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경 셔츠 코스(COS), 재킷 스튜디오 톰보이(Studio Tomboy). 장선 니트 스웨터와 팬츠 모두 코스(COS).

영화 <바람의 언덕>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 딸을 버린 엄마 ‘영분’과 딸 ‘한희’가 강원도의 작은 도시 태백에서 재회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분은 한희에게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딸이 운영하는 필라테스 교습소의 수강생이 되고, 인적 없는 밤길에 필라테스 교습소 홍보물을 붙이며 딸의 삶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고 한다. 가까운 친구 하나 없이 교습소 텐트에서 살아가는 한희는 그런 영분이 있어 외롭지 않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던 영분과 한희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따듯한 시간을 맞을 수 있을까? 그리고 더 이상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무서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엄마와 딸인 영분과 한희를 시나리오를 통해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은 어땠나? 장선 시나리오를 읽고 가장 크게 다가온 건 도시의 이미지였다. 하얀 눈이 쌓인 언덕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추운 겨울이어서 더 잘 느껴지는 따듯함이라고 할까? 아주 추운 겨울이지만 따듯한 기운이 오밀조밀하게 담겨 있었다. 시나리오로 한희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때까지 생각했던 인물과 달랐다. 난 좀 더 담담한 아이일 줄 알았다. 어른스럽고 혼자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 스스로 자신을 어른이라 생각하는 아이. 반면 시나리오 속 한희는 여리고 누르려고 하지만 외로움이 보인다. 정은경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안쓰러웠다. 영분과 한희뿐 아니라 태백에서 만난 윤식 씨, 전남편과 함께 살던 아들 용진 모두 외롭게 다가왔다. 영화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살면서 한번쯤 만났을 것 같고, 내 안에도 그들 각자가 가진 외로움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그중에서도 영분은 씩씩하게 애쓰며 사는 모습에 연민이 생겼다.

처음에 생각한 한희와 달랐던 시나리오 속 한희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나? 장선 박석영 감독님이 한희는 오랜 투병 생활을 끝내고 세상에 막 나온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저렇게 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 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을 터놓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 하나 없이, 두려움이 많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시나리오에는 인물의 과거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한희와 영분은 어떤 서사를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했나? 장선 한희는 공황장애로 인한 과호흡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고아원에서 선택받고 싶은 마음에 생긴 스트레스에서 온 병일 것이다.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다 한 입양처를 두고 자신도 모르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이아이를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과호흡증후군을 이겨내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 운동이 좋아 자격증까지 따서 고향에서 필라테스 교습소를 차린 거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지만 그래도 고향 태백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서. 정은경 영분은 결혼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책임감이 필요할 때면 외면하고 떠나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도 버렸겠지. 그 일에 대한 죄책감도 가지고 있고. 하지만 늘 주체적으로 살아 왔을 것이다. 자존감도 높고 타협하지 않으며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 안주하며 살지 않다 보니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나게 되고. 젊었을 때는 청년의 욕망을 좇았지만 중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이 뭘 찾고 있는지 모른 채 정착하지 못하며 산 게 아닐까?

늘 떠나기만 한 영분이 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을까? 정은경 죽은 남편을 굉장히 따듯하게 보내줬다고 생각했기에 떠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분은 한희에게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엄마다. 책임을 지기보다는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쓰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이다. 자신을 좋아해준, 사별한 남편이 편히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간병했기에 이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다. 죽은 남편을 잘 떠나보내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바람의 언덕>을 떠올리면 어떤 장면이 가장 먼저 생각나나? 장선 영분과 윤식이 막걸릿집에서 함께 노래하는 장면을 가장 사랑한다. 이들의 살아온 시간이 느껴 졌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이 장면이 너무 사랑스 러워서 웃음이 나다 눈물이 흘렀다. 영분도 사실은 누군가 보듬어야 할 소녀이던 시절이 있었을 테고, 그 시절을 보내며 살아온 세월이 담긴 장면이어서 좋았다. 한희가 영분이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처음 수업하는 장면도 마음에 많이 남는다. 그리고 엄마를 만나기전 언덕에 올라 바람을 맞는 장면이 좋았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 외에 로드쇼 형식으로 영화 상영회를 진행해왔다. 개봉 전 영화를 본관객이 꽤 많은데 관객의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정은경 중년의 한 여성 관객이 영분의 ‘무섭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앞으로 남은 세월이 무섭고 그동안 살아온 시간을 생각하니 무섭고. 우리 모두 그러지 않나. 많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앞으로 다가올 삶이 무서운 거지. 한번은 관객과의 대화 (GV)가 끝난 후 한 노년의 관객이 박석영 감독님을 부르더니 앉혀놓고는 엄마가 영분이처럼 살면 안 된다고 하셨다. 엄마란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웃음) 장선 GV에서 다양한 감상을 들을 수 있다. 한번은 태백 바람의 언덕에 가본 적 있다는 한 고령의 할머니가 6·25 때부터 자신의 삶을 얘기하며 영화에 대한 감상을 얘기해주셨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그이상을 얘기하는 관객을 만나면 놀랍고 울컥할 때가 있다. 한 관객이 웃으면서 살라고 엄마가 ‘한희’라는 이름을 지어줬을 텐데 막상 딸을 만났을 때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어떻게든 웃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많이 날것 같다고도 하셨다. 정은경 영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한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젊은 관객도 있었다. 가족을 미워하고 대화도 잘하지 않는다던 그 관객은 감독님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용기 내어 가족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했다.

자식을 두고 떠났으면서 다시 돌아와 이해와 용서를 구하기보다 도리어 화를 내는 엄마 영분과 원망의 감정 하나 없이 엄마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한희 모두 이해 하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장선 누구보다 한희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끝까지 원망 한 번 못 하는 한희가 속상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영화에서는 이런 인물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말이 큰 힘이 되었다. 정은경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영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엄마가 왜 이런 거지. 내가 연극에서 연기한 엄마는 가족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자식에게 내어주고도 미안해하는 엄마였다. 내가 생각하는 엄마는 이런 존재 인데 과연 내가 영분을 잘 연기할 수 없을지 걱정도 되었다. 첫 장면을 끝내고 태백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며 다 털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감독님 말씀처럼 하루 하루 열심히 사는 인물을 만들며 연기했다. 작품을 끝내고 관객과 만나면서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엄마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박석영 감독은 왜 영분을 일반적인 엄마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정은경 처음에는 감독님에게 아이를 버린 엄마라면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 그 아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살고, 아이를 만나면 용서를 구하고 엄마와 딸로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래야 더 많은 관객이 공감하고 영화를 보러 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그때 감독님이 영분이 엄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지점에서 감독님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선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엔딩이 가장 좋다. 정말 좋다. 엔딩 장면을 두고 감독님이 바꾸자고도 했는데 나는 계속 이대로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억지로 해피 엔딩을 맺기보다는 엄마와 딸로서 각자 서로 사람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좋았다.

오늘 문득 떠오르는 현장에 대한 기억이 뭔지 궁금하다. 정은경 연극 무대에서 연기하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건 <바람의 언덕>이 처음이다. 모든 스태프가 배우들을 배려하고 그림처럼 눈이 내린 현장이 참 아름다웠다. 훌륭한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현장에서 지금까지 없던 엄마를 연기할 수 있어 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태백도 아름다웠다. 밤이 되면 마주치는 사람 하나 없이 우리만 있는 느낌이 들었고, 눈이 펑펑 오고 기차가 영화처럼 지나갔다. 장선 태백에 서 만난 사람들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자주 갔던 밥집 이나 술집 사장님도 그렇고, 엄마가 일했던 ‘햇빛 모텔’ 사장님도 그렇고. 촬영을 마치고 떠날 때 아쉬워하는 사장님도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태백에서 보낸 시간도 즐거웠다.

<바람의 언덕>을 통해 관객과 어떤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가? 정은경 많은 여자들이 봐주었으면 한다. 나도 영화를 보고 엄마가 생각났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가 살아생전 나를 위해 참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특별한 날 신으려고 사두었던 신발을 신지 않은 채 그대로 상자에 담아두었다가 결국 내게 신으라며 주던, 늘 가족을 위해 참으며 희생하던 나의 엄마처럼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영분과 다른 삶을 산다. 엄마 덕분에 지금 내가 잘 살아 가고 있는 거겠지만 우리 엄마도 영분처럼 참지 않고 자신의 삶을 위해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정해진 틀에 맞춰진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로 살아 왔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일이 무섭다는데 공감할 것 같다. 이렇게 공감하다 보면 다른 삶도 인간으로서 이해하기보다 소통할 수 있지 않겠나. 나도 그렇게 자기를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백하는 것. 영화가 그런 용기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선 부산에서 상영할 때 엄마와 남동생이 영화를 보러 왔다. 그때 남동생이 다른 사람들이 쳐다볼 만큼 오열하며 봤다. 남동생 때문에 엄마가 도리어 눈물이 쏙 들어갔다더라. 그렇게 엄마와 자식이 함께 봤으면 좋겠다. <바람의 언덕>은 인물들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용진은 스스로 아빠가 투병 생활을 했던 침대를 정리하 고, 엄마는 다시 한 번 떠나려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한희도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런 변화가 그들에게는 어딘가에 매어 있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위로가 된다. 영화를 보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한 힘과 위로를 얻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만들며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나? 장선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지 못하겠더라. 많이 울 것 같았다. 엄마가 엄마라는 호칭이 아니라 당신 이름으로 불리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으 면서 나도 모르게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엄마는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나에게 미안해했다. 자신의 삶을 돌보느라 날 놓은 시간 동안 내가 혼자 자라버린 것 같다고 했다. 엄마도 영분처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을 텐데 내뱉지 못하고 혼자 삭이며 살아 왔겠지. 이런 생각이 드니 원래 친구처럼 지내던 엄마와 더 가까워졌다. 정은경 나에게 늘 다 주었던 엄마가 고맙다. 엄마가 그랬기에 나 역시 인내하며 살 수 있었다. 나에게 엄마는 어떤 점에서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을 갖기보다 씩씩한 엄마로 기억하고 싶다. 행복하고 예쁜 모습으로 씩씩하게산 엄마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