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박승현(카페 순례자)

사물이나 사람에게 위로받은 기억,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올해는 이를 ‘카페’라 말하고 싶다. 한 해 동안 카페의 사람과 사물, 향과 분위기에 위안을 받았다. 아주 좁은 골목에 자리한 좋아하는 동네 카페부터, 먼 여행지에서 찾아낸 카페까지. 익숙한 것은 그것대로, 낯선 것은 또 나름대로 즐거움과 설렘을 안겨주었다. 어떤 곳은 커피에 대한 신념과 원칙을 설파하고, 어떤 곳은 주인장의 가치관을 공간에 녹여내기도 하고, 또 다른 곳은 글로 공간을 이야기한다. 카페의 여러 모양들은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만든 이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잘 반영된 카페를 마주할 때면 분명 공간을 방문했음에도 한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신기하고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들이 가진 시야와 관점에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맛과 향, 그리고 이야기에 반해 자주 가는 곳들은 어김없이 단골 카페 이상의 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 문을 닫는 곳들을 보면 공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치 사람과 이별하는 것 같아 더 안타깝고 슬펐다. 그래서 나는 카페를 기록한다. 나에게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안겨주는 카페들을 기억하기 위해.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줌’. 위로의 사전적 의미에 꼭 맞는 카페들을 만나며 한 해를 따스하게 보냈다.

간단한 채소 요리
임유청(플레인 아카이브 팀장)

재택근무의 특징은 모든 일과가 한 공간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이다. 해가 뜨면 출근하고 노을 지면 단골집에서 술 한잔하던 루틴 대신, 책상으로 출근하고 침대로 퇴근하는 생활이 올해 내내 이어졌다. 업무도 사생활도 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안 내 하루는 내 작은 방에 웅덩이처럼 고였고, 나는 그 웅덩이 속에 앉아 SNS 타임라인에 집착하게 됐다. 이 집에서 흐르는 건 오직 SNS 타임라인뿐이었던 거다. 그런데 거기서도 유독 다채로운 색감을 띠는 구석이 있었으니, 바로 요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온라인에는 먹는 데는 최선을 다하되 요리하기는 귀찮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들 사이에 구전되는 레시피들은 간소한 조리 과정 대비 맛이 뛰어났다. 그들은 나의 동족이자 선구자였다. 나도 따르기로 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채소 요리를 시작한 것이다. 많은 레시피 중 채소를 선택한 건 어차피 운동은 안 할 듯하니 칼로리라도 적게 섭취하려는 심산이었고, 육류나 해산물보다 손질이 간단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비건 지향으로 생활을 재편해보고 싶었던 차라 좋은 시작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유서 깊은 SNS 레시피 중 하나인 ‘나폴레옹 큰딸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토마토와 바질이 주재료인데, 또 다른 코로나19 시대 취미인 식물 키우기에 빠진 회사 동료가 바질을 넘치도록 주는 바람에 여름 내내 해 먹었다. 요리 에센스 광고 계정이 리트윗한 나물 파스타에 빠져, 시장에서 푸른 잎만 보이면 스파게티면 삶을 생각을 했다. 요리책 전문 편집자의 유튜브에서 본 대로 간장에 발사믹 식초를 섞어 구운 애호박과 가지에 곁들였다. 오이 수분 빼는 방법을 설명한 포스팅을 읽고, 송송 썬 오이에 굵은 소금을 팍팍 뿌린 후 꼭 짜서 소이 마요를 바른 호밀 빵에 얹어 먹었다.
1시간이면 만들고, 먹고, 치울 수 있는 이 간단한 채소 요리로 내 하루의 수면 위에 동심원이 번지기 시작했다. 책상 앞으로 한정됐던 생활 공간은 부엌까지 확장되었다. 적당히 가벼운 위장은 오후의 무력감을 덜어주었다. 소금, 후추, 식초와 올리브 오일이 양념의 전부지만, 나름 그럴듯한 결과물을 완성해냈다는 성취감에 즐거웠다. 요리 도구도 점점 손에 익어갔다. 잡다한 일로 골치를 앓던 머릿속도 요리-먹기-설거지라는 절전 모드를 지나면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서툴지만 새로운 걸 시도하는 기쁨, 단출하게 먹고 가볍게 치우는 식사의 즐거움이 있었다.
재택근무가 끝난 지금은 다시 1시간 걸려 퇴근을 한다. 지치고 허기진 나는 자연스럽게 고기와 해산물 메뉴로 외식을 한다. 더부룩한 속을 안고 귀가해 침대에 드러눕기 바쁘다. 예전으로 돌아간 일상에서 간단한 채소 요리는 전혀 간단하지가 않다. 잠깐, 나는 혹시 채소 요리가 아니라 재택근무에 위로를 받았던 건가?

 

빈티지 의자
양승훈(디자인 스튜디오 SHDW 대표)

의자가 나에게 중요한 물건이라는 걸 회사에 다니면서 깨닫게 되었다. 회사가 새로운 사옥으로 이사하거나 사옥 내에서 층을 이동할 때면 나는 가장 먼저 의자부터 챙겼다. 회사에 있던 사무용 의자는 높이, 각도, 경도 등 조절이 가능한 의자였다. 사원들 모두 똑같은 의자를 사용하지만 난 내 의자가 어느 것인지 앉아보면 바로 알았다. 유난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고 어쩔 수 없이 야근이 잦다. 신입 시절에 들은 선배들의 말은 나에게 경각심을 갖게 했다.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부터 아침에 눈을 떠보니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119 구조대에 실려 갔다는 일화까지. 허리가 문제가 없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구조대에 실려 갔다는 선배는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의자가 바뀌어 있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의자만 만지작거렸다. 집중과 건강을 위해 터득한 나만의 의자 세팅법은 일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었다. 공들여 맞춘 그 의자와 오랫동안 함께했는데 이별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오랫동안 바라고 준비해온 독립을 위해 퇴사했기 때문이다. 바로 사무실을 구할 수 없어서 독립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친구의 배려로 친구의 사무실 한쪽을 쓰게 되었다.
새로운 공간에 가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의자를 고르는 일이었다. 친구의 사무실에는 빈티지 의자가 잔뜩 있었는데, 여러 차례 걸터앉아보고 신중하게 의자 하나를 골랐다. 아르민 비르트(Armin Wirth)가 디자인한 ‘Aluflex’라는 이름의 의자였다. 합판과 알루미늄으로 이뤄진 겉보기에는 딱딱한 의자다. 이전 회사에서 쓰던 의자와 달리 높이, 각도, 경도를 조절하는 기능은 없었다. 몇 년 동안 터득한 나만의 의자 세팅법은 무용했지만, 그 빈티지 의자는 묘하게 내 몸에 딱 맞았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던 시기에 하루 15시간을 꼬박 앉아서 작업해도 별 무리가 없었다. 적어도 의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쓸수록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생길 내 사무실에서도 이 의자를 쓰고 싶어서 구매 가능한 웹사이트, 가격, 배송비 등을 검색했다. 운 좋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을 구했다. 계약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연히 미리 알아둔 의자를 주문하는 일이었다.
5개를 세트로 구매했는데 5개 중 3개는 별 탈 없이 도착했고 2개는 부품이 망가진 상태로 왔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공간 뒤에는 여전히 부러진 의자가 해체된 상태로 있다.
퇴사하고 친구의 사무실을 거쳐 지금의 사무실을 갖게 되기까지 이 모든 것이 2021년에 일어난 일이다. 독립 직후 몰려온 불안에 시달리던 시기에도 일이 몰려 바쁘게 지나간 시기에도 난 항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모두가 같은 모양과 기능을 갖춘 의자에 앉아서 일할 때도 좋았고 지금 앉아 있는 심플하지만 오래된 멋이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지금의 내 삶도 만족스럽다. 찾아보니 나처럼 의자를 마음의 안식처로 삼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마도 나는 올해를 이 오래되고 딱딱한 빈티지 의자에 앉아서 마무리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