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공식 기자회견이 있던 날 이용관 이사장과 전양준 집행위원장은 나란히 앉아 기자들의 질문에 차분히 답했다. 두 사람의 복귀와 동시에 영화계가 보이콧을 철회한 이후 처음으로 맞는 영화제.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산적한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는 이용관 이사장은 화합과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부산국제영화제의 향후 방향성을 정리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신중을 기해 선정한 영화들로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느 때보다 알차게 채워졌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작은 79개국에서 온 총 3백 23편이다. 이 가운데 월드 프리미어,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는 1백40편. 개막작으로 선정된 작품은 윤재호 감독의 <뷰티풀 데이즈>다. 배우 이나영의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은 탈북 여성이 생존을 위해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적당한 거리에서 담아내며 관객에게 동정이 아닌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낸다. 이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전양준 집행위원장은 “가족이 해체된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결국 가족이 복원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주제가 시의적절한 점도 감안했다”고 말했다. 폐막작으로 선정된 <엽문 외전>은 <매트릭스> <킬 빌> 시리즈의 무술 감독을 맡았던 원화평 감독의 최신작이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던 기억 속의 영춘권을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볼 기회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는 경향은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고전 영화 12편을 상영하는 ‘부산클래식’ 부문이 신설되었다는 점과 매년 소홀히 하지 않는 아시아 영화, 그중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꾸준히 관심을 보여온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국가 영화가 많이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뉴 커런츠’와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서 돋보이는 여성 감독들의 활약도 반가운 부분. 갈라 프레젠테이션은 한·중·일 3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의 신작으로 꾸렸다. 장률 감독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갑자기 군산 여행을 가게 된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로 문소리, 박해일, 정진영, 박소담 등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홍콩 올 로케이션으로 제작한 관금붕 감동의 영화 <초연>은 왕년에 라이벌이던 두 배우가 함께 연극을 준비하면서 초연을 앞두고 느끼는 불안을 담아낸 작품. 4년 만에 부산을 찾은 츠카모노 신야 감독의 신작 <킬링>은 시골에서 무술을 수련하던 청년이 갑자기마을에 찾아온 무법자들에 의해 사무라이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렸다.

눈에 띄는 아시아 신인 감독들의 작품으로 꾸려지는 뉴 커런츠 부문은 10편의 영화 중 4편이 여성 감독의 작품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함께 일했던 히로세 나나코 감독의 <여명>과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아이 ‘선희’의 이야기를 담은 박영주 감독의 <선희와 슬기>를 주목할 만하다. 스리랑카, 키르기스스탄, 부탄 등 낯선 나라에서 온 도전적인 작품들은 늘 신선한데 아시아 영화의 큰 흐름을 다루는 ‘아시아영화의 창’ 부문에 초청된 작품에도 이런 경향이 이어진다. <세 얼간이>의 라지쿠마르 히라니 감독의 신작<산주>를 비롯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키르기스스탄 영화 <성스런 나무의 노래>, 사회 전반에 개방의 물결이 넘실대는 우즈베키스탄의 오늘을 엿볼 수 있는 영화 <고요한 인내> 등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중앙아시아를 마지막 뉴웨이브가 나올 수 있는 곳으로 지목하는 이유를 확인하게 한다.

전 세계 영화인의 새로운 시각과 각 문화권의 문제의식이 담긴 시선을 접할 수 있는 ‘플래시 포워드’ 부문에는 노동자의 일상과 직장 내 갈등을 섬세하 게 담아낸 벨기에 영화 <우리의 투쟁>, 두 여성의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자국에서 상영 금지 조치를 받은 케냐 영화 <라피키, 친구> 등 다양한 현대사회의 논점을 독특한 시선으로 담아낸 영화가 포진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과거, 현재, 미래도 부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올해 개봉한 대형 상업 영화들을 ‘파노라마’ 부문에서 대거 다시 만날 수 있고, 80년대 리얼리즘의 선구자 이장호 감독의 회고전은 70~80년대 한국의 현실을 담은 영화를 다시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비전’ 부문에 선정된 국내 신인 감독들의 강렬한 데뷔작은 한국 영화의 가능성과 미래를 점쳐볼 기회다. 특히 이옥
섭 감독의 <메기>는 많은 시네필이 고대하는 기대작이다.

이 밖에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은 작품과 거장의 신작이 대거 포진해 늘 티켓 경쟁이 치열한 ‘월드 시네마’, 다양한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날 수 있는 ‘와이드 앵글’, 특별기획 프로그램인 ‘필리핀영화 100주년 특별전’, 새벽까지 공포영화를 볼 수 있는 ‘미드나잇 패션’까지. 부산국제영화제가 준비한 영화와 함께하는 즐거움은 끝이 없다. 다음에 펼쳐지는 부문별 상세한 해설을 참고한다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