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선물을 꾸나에게 보내는 것보다
그 과정을 하나하나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해 아기자기 카페에 올리는 과정에
더 공을 들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되자 기다림 자체보다
이 기다림을 전시하는 일에 내가 중독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 깨달음이 꾸나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바뀌었으며,
미안한 마음을 보상하느라 더욱 선물에 공을 들이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더더욱 정성스러운 후기 글을 쓰게 되는,
오묘하고 완벽한 순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니, 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박서련, <아이디는 러버슈> 중에서

 

<아이디는 러버슈>는 군대 간 남친을 기다리는 여친들의 이야기다. 꾸나는 군화의 준말, 곰신은 고무신의 준말, 이곳은 꾸나를 기다리는 곰신들의 온라인 공간이다. 소설의 화자 러버슈는 카페에 들어오면 외롭지 않다. 모두가 다 곰신들, 남자친구가 군대에 간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러버슈는 주류가 된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잘 통한다.

그러다 결국 앞뒤가 바뀌어버렸다. 정작 군대에 간 남자친구와의 소통보다 카페 곰신들과의 소통이 더 즐거워져버렸다. 소설 속에서 러버슈의 남자친구에 대한 정보는 단 한 문장도 나타나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휴가를 나와 만나는 장면도, 전화를 해서 통화하는 장면도, 보낸 편지의 내용조차 없다. 중요한 것은 카페에서 워너비의 대상인 퍼스트 클래스와의 교류다. 소설은 퍼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가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기둘력’을 제작할 때 넣는 프로필 사진을 위해 트레이닝 받을지를 상담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퍼클은 진짜 꾸나가 아니라 꾸나 행세를 하면서 업체로부터 돈을 받아온 사기성 인물임이 밝혀진다.

사회학자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로 맺어진 인간관계를 얇고 넓게 퍼지는 팬케이크나 스낵에 비유한다. 온라인 소통만으로는 깊이 있는 관계를 맺기 어려우며, 우리가 군것질거리로 식사를 대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화를 나눌 때 작용하는 요소 중 실제로 말하는 내용은 7%를 차지하고, 38%가 음의 높낮이와 음량, 말투, 55%가 몸짓과 표정 같은 비언어적 수단이다. 온라인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소통의 맛은 고작 7%인 것이다.

소셜 스낵의 대표주자는 페이스북일 것이다. 페이스북의 일평균 이용자는 16억 6천만 명이고 2020년 1분기 매출은 1백77억 달러였다. 호주의 통계조사 결과 전체 인터넷 사용 시간 중 3분의 1을 페이스북을 하면서 보낸다. 나도 매일 페북을 들락거린다.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과 매일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게 댓글을 주고받다가, 사진 속에서는 선배가 결혼식을 올렸는데 청첩장을 받지 못할 때면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아, 우리가 오랫동안 (실은) 만나지 못했구나.’

영양소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 외에도 이 스낵의 단점은 계속 먹게 된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이제는 쉬어야겠다고 방향이 전환되는 반면, 온라인에서의 만남은 돌아서자마자 다시 시작된다. 하루 종일 과자를 먹고 있는 셈이다. 고백컨대 페북에 중독되었을 때 나는 페북의 형식으로 꿈을 꾼 적이 있다.

이 과자 봉지는 건빵처럼 스낵뿐 아니라(원하지 않는) 별사탕까지 덤으로 선물한다. 페이스북은 사용자의 관심사에 걸맞는 맞춤형 정보를 쉴 새 없이 제공한다. 사용자는 시야가 좁아지고, 정보는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에게 도달하지 않는다. 뉴스의 제공처가 아닌 친구의 링크에 댓글을 달 때 끼리끼리의 소통은 강화되고 다른 그룹과의 단절이 일어난다. 통제도 가능하다. 버지니아대학교의 미디어학과 교수인 시바 바이디야나단은 페이스북의 피드가 우리의 감정까지 규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험 결과 긍정적인 피드를 받은 사용자는 긍정적인 포스팅을, 부정적인 포스팅을 받은 사용자는 부정적인 포스팅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만일 페이스북이 그러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선거날에 우리의 결정을 뒤바꿀 수 있을 거라고 경고한다. 실제로 정보통신 수단을 통해 감시가 일어난 사례도 고발되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과 국가안보국에서 일했던 컴퓨터 기술자 에드워드 스노든은 2014년에 구글과 같은 통신 기업을 통해 국가가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튜링의 대성당>의 저자 조지 다이슨은 ‘페이스북은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고, 아마존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규정하며, 구글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규정한다’고 했다. 정보 검색창의 문제가 다만 분별력 없이 너무 많은 정보를 띄운다고 생각한 것은 순진한 발상이었다. 검색 결과 상위 페이지에 광고가 제일 먼저 뜨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익숙해져서 문제를 느끼지도 못했다.

디지털 미디어 연구자인 사피야 우모자 노블은 구글이 제공하는 정보들이 백인 남성의 시선에 적합하게 나열되어 있다고 고발한다. 지금 당장 ‘여자는’이라는 단어를 인터넷 검색창에 넣어보자. 자동 완성 문구 8개 중 절반이 성차별적이고, 심지어 그 8순위 안에는 ‘여자는 사흘을 안 때리면 여우가 된다’도 있다. ‘남자는’을 넣었을 때는 ‘남자는 아무 여자랑’이라는 1개의 성차별적 문장이 떴다. 인터넷 검색창은 (결과는 물론이고) 작동 과정에서 이미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수학자인 캐시 오닐은 알고리즘을 ‘대량 살상 무기’에 비유한다. 구글은 알고리즘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기계는 정확할 뿐 공정하지 않다. ‘사람들을 다양한 계층으로 분류하고 각자 포함된 계층에 따라 차별 대우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시스템 안에서는 약자가 보호받거나 다양성이 존중받는 것을 기대할 수 없기에, 수학 모형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일터에서 우리를 기계 부품처럼 취급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취업 기회를 빼앗고, 건강에 이상이 있는 직원들을 배척하며, 온갖 불평등한 만행을 저지를’거라고 예견한다. 노동이 불필요한 시간에 임금이 주어지지 않는 일, 은행이 가난한 이들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않고 돈이 많은 이들에게 다시 돈을 배정하는 일들과 같이 지금 우리가 겪는 온갖 부당함의 근거는 알고리즘이다. 캐시는 알고리즘 기계가 세상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인간과 법이 기계를 현명하게 관리해야 할 것을 당부한다.

미디어생태학 박사인 수잔 모샤트는 빅데이터의 흐름에 저항하는 실험을 실행에 옮겼다. 그가 열넷, 열다섯, 열여덟 살의 자녀들과 함께 로그아웃 생활을 6개월간 실천한 뒤에 우리에게 남긴 ‘디지털 해독을 위한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 따분함을 두려워하지 말라 2. 멀티태스킹을 하지 말라 3. 윌핑(검색 목적을 잊고 인터넷을 헤매는 것)을 하지 말라 4. 운전 중 문자를 하지 말라 5. 휴일에는 스크린 사용을 금하라 6. 침실은 미디어 금지 구역으로 유지하라 7. 이웃의 업그레이드를 탐하지 말라 8. 계정은 비공개로 설정하라 9. 저녁식사 자리에 미디어를 가져오지 말라 10. 온 마음을 다해 현실을 사랑하라

나는 되도록 몸을 움직여 현실 세계에서 연결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지난주에는 뮤지컬을 예매하려고 현장 판매 시간을 기다렸다. 창구 안쪽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예매를 진행하는 직원을 다른 직원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직원이 새로 입사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 사람의 음성을 통해 설명을 들으며 좌석 현황을 살피고 지갑 사정을 고려해 B석을 고르게 되는 것, 그러다가 운 좋게 타임 세일에 당첨되어 공연을 절반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게 되는 것. 온라인 예약을 하지 않으니 그런 아기자기한 현실 세계의 에피소드들을 덤으로 얻게 되었다.
집에는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았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데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면 윌핑이 시작되었다. 인터넷을 연결하지 않으니까 그럴 수가 없게 되어 집중하기에 훨씬 편했다. 휴대폰에 카톡도 설치하지 않았다. 인간관계를 맺는 데 신중한 편이어서 휴대폰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그룹과 사적인 연결망을 만드는 데 흔쾌히 동의할 수 없었다. 인터넷 연결에서 제외되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협업이 필요한 일을 할 때는 카톡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마치 한발 뒤로 물러선 입장처럼 들리기도 해서, “그럼 카톡을 설치하시죠”라는 답변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 그 말이 내게는 괜한 압력처럼 느껴져서 불쾌하기도 하고, 사생활 침해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다.

모두 카톡을 하는 세상에서 혼자 카톡 하지 않기, 모두 집에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는데 인터넷 없이 살기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어딘지 열성이 부족해 보이고 혼자 삐딱선을 타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혀 그런 마음이 없는데, 단지 ‘그것들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소수자가 되고 만다.

카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처럼 공용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공간에서 가끔 인터넷을 하고 있다. 실제로 인터넷 연결이 필요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터넷을 하는 것보다 세상의 구석구석을 흘끔거리며 어슬렁대는 쪽이 심신에 유익했다. 불필요하게 많은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삶에 그다지 이롭지 않다. 상품이 적절히 진열된 여유로운 가판대가 아름답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상품을 다 보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휴대폰 이메일 사용자의 67%가 침대에 누워서 메일을 확인한다고 한다. 50%가 운전 중에, 25%가 데이트 도중, 15%가 예배 중 받은 편지함을 열어보고 있다. 41%는 휴대폰과 함께 잠든다. 휴대폰 없이 외출해보았는가? 휴가가 따로 없다. 어디에 있든지 쾌적하고 고요해진다. 꼭 필요한 날인 경우가 아니라면 가끔은 폰을 집에 두고 다니자.

처음 전화기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전보를 치면 정확한 문자로 내용을 전달받을 수 있는데, 왜 굳이 그걸 집에 설치해서 음성으로 들어야 하지? 그러나 전화기는 모든 집에 설치되었고 지금은 모든 집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렇게 사라져간 통신 기구들을 떠올려보자. 언제부턴가 편지지와 엽서를 사는 일이 줄기 시작했고, 카톡이 등장하자 문자를 쓸 필요가 없어졌다, 휴대폰 이전 세대는 아직 삐삐와 시티폰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에게 적합한 통신수단이 다르다. 그 다양함이 공존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휴대폰의 시대가 왔으니 전화는 이제 구식이라며 기존의 것들을 제하고 계속해서 새것을 들이는 대신에 필요한 곳에 적절한 정도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취향과 감성이 골고루 살아 있는 다양하고 멋스러운 세상이 오지 않을까? 휴대폰, 계속 더 발전된 기능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과연 좋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