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기상이변은 경신된다. 매일 전해지는 폭우와 폭설, 폭염의 경보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무분별하게 생명을 죽이고, 먹고, 낭비하고, 버린다. 그 가운데 절망을 딛고 내일에 오늘의 재난을 대물림하지 않을 것이라, 재앙의 시나리오대로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내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오늘, 우리, 이곳임을 믿는 새 시대의 새 사람들. 이들이 쟁취할 내일에 대하여.

 

박민영

1996, 미술 작가 (@p_axpax)
영상을 기반으로 다양한 미술 작업을 펼친다. 최근에는 친족이나 혼인 관계가 아니어도, 가까이에서 서로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팬데믹을 돌이켜보고 깨달았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무색무취, 무균, 무해를 전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난관에 직면했을 때 모두가 알게끔 소리쳐
개선을 도모하는 과정에 있다고.

 

최대 관심사 녹색, 에코, 지속 가능성을 뽐내는 상품을 보면 기만당하는 기분이 든다. 어떻게든 ‘소비하게 해서 지켜내자’는 식의 기획이 ‘소비하지 않겠다’,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다정한 의지를 못 보게 막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소비와 후원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라는 생각이다. 후원 계좌에 입금하고 나면 이런 마음이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것 뿐인가?’ 이런 고민에 더 집요하게 파고들고 싶다. 그런 점에서 동물권, 가족 구성권, 이동권 같은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접근성으로 자주 표현되는 ‘배리어 프리’, ‘장애인 이동권’이 요즘 가장 날 선 가치이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행동과 실천 종종 투쟁 중인 현장을 찾아가 연대하는 한편, 내가 몸담은 분야에서도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미술 작가로서 창작물을 선보인 2021년 하반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전시를 했고, 이 과정에서 배리어 프리 관람에 적잖이 공을 들였다. 제22회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사 졸업 전시 <안녕을 위한 베타테스트>에서는 학내에 선례가 없던 배리어 프리 관람을 준비하고, 실로암장애인복지관의 강사를 초청해 강연을 진행했으며, ‘장애인의 문화 접근성’에 대해 졸업생 전원에게 교육했다. 해당 전시에서는 학생들이 일을 분담해 ‘한소네’ 점자 정보 단말기를 통해 대체 텍스트를 제공했다. 이어 웹진 <믿미>의 2022 봄호에서 ‘배리어 프리’를 주제로 칼럼을 쓸 때, 봄호의 폰트를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권하는 온고딕체로 변경하고 웹사이트의 스크린 리더 기능을 최적화해줄 것을 요청했다. 최근 미관상의 이유 또는 스마트폰의 편의성을 들어 갈수록 점자를 없애는 추세다. 그럴수록 점자 인쇄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머무는 분야에서 전시의 접근성을 ‘본래 그랬어야 할 응당한 환경’으로 정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목하는 이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지하철 행동’을 말하고 싶다. 지하철 행동은 장애인 권리 관련 예산 편성과 입법을 위한 권리 투쟁이다. 얼마 전 번연히 집회 허가제를 시행하는 국가에서 긴급 재난 문자를 통해 ‘전장연의 불법 시위로 인해 삼각지역을 무정차 통과한다’는 식의 알림을 보냈다. 그 재난 문자는 시민의 안전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집회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을 키우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많은 사람이 팬데믹을 돌이켜보고 깨달았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무색무취, 무균, 무해를 전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난관에 직면했을 때 모두가 알게끔 소리쳐 개선을 도모하는 과정에 있다고. 이 권리 투쟁을 지켜보며 악마화된 장애인을 상상하는 것은 전장연이 이끈 지하철 행동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양심 부재를 뜻하며, 우리 모두 이를 깊이 되새겨봐야 한다.

영향을 준 것들 가장 먼저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에서 본 정은영 작가의 영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2019)을 소개하고 싶다. 이 작품을 보며 당연히 기록했어야 할 역사를 다시 말하는 일만큼 현재를 제대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또 지속가능성은 ‘잘못된 과거로부터 왔기 때문에 연장과 확장 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오혜진 문학비평가가 <씨네21>에서 연재한 글 중 하나인 ‘지키고 싶었던 것들’(2019)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떠나는’ 대신 ‘남아서 바꾸기’를 택한다면 어떨까. 당장 업계 전반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자신을 바꾸기로 한다면?” 이 질문은 내가 환멸과 모멸에 빠진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포기할 수 없는 일’에 힘을 쏟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여로 문학평론가가 웹진 <믿미>에 기고한 ‘분업과 우리: 무력도 전능도 아닌’(2022)의 문장들은 내가 머무는 자리에서, 그러니까 전시를 통해 바꿔나갈 수 있는 환경을 돌아보게 했다.

낙담 속 희망 미래를 떠올리며 늘 희망이 앞선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지금의 낙담 또한 우리가 가는 길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늦었다는 판단이야말로 너무나 쉬운 일이어서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 그 판단은 끝까지 미뤄두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