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진료

지난 여름의 일이다. 희끄무레한 분비물이 늘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게 딱 질염 증세였다.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그 분이다. 새벽 두 시에 받는 지질한 구 남친 문자처럼, 심각히 여길 건 아니지만 영 찝찝한 골칫거리. 한국에서 같았으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아무 때나 회사 근처나 동네 의원에 방문했을 일이다. 하지만 여기는 독일이고, 나는 독일말이 아직 외계어같이 느껴지며, 병원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급하게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다. 독일은 아무리 작은 병원이어도 꼭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단다. 일단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안 받는다. 또 다른 곳은 자동응답기로 넘어간다. 금요일이라 예약접수를 일찍 마감한 건가? 세 군데쯤 허탕을 치고는 방문예약으로 작전을 바꿨다. 집 근처 의원은 아침 7시에 연다. 어쩌면 새벽같이 달려가면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을 지도 몰라. 월요일이 오길 기다려 6시 50분부터 병원 앞에서 대기했다. 접수대의 직원은 척 봐도 하등의 직업적 만족이 없는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다. “진료 예약을 하고 싶은데요, 처음 방문하는 거예요.” 준비한 문장을 읊는데 곧바로 이 곳은 새 환자는 안 받는다고 말을 자른다. 뭐라도 대꾸하려 우물거리니 좀 더 큰 소리로 기존 환자가 아니면 진료를 해 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실망하긴 이르다. 이럴 줄 알고 병원을 한군데 더 검색해 두었지. 곧장 두 번째 의원으로 향했다. 이 곳 접수 창구 직원은 더 죽상이다. 진료는 가능하지만 가장 빠른 예약은 3달 후라고 한다. 뭐라고요? 이 아랫도리의 싸한 가려움을 90일 동안 더 느끼라는 말입니까? 당장 아픈 티를 내면 사정을 봐주기도 한다는 글을 웹 상에서 읽은 게 생각나,  아랫배를 그러쥐며 사정하듯 “Es ist dringend(급한 일이에요).”를 외쳤다. 씨알도 안 먹힌다. “그럼 다른 의원에 가세요.” 나의 방문접수 시도는 패배와 굴욕으로 얼룩졌다.

동네 의사 얼굴 한 번 보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든 걸까? 그 후 며칠간 주변 친구들에게 앓는 소리를 한 결과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의 의료보험은 공적 보험과 사보험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공보험은 진료비용, 즉 수가에 대해 병원당 정부에 청구할 수 있는 예산이 한정되어 있기에 대개 일정 수 이상의 공보험 환자는 받으려 들지 않는다. 진료를 해 보았자 손해이니까. 반면 전체적인 병원 수는 모자란 편이라 산부인과 같은 전문 의원은 특히 이 지역에서는 짧게는 몇 주에서 두세 달 정도 진료를 기다려야 하는 게 태반이라고 한다. 환자 영업에 관하여 크게 아쉬울 게 없는 병원이라 여름이면 휴가를 2~3주씩 다녀온다는 것(그래서 전화를 그렇게들 안 받았구나), 다녀오고 나서는 그동안 밀린 진료 스케줄 정리를 이유로 새 예약을 거부하기 일쑤라는 것도 들었다. 그리고 이런 병원에서 긴급 환자로 분류되어 당일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그냥 아픈 티를 내는 정도가 아니고 접수대 앞에서 파랗게 질려 쓰러지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친구들은 정 급하면 그냥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보라는 데, 급성 생리통이면 또 모를까 ‘고작’ 질염을 이유로 응급실 문을 두들기는 게 도대체 나의 한국 정서로는 내키지가 않았다. 그들이 내밀 응급실 청구서의 규모가 자못 걱정되기도 했고 말이다.

일주일이 지나도 질염 증세는 가시지를 않았다. 모 아니면 도겠지하는 심정으로 두 가지 종류의 질정과 연고를 약국에서 사보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결국 같은 이방인 처지의 미국인 친구에게서 비보험인 경우 1~2주 내로 예약을 잡아준다는 부인과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전화 연결도 성공, 예약도 열흘 뒤로 잡았다. 야호! 예약에 성공한 것만으로 갑자기 가려움증이 잦아드는 느낌이다.

병원은 또 어쩜 이렇게 안보이는 곳에 있는지. 도시 경관 정책 탓인가, 건물 바깥으로 보이는 간판도 없고 그냥 건물 입구를 찾으니 하얀 배경에 명조체로 ‘닥터 OO’라 붙여놓은 게 전부다. 예진표를 작성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지긋한 나이의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상냥해 보였다. 증상에 대해서는 독어로 표현할 자신이 없어 영어로 말했다. 그는 세균 검사와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며, 진료실 내에 있는 작은 방인 주사실 겸 탈의실에서 바지와 속옷을 벗고 나오라고 했다. 한국에서 다녔던 모든 부인과에는 항상 하의를 벗고 나서 입을 진료용 고무줄 치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긴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건 없다. 흠. 이런 거면 왜 굳이 방에 들어가서 벗고 나오라는 거지? 곰돌이 푸처럼 웃도리만 입은 채 신발을 구겨 신고 쭈뼛쭈뼛 나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를 마주하니 민망함이 솟구친다. 다행히 내진은 한국에서와 같았다. 면봉으로 분비물을 채취하고, 초음파 검사를 진행했다. 초음파를 진행하는 데 선생님이 난데없이 자궁의 모양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대부분 방광을 감싸고 배 앞쪽으로 기운 모양을 하는데, 나의 자궁은 반대로 뒤로 누운 형태라나? 한국에서 초음파를 일년에 한두 번씩 꼬박 받아왔지만 이런 말은 처음 들었다. 내가 못 알아듣는 눈치를 보이자 그림으로 그려가며 설명을 보탠다. 걱정할 건 전혀 아니고, 여성 중 10%만 해당하는 경우이니 나름 특별하게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저는 스페셜한 자궁을 가졌군요. 허허.

보통 한국에선 세균 검사 결과를 2~3일 내에 문자로 알려주는 식이었는데, 여기서는 의사 선생님이 바로 환자 앞에서 직접 현미경으로 샘플을 분석해주는 게 조금 달랐다. 그는 검사결과 상 세균성 질염으로 소견되고, 질 내 유산균 수가 현저히 줄어든 상태라 그걸 보충해 주는 유산간균(Lactobacillus)약이 필요할 것 같다며 진단을 꽤 명쾌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처방전도 그 자리에서 바로 써서 내게 건네주며, 어떤 약이고 언제 먹어야 하는 지 함께 설명해주었다. 사실 의사선생님의 성향은 개인별로 다르다고 생각해 한국에서의 경험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이후 다른 질환으로 병원진료를 받은 일까지 더해 떠올려보면 이곳에서는 전체적으로 환자에게 좀 더 시간을 들여 설명을 해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진료를 마치고 나와 접수대에서 지갑을 꺼내자 바로 돈을 낼 수 없고 청구서는 집으로 발송될 거라고 한다. 병원비 고지서가 우편으로 배달된다니. 이런 아날로그식 행정처리는 한국에선 2000년대 이후로는 겪어보지 못한 것 같다. 일주일 후 우체통으로 날아온 청구서엔 열한 가지 진찰 사항에 대한 단가가 빼곡히 적혀있다. 세부 상담에 30.60유로, 전신 상태 확인에 34.86유로, pH 농도 확인에 2.68유로, 세균 검사에 12.06유로 등. 초음파 검사는 자궁, 질, 방광 등 각각에 대한 금액이 따로 책정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영수증에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나왔던가? 어떨 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을 따지는 독일 다운 청구서다. 비용은 한국 돈으로 25만원 가량이었다. 고지서에 나온 계좌로 진찰비를 이체했다. 카드 결제 따위 없다. 의료보험혜택 없이 병원에 가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다행히 약은 잘 들었다. 한국에서 필요할 때 아무 날에나 의사를 만날 수 있던 날들을 떠올렸다. 한국이 그립다. 아니, 한국 병원이 그립다. 생각 난 김에 올해의 부인과 진료 예약을 미리 해 두어야겠다. 진료를 받을 때쯤 되면 또 질염이 돌아올 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