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X MARA

막스마라 쇼장에 <올드보이> OST 수록곡 ‘Farewell, My Lady’가 흘렀다. 프런트 로에 앉아 가슴에 손을 얹었다. 때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한 지 고작 열흘 뒤였다. 이탈리아의 작은 영화관에서 <기생충>을 상영하고 이 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의 쇼장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음악이 울리다니.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막스마라 2020 F/W 컬렉션은 넓고 깊은 겨울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여성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겨울의 바다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춥고 거칠다. 선장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바람 들 곳 없이 재단된 세일러 코트, 로프로 허리를 단단히 고정한 후드 코트, 귀까지 덮는 비니는 필수다. 그렇다고 여성성을 포기할 수 없는 일. 거친 파도를 형상화한 러플 장식이 데님 셔츠의 어깨, 단단한 치맛단, 다운 점퍼에 더해진 이유다. 막스마라는 겨울 항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튼튼하고 우아한 유니폼을 제안했다. 항해는 자신 없지만 크림색 세일러 코트와 함께하면 그 어떤 풍파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SALVATORE FERRAGAMO

카를 구스타프 융은 한 에세이에서 여성을 일곱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사냥꾼, 어머니, 여왕, 현자, 정부, 신비주의자, 처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이 글을 정독한 폴 앤드루는 사무실로 돌아와 오프라 윈프리, 미셸 오바마처럼 실존하는 강인하고 용감한 여성의 초상을 무드 보드에 붙였다. 여성성과 지속 가능성. 오늘날 던져진 가장 큰 화두. 폴 앤드루는 이를 적절히, 지극히 살바토레 페라가모 스타일로 풀어냈다. 롱 실크 드레스, 점잖은 데님 스커트, 군더더기 없는 점프수트와 가죽 케이프는 무드 보드에 붙은 모든 여성의 일상에 녹아들 룩이었다. 하우스의 시그니처 역시 빼놓지 않았다. 타이츠 위에 입은 체인 스커트는 페라가모의 체인 프린트에서, 포니테일을 묶은 리본은 바라 슈즈에서 영감을 받았다. 가죽 액세서리는 사장될 위기에 처한 재고를 업사이클링해 제작했다. 어디에선가 보고 들은 것을 조합해 컬렉션으로 완성하는 디자이너들도 많다. 스스로 학습해 해석하고 받아들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재탄생시키는 이는 드물다. 폴 앤드루는 후자에 속한다. 1979년생, 이제 40대 초반인 그의 앞날에 믿음이 가는 이유다

VALENTINO

매 시즌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가 제시하는 발렌티노의 비전은 명확하다. 초현실적 로맨티시즘. 올가을에도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방불케 할 만큼 정교한 테일러링과 아름다운 패턴 플레이는 여전했지만, 발렌티노의 여인들은 한층 더 성숙해졌다. “성별, 나이, 사이즈 등 그 어떤 요소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 인류를 위해 숭고한 컬렉션을 창조해냈죠.” 그 결과 피치올리는 발렌티노의 DNA를 담은 새로운 유니폼 코드를 정립했다. 고스풍 블랙 드레스를 기반으로 풍만한 실루엣을 감싸는 가죽 코르셋, 바닥에 끌릴 만큼 긴 맥시 가운 등 다양한 실루엣을 만들어내고, 헐렁한 슬라우치 팬츠 수트며 커다란 장미꽃을 곳곳에 수놓은 아이템, 색색의 시퀸을 촘촘히 장식한 룩을 선보인 것. 극도로 로맨틱한 드레스에 청키한 플랫폼 부츠를 매치하거나 메가 사이즈 백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런웨이를 걷는 여인들은 너무도 고혹적이었다. 여기에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라이브 연주까지 더해졌으니! 발렌티노의 로맨티시즘은 이렇게 또 한 단계 진화했다.

CELINE

피비 필로가 독자적인 레이블 론칭 계획을 밝혔기 때문일까? 새 시즌 셀린느 쇼를 찾은 관객의 대화에서는 올‘ 드 셀린느’를 향한 집단적인 향수와 애착이 제법 잦아든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에디 슬리먼은 이전 시즌에 비해 다양한 디자인을 공개했다. 슬림한 실루엣의 팬츠나 꽤 오랜 시간 런웨이에서 자취를 감췄던 하프 코트, 프릴이나 리본을 장식한 블라우스와 그의 전매특허인 마이크로미니 사이즈 가죽 재킷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고상하다는 인상을 주었으며 그가 추구하는 1970년대의 부르주아 스타일에도 완벽하게 부합했다. 에디 슬리먼은 어마어마한 마니아 군단을 이끌던 브랜드를 일말의 타협 없이 자신의 색으로 바꿔놓은 데 이어, 그에 따른 반발심(?)까지 몇 시즌 만에 잠재우며 스타 디자이너의 면모를 내보였다.

CHRISTOPHER JOHN ROGERS

데뷔 이후 세 시즌 만에 슈퍼스타가 된 스물여섯 살의 신예 크리스토퍼 존 로저스. “나는 소수를 위해,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될 컬렉션을 만든다” 라고 밝힌 디자이너는 지난해 CFDA/ 보그 패션 펀드상을 받은 이후 이런 바람을 자신의 세계에 더욱 확실하게 불어넣을 수 있게 됐다. 보다 안정된 팀과 환경을 꾸린 그의 첫 컬렉션은 어땠을까? 풍성한 볼륨과 화려한 색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 한층 발전했고, 디자인 역시 성숙해지고 있다. 디자이너가 베스트셀러로 꼽은 딸기 실루엣 드레스의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했고, 쓰레기봉투를 묶은 모양에서 착안했다는 주름진 네크라인도 대담하고 신선해 보였다. 구름 같은 형태로 과장한 헤어스타일과 집채만큼 (?) 거대한 드레스로 쇼에 드라마틱한 무드를 한껏 불어넣으며 쇼맨십을 발휘하기도 했다. 앞으로 크리스토퍼 존 로저스라는 이름을 꼭 기억해두길. 젊은 디자이너가 프로페셔널한 쿠튀리에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R13

세계적으로 탄탄한 마니아층을 구축한 R13. 이번 시즌에도 디자이너는 데님에 집중하며 브랜드의 근간에 다가선 컬렉션을 소개했다. 먼저 업사이클링 소재로 제작한 데님과 가죽으로 조합한 룩들이 컬렉션의 메인을 차지했다. 이 두 가지 소재의 옷은 해체와 재조합을 반복하며 파워풀한 형태로 업그레이드됐다. 이런 작업은 크리스 레바가 전설의 록 밴드 U2에 푹 빠져 지내며 완성한 것. 사진가 안톤 코르베인이 찍은 U2 의 <조슈아 트리> 앨범 투어 장면을 프린트한 드레스처럼 일차원적으로 영감을 드러낸 룩을 비롯해 여러 스타일로 변형한 가죽 재킷과 투박한 워커가 록 스피릿이 담긴 데님 아이템을 한층 거친 느낌으로 격상시켰다. 넓은 어깨 라인, 카무플라주, 카키색이 어우러진 카리스마 넘치는 야상 점퍼와 피코트까지 밀리터리 스타일도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시즌의 신스틸러인 높게 솟은 모자와 터프한 아이 메이크업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웨어러블하고 실용적인 아이템으로 구성해, 다시금 추종자들의 관심에 확실하게 화답했다.

AREA

에어리어의 컬렉션을 보고 있으면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폭발적인 창의력이 엿보인다. 이것이 에어리어가 단숨에 뉴욕 패션위크에서 주목해야 할 쇼로 등극한 이유다. 이번에도 역시나 수많은 키워드가 공존했는데,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보면 더욱 흥미로운 룩이 즐비했다. 먼저 아프리카 문화와 공예에 주목해 아프리카 센터와 공동으로 개발한 크리스털 라인을 엮은 오프닝 룩을 선두로 가느다란 선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엮은 드레스들이 시선을 강탈했다. 프랑스에서 발견한 일본의 열대 이미지 우표에서 영감을 받은 프린트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드라큐라>의 룩을 닮은 구조적인 가죽 제품은 또 어떤가? 피날레를 장식한 하트 실루엣 드레스 시리즈,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마이 리얼리티’와 협업한 작은 의자 모양 백까지! 이토록 수많은 아이디어를 융합했음에도 에어리어만의 색채가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앞으로도 에어리어를 눈여겨봐야 할 이유를 꼽는 데 열 손가락이 부족하지 않은가!

SELF-PORTRAIT

격식은 유지한 채 로맨틱한 룩을 즐기고 싶은데, 거추장스러운 건 질색이라면 셀프포트레이트로 향하면 된다. 별다른 액세서리를 더하지 않아도 드레스 한 벌로 충분히 존재감 있는 스타일을 즐길 수 있기 때문. 이번에도 ‘드레스 장인’답게 각종 사랑스러운 요소를 모아 아름다운 드레스를 창조했고, 실크와 레이스처럼 여린 소재에 특화된 브랜드라는 점을 공고히 했다. 브라톱처럼 보이는 커다란 리본 장식, 주얼 스트랩, 꽃 모티프 단추 등 아기자기한 요소로 재미를 더한 드레스들을 놓치지 말 것. 개인적으로는 번쩍이는 PVC 코트와 스커트, 아주 얇은 인조가죽을 마치 실크처럼 주름 잡아 디자인한 드레스에서 셀프포트레이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 것 같아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다만 몇 벌을 제외하고는 몇 년 전 선보인 컬렉션이라고 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정체된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시즌 컨셉트를 조금 더 분명하게 설정해야 새로운 고객의 마음을 살 수 있지 않을까?

KHAITE

캐서린 홀스타인의 머릿속에는 정확하게 한 단어가 각인돼 있었다. 섹시! 노랑에서 주황, 보라로 번지는 황혼을 배경으로 런웨이를 거니는 모델들은 하나같이 관능적인 모습이었다. 사실 ‘섹시’는 남성의 시각으로 해석되며 패션계에서 금기어로 치부된 지 오래다. 하지만 이번 카이트 컬렉션이 섹시 그 자체임을 부정할 순 없다. 물론 성적인 해석과 거리가 있고, 이미지적인 부분을 전제한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결과 적나라한 애니멀 패턴, 빈티지한 실크 스카프 프린트, 탄탄한 블랙과 버건디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미국 서부를 활보하는 카우걸의 카이트 버전을 감상할 수 있었다. 브랜드의 시그니처인 퍼프소매 룩의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하는 것도 잊지 않았는데, 팬츠를 함께 스타일링하거나 마이크로미니로 디자인해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액세서리에서 강세를 보이는 브랜드답게 골드 컬러 웨스턴 부츠와 새틴 키튼 힐, 실용적이면서 클래식한 가방, 함께 든 스카프 등 여러 아이템이 여심을 사로잡을 전망이다. 동시대 여성들이 추구하는 섹시함을 보여준 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