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권리 낙태죄 폐지 비혼 출산

태어나기만 하면 살아지나?

작년부터 꾸준히 우울증을 겪는 20~30대 여성들을 취재하고 기록하는 중이다. 임신 중지를 막으려는 여러 시도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나 죽이지 마…’.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유지했다. 이 추세는 수그러들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하루에 약 40명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코로나19 이후에는 20~30대 여성의 자살률이 치솟았다. 여성은 남성보다 덜 치명적인 방법을 택하는 경향이 있어 그 성공률이 떨어진다. 정확한 수치로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여성은 훨씬 더 많을 거란 얘기다.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말은 성적 관계를 선택할 권리, 생애 주기에 맞게 임신과 출산을 계획할 권리, 안전한 의료 서비스를 받게 받을 권리 등을 보장하라는 말이다. 방송인 사유리는 ‘낙태할 권리’는 곧 ‘임신할 권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하면 온갖 위조된 태아 사진이나 모형을 가져와 공포심과 죄책감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임신 중지를 선택하는 여성들이 오히려 태어날 생명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책임 있게 고려하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태어나기만 하면 살아질까. 한 명의 아기가 태어나 인간답게 살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과 사회·경제적 기반이 필요한가. 우울과 불안을 오래 경험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국 가족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준비되지 않은 출산은 가난으로 이어질 수 있고, 폭력과 학대에 노출되기도 쉽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평생 괴롭히기도 한다. 국가는 사람들이 왜 죽으려 하는지부터 생각했으면 한다. 인간다운 삶의 첫째 조건은 준비가 된 사람과 사회에서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미나(작가)

 

여성의 존엄한 삶을 위해

천선란 작가의 SF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에는 ‘너를 위해서’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남성이 아버지가 될 자격을 가지려면 아주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어느 미래, 한 남자가 20년 만에 얻은 자신의 ‘아이’를 보고 감격한다. 이 ‘아이’는 작은 쌀알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남자는 곧 아이가 서른 살이 되면 심장마비로 사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큐레이터라고 불리는 사람은 쌀알 같은 아이를 가리키며 남자에게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당신의 심장을 기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게 다 당신의 아이를 위해서예요. 살아 숨 쉬는 이 생명체…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태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낙태죄는 존재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런 논리를 비꼬는 이 소설이 떠오른다. ‘태아의 생명’이란 핑계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임신과 출산, 성관계에 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통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성애 중심의 결혼을 통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지 않는 여성들을 벌주겠다는, 유구한 여성 혐오의 흔적이다. 태아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면, 어째서 방송인 사유리처럼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과 보호가 전무할까?

우리는 꽤 오랫동안 낙태죄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선택을 놓고 저울질하는 것이라고 배워왔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모든 여성이 각자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존엄하며 안전할 권리를 추구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임신과 출산이 건강, 노동, 경제 상황 등 여성의 삶 전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임신 14주까지는 조건 없이 낙태를 할 수 있고 그 이후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정부 개정안은, 원하는 대로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를 어떤 여성에게는 주고 어떤 여성에게는 주지 않겠다는 발상이다. 어떤 인간에게는 인권이 주어지고, 또 다른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이게 얼마나 웃기는 말인지는 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황효진(작가)

 

여성의 권리 낙태죄 폐지 비혼 출산

성과 재생산 건강의 권리

내 몸의 주인은 나라고 말하지만, 우리 사회를 보면 환자의 몸은 의사가, 청소년의 몸은 부모가, 여성의 몸은 현재 또는 미래의 배우자와 자녀가 주인인 것 같다. 이들이 모두 교차하는 성/재생산 의료의 영역은 우리나라가 가장 더디게 국제인권규약을 따라가고 있다. 여성의 몸은 ‘모자’보건법에 의해 관리되고, 임신 중지는 국가와 의사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다. 피임을 왜 안했느냐고 하면서 피임 진료와 처방은 모두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이다.(정관수술 복구술은 보험이 적용된다). 늘 저출생 이야기를 하면서 비혼 여성이나 동성 커플이 출산할 수 있는 방법은 덴마크의 정자은행에 가는 것뿐이다.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선택이 실제로 가능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피임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든지 별도 재정을 지원하고, 성교육에서 충분히 정보를 제공해야 원치 않은 임신이 줄어든다. OECD 최고 수준의 제왕절개수술의 비율을 낮추려면, 응급 상황에서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게 더 많은 의료 인력을 양성해야 하고 공공 의료에서 분만 취약지들을 전담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여성이 데이트 비용을 내지 않아서 데이트 폭력이 일어난다’고 적혀 있는 성교육 표준안을 못 버린 교육부를 향해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하라는, 포괄적 성교육 권리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의 청원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여성 건강이라 하면서 임신, 출산 관련 건강만 챙기는 행태도 문제다. 여성에게 더 많은 질환들 –알츠하이머병, 자가면역질환, 만성 통증 증후군 등– 에는 연구 인력도, 연구비 지원도 적다. 교육과 의료 정책을 주관하는 고위직에 성 인지 감수성을 갖춘 여성 인사가 더 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를 낳고 싶은 사람이든, 낳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성을 자신이 정해 살고 싶은 사람이든, 개개인의 욕구와 결정과 가치관을 존중해주는 사회를 바란다. 낙태죄 폐지는 최후 목표 지점이 아니다. 더 많은 영역의 성과 재생산 건강에 대해 항의하고 요구할, 시작점이다. 윤정원(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

 

“진정한 의미의 자기 결정이란
문장의 주어를 자신의 이름으로 고쳐나가는 일과 같다.
스스로가 내 선택의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는 것이다.”

 

나로 시작하는 문장

얼마 전 영화 <애비규환>을 봤다. 부모님에게 임신 5개월 차라는 사실을 알린 주인공 ‘토일’이는 자신의 선택이 극단적이라며 질타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나는 얘가 어떤 앤지 궁금한 거야. 그럼 좀 안 돼?”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러니까 토일이가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건 아이의 존귀함이나 부모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오로지 본인의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냥 내가 그걸 원하니까. 그제야 이상한 기분의 근원을 알았다. 임신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며 ‘생명’이라는 단어를 듣지 않은 최초의 경험이었다.

방송인 사유리의 자발적 비혼모 선택이 화제가 됐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대신 싱글맘이 되기로 선택했다는 말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다. 나는 ‘신체의 자유’를 말할 때 ‘하지 않을 권리’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여자중학교에서 순결 캔디를 먹고, 거짓된 낙태 동영상으로 교육을 받고, 가슴을 가린 브래지어를 또 가리기 위해 러닝셔츠를 덧입으면서 자란 성인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는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유리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에 맞는 방안을 주도적으로 찾아냈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 결정이란 문장의 주어를 자신의 이름으로 고쳐나가는 일과 같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스스로가 내 선택의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는 것이다. 나로 시작하는 문장이 완성되면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사유리는 말한다. “낙태가 여성의 권리라면, 아기를 낳는 것도 여성의 권리가 아닐까요?”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건 결연한 선언이다. 당장 두 갈래로 보이는 길이 언젠가 스무 갈래가 될 때까지 여성들은 수많은 문장을 만들어갈 테지만 그게 부정형인지 의문형인지 따지는 게 중요할까? 어차피 내 것인걸. 이자연(매거진 에디터)

 

여성의 권리 낙태죄 폐지 비혼 출산

온전히 우리가 선택한다

“결혼할 때 되지 않았니?”라는 물음에 “결혼 안 할 건데요”라 당당히 말하는 여자들이 늘고 있다. “애는 아직이니?” 하고 묻는 이들에게도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는 대신 최지은 작가의 책 제목처럼 대답할 수 있다.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개인적₩사회적으로 수많은 투쟁이 필요했고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 선택을 하는 여성들은 결혼도 출산도 마땅히 스스로 정할 문제임을 이제는 보다 분명히 알고 있다.

같은 맥락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누군가는 임신 중지를 하기로 결정할 수 있고 남성 배우자가 없으나 임신을 원하는 누군가는 정자를 기증받기로 결정할 수 있다. 2020년 12월을 기해 우리나라의 낙태죄 폐지 여부가 판가름 난다. 관련 찬반 논쟁을 지켜보고 있자면 역시 수많은 여성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낙태는 타인의 윤리나 국가의 법으로 단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낙태죄란 구시대적 통제의 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계적으로 낙태에 법과 윤리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던 19세기, 한 남성 의사는 낙태 범죄화를 주장하는 자신의 글에 ‘모든 여성을 위한 책’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낙태죄가 ‘자연적인 모성을 거스른 낙태라는 부도덕’으로부터 여성들을 진정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믿었을까. 이런 사상 환경에서 태동한 낙태죄가 이제 그만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하며 여성을 위한 결정은 여성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의 여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깨닫고 있다.

1년 전 결혼한 내 친구는 당연히 언젠간 아이를 낳겠거니 여겨왔지만 최근 환경과 양육 여건을 생각하며 비출산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레즈비언인 다른 친구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남성과의 섹스를 염두에 두진 않지만 출산이라는 선택지는 열어둔 상태다. 또 다른 친구는 비혼주의자이고 루프 시술을 받았으며 입양을 고려하고 있다. 이 각자의 욕구와 결정들에 모순은 없다. 온전히 여성의 선택이다. 이두루(출판사 봄알람 대표, <유럽 낙태 여행> 공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