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시오리 저널리스트

희망을 위한 최선의 선택

일본 미투 운동의 상징인 이토 시오리. 수차례 이메일이 오간 끝에 그와 스카이프를 통한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걸려온 영상 통화 속 이토 시오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나는 법을 바꾸는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을 교육하는 교육자도 아니지만 어떤 문제에 의문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내 피해 경험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무척 괴롭다. 이렇게 걸으면서 인터뷰하는 것도 좀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일은 여전히 힘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 시오리는 희망을 주기 위해 인터뷰에 나섰다. 매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전해지고, 이를 보는 피해자들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수 있다는 희망. “우리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세상은 변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

저서 <블랙박스>를 한국에 출간할 당시 성폭행 가해자인 야마구치 노리유키 전 TBS 방송 기자와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소송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민사소송 승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민사소송을 진행하면서 그 전보다 더 자세하게 증언이나 증거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상대가 하고 싶은 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사소송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승소했을 때는 무척 놀랐습니다. 일본의 법상 조금 힘들 거라고 생각한 부분도 있었고 여태까지 일본에선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사례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이런 결과로 이어진건 민주주의 운동이나 인식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 보다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제가 소송 함으로써 저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증언해준 사람을 비롯해 몰랐던 사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의미 깊은 일이에요.

형사소송에서 불기소처분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민사소송으로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소송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불기소처분을 받고 저와 변호사는 새로운 증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형사소송을 진행한 2015년에는 일본에서 성폭력 관련 법이 개정되기 전 형법에 따랐기 때문에 더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강간이 성립되려면 협박이나 폭행이 얼마나 있었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그게 큰 벽이어서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 그 부분에 물음표를 던지고 싶었어요. 그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 뒤에 법이 개정됐지만 지금도 그 부분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긴 싸움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과거의 사건을 반복해서 말해야 했고 때론 협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난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 후회되지는 않나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 경험을 얘기하지 않고 소송을 진행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싸우기 위해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경찰이나 사법부가 제 기능을 하는 사회였다면 대중에게 이런 식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었을 테죠.

한국에서는 현재 n번방 성 착취 범죄라고 불리는 디지털 성범죄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디지털 성폭력에 무감각했기 이렇게 끔찍한 범죄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최근 보복성 영상물 관련 법률이 제정 됐습니다. 인터넷에서 그런 영상이 퍼지면 피해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각하게 퍼지죠. 더 많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 건 사건 이후 피해자가 겪어야 하는 과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경찰이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이나 사건이 알려지고 나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마음대로 사건을 판단한다는 점이 성범죄를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저도 그랬어요. 사건을 알린 후 정신적인 피해가 계속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디어가 성범죄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 또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가 특히 안타까운 이유는 피해자의 피해 기록이 영상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나요? 정확히 디지털 성범죄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상을 촬영당하고, 이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는 사건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요.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성인 포르노물(AV) 촬영을 거부하면 계약 위반이라는 식으로 협박하고 촬영을 강요하는 일이 있습니다. 또 불법 카메라가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교복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갈 때 누군가 숨어서 사진을 찍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저를 포함한 많은 여성이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성폭력 사건은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잘못된 여론을 낳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기가 쉽지 않고요. 미투 운동이 세계적으로 활발히 일어나면서 피해자를 보는 시선이 변화한 것을 체감하나요? 우선 피해 사실을 알리길 주저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성폭력 방지 센터를 방문했을 때 들은 얘기예요. 제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폭력을 겪은 후 내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내가 잘못한 건 없는지 곱씹으며 저 자신을 탓했습니 다. 아마 많은 피해자가 이런 생각을 할 거예요. 그런 일을 겪고 왜 바로 알리지 않았는지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서울 성폭력 방지 센터에서 만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고마워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들었지만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칭찬을 들은 적은 없었어요. 그 말이 아주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사건 이후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일어난 사건과 내가 입은 피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인이라는 겁니다. 설령 나를 의심하고 곤란에 처하게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성폭력 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이 성폭력이 어두컴컴한 골목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공간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미투 운동 이후 많은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성폭력이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그 범죄의 심각성을 알렸습니다.

 n번방 성 착취 범죄의 경우, 피해자의 신고가 아닌 n번방의 실체를 최초로 알린 대학생 기자단이 경찰에 제보하면서 수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미투 운동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거지만, 사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피해자가 직접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성폭력 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뿐 아니라 목격하고도 못 본 척하는 제 삼자가 존재할 때가 있습니다. 미투에는 ‘나도 보고 들었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성폭력을 목격한 사람은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한국의 n번방 사건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일을 문제 삼아 알리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미투 운동은 약자의 연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미투 운동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이를 위해 어떻게 기여하고 싶은지요? 미투 운동은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디어는 일어난 일에 대해 깊이 있게 보도해야 합니다. 저는 저널리스트 로서 잠시 흥밋거리로 소비되고 마는 뉴스를 만드는 게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뉴스로 다루지 않은 문제에 대해 다큐멘터리나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알리려고 합니다.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중 시에라리온을 비롯해 아프리카 지역의 아동 성폭력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2년이 되어갑니다. 이미 아프리카에 네 번 정도 다녀왔고, 한 번 가면 2~3주 머뭅니다. 올해 1 월에도 현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다녀왔어요. 장기 프로젝트여서 앞으로도 작업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이 밖에도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전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어두운 진실을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통해 마치 내 동생이나 내 딸에게 일어난 일처럼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스에서는 피해자 A씨라 칭한다면 다큐멘터리는 피해자를 보다 인간적으로 다룹니다. 가볍게 소비 되는 정보를 전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시대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어릴 때는 인터넷이 없었습니다. 또한 여자니까 여자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선입견에 갇혀 자랐습니다. 어른이 되어 제 생각을 전달하는 일을 하면서 여성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딸, 엄마처럼 성별에 따라 정해진 틀 역시 필요하지 않고요. 인터넷은 디지털 성범죄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서지현 검사를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번역기를 동원해가며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건 인터넷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인터넷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성범죄를 알게 된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만 동시에 오늘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처럼 인터넷을 통해 취재할 수 있고, 제게 용기를 주는 두 사람(기자와 통역사)을 볼 수 있는 것도 인터넷 덕분입니다. 결국 디지털 세상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공존해야 하는 세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