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 복도 많아.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 복도 많아.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마흔 살의 찬실이는 어느 날 갑자기 길을 잃는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던 시간이 애초에 없었던 시간처럼 사라져버렸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일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찬실이는 복이 많다. 서로 응원하는 사람들과 만들어가는 소소한 일상이 있고, 밥 한 끼를 챙겨주는 할머니를 만나고, 한숨 고른후 시작할 용기를 얻고, 잠시 잊고 있었던 꿈의 시작을 되짚으며 다시 길을 찾아간다. 찬실이는 복도 많다.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노래가 중독성 있다. 민요에 더해진 가사를 자꾸 되새기게 된다.(웃음)
김초희 가사는 내가 썼다. 영화의 후반 작업을 하면서 엔딩곡은 가사가 있었으면 했다. 그러다 경기민요 이수자인 씽씽밴드의 이희문 씨를 어느 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내 친구 남편이 이희문 씨의 공연을 스페인에서 봤는데 무척 좋았다는 얘기를 들은 게 기억났다. 이런 인연으로 문득 이희문 씨가 엔딩곡을 함께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자마자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섯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엔딩곡도 함께하게 됐다. 내가 가사를 쓰고 이희문 씨가 ‘사설방아타령’이라는 곡을 추천해줬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정중엽 음악감독이 편곡했다.
강말금 배우의 어떤 면에서 찬실이를 찾은 건가?
김초희 단편영화 <자유연기>를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본후 일주일 정도 고민하다 배우에게 메일을 보냈다. <자 유연기>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많은 면에서 다른 작품이었지만, 영화 속 강말금 배우의 진정성 있는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진짜 같은 얼굴. 그 안에는 이야기가 있었고 살아온 시간의 구력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묵직한 다발 같은 다양한 결 속 어느 한 부분이 찬실이의 결과 맞닿아 있다. 찬실이도 청춘을 다 바쳐서 자신의 꿈을 향해 내달리다 뜻하지 않은 이유로 갑작스레 일을 잃고 멈춰버린다. 그래서 찬실이의 얼굴에는 청춘을 다 바쳐서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온 느낌이 있어야 했다.
시나리오를 통해 만난 찬실이의 첫인상이 궁금하다.
강말금 감독님이 보낸 메일에 적힌 글이 참 좋았다. 간곡 하고 예의 바르면서 물기가 있는 느낌.(웃음) ‘당신이 좋으니까 함께 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으니 행복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 찬실이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데다 싱글이 고. 내 인생도 느린 속도라서 공감됐고, 찬실이처럼 작은 실패의 연속이라는 점에서도 통했다.
김초희 인생은 무수한 실패와 소수의 성공으로 점철돼 있지 않나.
강말금 자신 없기도 했지만 장편영화를 통해 한 여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 기회가 왔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찬실이를 쓴 감독과 찬실이를 연기한 배우가 이 인물을 소개한다면?
김초희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사람. 그리고 주어진 조건에서 답을 찾는 인물.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위기가 있지 않나. 위기에도 충실하게 살아야 하지만 어쨌거나 그 시간을 넘어간다. 그 실패 안에 갇혀 있거나 그런 순간에 매몰되어버리면 인생이 망가진다. 찬실이는 비록 위기에 처한 인물일지라도 주어진 조건에서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아간다.
강말금 찬실이는 솔직하고 일단 연애 감정에 서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다.(웃음) 말하자면 여자 진국. 충분히 매력적인데 좋아하는 남자와 마지막 단계 에서 성사가 잘 안 될 뿐이다.
김초희 찬실이는 환상을 심어주지 않거든. 연애의 필수 조건이 환상 아닌가. 연애의 과정은 환상을 깨가는 것인데 깰 것이 없으니 연애가 되지 않는다.
강말금 찬실이는 여자 진국이다.(웃음) 건강하고 씩씩 하고.
영화에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겼다고 알고 있다.
김초희 영화는 찬실이가 겪는 좌절부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내 자전적인 이야기가 모티프가 된 것은 사실이다. 영화의 출발은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찬실이만의 좌절 이후의 일이 펼쳐진다.
강말금 그래서 고민하다가 내가 경험한 좌절감에 무게를 더했다. 그런데 그 무게감이 지나쳤는지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감독님이 좀 더 귀엽게 하라고 했다. 귀엽게 해라. 다시 귀엽게, 다시 귀엽게.(웃음)
김초희 찬실이가 인생에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고통스럽게만 보이면 오히려 공감할 수없다고 생각했다. 그 슬픔을 통과하는 주인공이 밝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야 모두의 공감을 사지 않겠나. 어두울때 어둡고 귀여울 때 귀엽고 밝을 때 밝고. 심각한 인물로 그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심각해지면 한번 더 갔다. “안 돼요, 한 번만 더 갈게요. 지금 안 귀엽습니다” 하며.(웃음)
촬영 현장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김초희 제작비가 넉넉하지 않다 보니 많은 회차로 오랫동안 촬영할 수없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을 촬영하기 위해 매 순간 고개를 넘는 기분이었다. 그저 행복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강말금 쉬운 현장은 아니었지만 늘 앞으로 가는 기분이 드는 후회 없는 현장이었다. 지나간 건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기분. 나는 작은 일에는 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데, 큰 절망 앞에서는 희망의 싹을 본다.
수처작주 같은. 찬실이가 밑바닥에 있을 때 장국영도 나타나고, 좋은 글도 등장하고, 좋은 할머니를 만나는 것처럼 내 삶도 그랬다. 가장 어두운 시기에 좋은 일이 일어났다.
촬영을 마친 후에 작품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나?
김초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탈 줄 몰랐다.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해줄 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에 늘 걱정했고 노심초사했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하고 많은 관객이 좋은 평가를 해준 덕분에 이 영화를 만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말금 배우에게) 관객이 좋아해줄 줄 알았나?
강말금 몰랐다. 편집본을 봤을 때 내 얼굴만 계속 나오니까 못 보겠더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막상 다 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큰 화면으로 보니 내가 연기를 하고 있긴 하더라.(웃음) 편집본을 혼자 볼 때와 다르게 극장에서 영화를 보니 관객의 반응이 사이사이 채워 졌고, 걱정과 부끄러움을 그제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여전히 부끄럽고 걱정된다. 그래도 환대해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껴지니 이제 마음을 좀 열어야겠 다는 생각이 든다. 개봉을 기다리는 지금 행복하다.
영화에 대한 평가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김초희 ‘찬실이는 남자에게 지질하지 않다. 차이더라도 다시 자기 삶으로 돌아와서 다시 잘 산다.’
강말금 ‘오늘 같이 슬픈 날에 나에게도 장국영이 있었 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시나리오에 장국영이 등장해서 참 좋았다. 수호천사가 있는 거니까. 연기 하면서도 장국영이라는 존재가 있어 힘이 됐다.
김초희 내게도 등장인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꼽으라면 장국영이다. 영화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고, 그런 판타지 같은 인물이 다. 사실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장국영이라는 배우 때문이다. 내가 중학생일 때 홍콩 영화가 그야말로 붐이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좋아지고 나서 보니 고민 거리를 던져주지 않으면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다 다시 시간이 흘러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을때 영화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이유가 홍콩 영화와 장국영이었다는 걸 깨달았고, 그 시간까지도 보듬고 싶었다. 그래서 장국영이라는 인물을 만들게 됐다.
강말금 이런 평도 있었다. 장국영과의 대화는 결국 찬실 자신과의 대화라고.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같은 거아니었을까?
찬실이는 마흔 살의 여성이다. 강말금 배우는 마흔살 무렵 영화 연기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강말금 40대에 들어선 비혼 여성은 장기가 죽는 경험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나의 장기 중 자궁이 가장 먼저 죽은 거지. 그와 동시에 나도 언젠가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살에 연기를 시작하고 서른다섯 살까지 실패만 했다. 연극을 시작한 후 한동안 돈을 거의 벌지 못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도 말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러다 서른다섯 살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맘때쯤 살 만하다 싶었는데 다시 내리막길이 오더라. 일은 잘 풀렸는데 체력적으로 힘들었고, 내 속도가 너무 더딘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너무 늦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나를 키운 게 연극 무대와 그곳에서 만난 동료들이지만 결국 짝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대와 사람 모두 내게 잘해줬지만 이뤄질 수 없는 사랑. 그 즈음 영화 <자유연기>를 만났다. 연기는 구체적인 꿈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달려온 시간이 문득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왜 내 삶에서 연기가 가장 중요했던 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이가 들면서 가족을 좀 더 돌보고 일상을 더 단정하게 꾸리려고 한다.
김초희 마흔한 살에 프로듀서 일을 그만뒀다. 영화를 한다고 쉼 없이 달려왔는데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끝나버린 거다. 어리기만 한 나이가 아니다 보니 뭔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선뜻 실행하게 되지 않았다. 갑자기 내 인생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영화 일을 했는데 상처만 남은 것 같았다. ‘찬실’이라는 이름은 빛나는 열매라는 뜻이다. 내 인생에도 결실을 맺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영화를 꿈꿨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젊을 때는 목표를 두고 꿈을 향해 패기 있게 내달렸다면, 앞으로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가며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기로. 마흔 살 언저리에 그런 점이 보여서 다행이다. 전에는 영화 없이 살 수 없을 것같았지만, 이제는 영화가 아닌 삶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성공도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게 꼭 우리의 행복과 상관이 있지는 않다. 우리 찬실이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성과나 성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에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기뻐했으면 한다.
영화의 원래 제목이 <눈물이 방울방울>이었다.
김초희 영화를 만든 후 거리를 두고 보니 찬실이가 집도 없고 일도 없고 뭐 하나 잘되는 거 없지만 사람 복만큼은 진짜 많더라. 힘든 시간을 고군분투하는 삶은 고생스럽 겠지만 살아 있기에 이런 감정도 느끼는 것 아닌가. 살면서 갈등이나 고통, 힘듦 이런 것들을 부정하곤 하지만 겪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갈등과 고통의 시간을 긍정하는 마음을 제목에 담고 싶었다.
이 영화를 본 관객과 공유하고 싶은 감정은 무엇인가?
김초희 우선 다양한 분들이 보면 좋겠다. 몇 년 전의 나처럼 앞날이 뿌연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잘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찬실이의 이야기에 더 공감 하고 힘을 얻지 않을까? 절망의 시간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관객에게 그런 희망을 전하고 싶다. 감히. 슬픔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
강말금 지금 마음이 쓸쓸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 후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길 바란다. 황량했던 마음이 조금 채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