아 직장 동기를 흉내 낸 적이 있다. 우리가 생각해도 삼류 포르노 같은 설정이라 섹스를 마치고 한참 웃었지만, 몰입할 땐 둘 다 제법 진지했기 때문에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우리는 침대 위 역할극에 빠져들었다. 선생님을 흠모하는 제자, 새로 이사 온 섹시한 이웃 같은 고전 레퍼토리로 시작해 영주의 딸을 지키는 중세 기사, 정략결혼한 조선 사대부 자제 등 시대극까지 섭렵했다. 둘 다 영화나 만화를 워낙 좋아하는 덕후인지라 나는 그의 뜻에 따라 미드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용의 엄마 칼리시가 되기도 했고, 남자친구 또한 수트를 차려입고 연보라색 장미를 손에 들어 나의 <유리가면> 판타지를 충족해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더 킥킥거렸던 롤플레이는 바로 팜므파탈 스파이 역할이었다. 적국의 정보 기관 소속인 남자친구에게 취조당하는 소련 스파이 설정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악센트를 섞어(발음할 때 ‘으’ 모음을 많이 넣으면 된다.) 대꾸했더니 그게 그렇게 웃겼나 보다. 나는 굴하지 않고 앙칼진 메소드 연기로 그를 자극했고 그날 밤도 우리는 격한 섹스로 밤을 지새웠다. H, 31세, 일러스트레이터
 
 

큰 그림을 그리는 자세

평소 다소 가학적인 섹스를 즐겨온 나는 침대에서 나를 거칠게 다루어줄 파트너를 원했다. 지금의 남자친구와 처음 밤을 함께 보냈을 때 나는 단번에 그가 나와 같은 취향에 호기심이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일찌감치 본색을 드러내고 그를 단숨에 SM 플레이의 신세계로 이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던데다 혹시 그가 놀라 뒷걸음칠까 봐 조심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가 원하는 플레이를 찾아 나를 리드하도록 여지를 주고 싶었다. 사실 다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연기하는 상황에 죄책감도 있었다. 처음 그가 회초리로 내 엉덩이를 스팽킹할 때는, 내가 원하는 강도의 3분의 1도 안 되게 때려놓고는 너무 세게 해서 미안하다고 당황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그에게 간간이 내가 찾은(사실은 단골인) 웹사이트를 추천하기도 하고 함께 성인용품 숍에 놀러 가 사장님에게 이미 다 아는 사용법을 진지하게 경청하기도 했다. 나날이 진화하는 남자친구의 테크닉은 흐뭇하기까지 하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엔 그가 깜짝 선물로 본디지 코스튬을 내밀었다. 나의 숨은 내조(?)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H, 28세, 회사원
 
 

연기하지 맙시다

솔직히 나는 그동안 잠자리에서 연기를 자주 해왔다. 이유는 다양했다. 여러모로 똥차 기질이 다분했던 첫 남자친구는 내가 자신의 페니스를 얼마나 황홀하게 느꼈는지가 마치 성공적인 섹스의 척도라도 되는 양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절정에 다다르지 않는 듯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더욱 거칠게 삽입을 하거나 괜한 심술을 냈고, 나는 그런 순간을 피하고 싶어 빨리 오르가슴이 온 척했다. 그 후에도 연애 초반에 침대에서 왠지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게 싫어서 일부러 소리를 더 내거나 나에겐 별로 감흥이 없는 체위지만 그를 생각해 즐기는 듯 꾸며내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오르가슴을 느낀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경험치가 쌓이면서 나는 반드시 매번 절정에 오르지 않더라도 섹스가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리액션을 강요하지 않는 남자가 진짜 나를 위한 파트너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나는 섹스에 최선을 다하되 느끼는 만큼만 표현하고, 그걸 이해하는 상대를 만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침대 위의 연기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P, 32세, 자영업자
 
 

첫 단추가 중요해

그가 애무 도중 처음 커닐링구스를 하려는 듯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갈 때 속으로 놀랐다. 이전에 만나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오럴 섹스를 받는 건 좋아하면서도 ‘주는’ 것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남자친구를 내려다보며 다가올 환희와 격정의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 클리토리스 근처를 배회하는 그의 혀는 한참을 꼼지락거리며 수줍은 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대담한 테크닉까지 욕심 내지는 않았지만 찌릿함은 고사하고 간질이는 느낌조차 미미하니 낭패였다. 이를 어쩌나 난감해 하고 있는 찰나에 나를 슬쩍 올려다보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돌이켜보면 이때 그에게 구체적으로 어디를 자극해달라고 부탁하거나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함께 탐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치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선물을 받았을 때 상대에게 티를 내기 힘든 때 같은 부담감을 느꼈달까? 나는 순간 ‘으응’ 하고 마음에도 없는 신음을 냈다. 그는 그걸 오케이 사인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고, 나는 괜한 죄책감에 절정을 연기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가 커닐링구스를 해줄 때면 오르가슴을 연기한다. 이제 와서 그간 네 혀 놀림이 별로였다고 말하기엔 후폭풍이 두렵다. 남자친구는 모를 거다. 내 신음에 서린 구슬픔을 말이다. L, 25세, 대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