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성 BIFF

블라우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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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루 블라우스 문탠(Moontan), 버건디 재킷과 스커트 모두 푸시버튼(pushBUTTON), 귀고리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반지 스페이스오디티(Space Oddity),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고아성 BIFF

수트 제이백 쿠튀르(Jaybaek Couture), 화이트 앵클 알렉시스앤(Alexis N), 반지 마르스봄(MARsboM), 귀고리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유관순 열사’ 하면 떠오르는 단 하나의 명료한 이미지가 있다. 우리가 오래도록 봐온 흑백사진 속 서늘한 표정의 한 여성. <항거: 유관순 이야기>(이하 <항거>)의 배우 고아성 역시 그 아득한 한 장의 이미지에서 시작했다. 고아성은 유관순 열사의 지척까지 정확히 도달하겠다는 마음으로 적막 속 홀로 선 그에게 불을 밝히고 숨을 불어넣으며 볼 수 없는 것을 보고자 했으며, 용기와 신념을 지닌 자가 어떻게 초월적 존재가 되는지 그 처절한 여정에 흠뻑 잠기고자 했다. 그 엄격한 암중모색의 결과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유관순 열사에 대한 몇 개의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게 됐다. 형무소 내 만세 운동을 주도한 그를 색출하러 온 일본 헌병을 향하던 눈, 고문실에서 끌려 나올 때의 곧은 발끝,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숨을 거두는 얼굴은 두 계절이 지난 지금까지도 형형하다. 개봉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는 고아성을 만나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궁극의 책임감을 떠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에 대해, 그 가늠하기 어려운 용기와 고독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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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우스 문탠(Moontan), 실크 뷔스티에와 팬츠 모두 문초이(Moon Choi), 귀고리 더 센토르(The Centa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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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블라우스 데일리미러(Daily Mirror), 레드 아우터와 장갑 모두 기준(Kijun), 이어 커프 마르스봄(MARsb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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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 점프수트 이로(Iro), 장갑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인터뷰를 앞두고 <항거>를 다시 봤습니다. 새삼 배우 고아성이 유관순이라는 인물을 사랑했겠구나, 사랑하는 만큼 두려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맞아요. 사랑했던 시간과 무거웠던 시간, 그 모든 걸 다 겪고 이겨냈던 것이… 다 지나고 나니 요즘 기분이 이상해요. 아직 새 작품을 시작하지 않아서 더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고요. 이제야 비로소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눈빛이나 표정, 고개를 드는 방식, 발끝의 움직임까지 인물에 극도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실존 인물인 만큼 접근 방식이 달라야 했을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이든 접근 방식은 달라야겠지만 <항거>는 제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인간상에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이어서 매일 도 닦듯 마음을 다잡아야 했어요. 마음가짐에 가장 신경 썼던 것 같아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증도 참고했죠? 인상 깊은 것이 있었나요?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 8호실에 수감됐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증언 중에 ‘짓궂을 정도로 장난기가 많았다’는 기록이 있어요. 유관순 열사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고정적이잖아요. 한 장의 증명사진처럼 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그 증언을 접하고 제가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말과 행동을 하는 동적인 이미지의 사람으로.

2년 전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하면서 ‘주체적인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이제는 부정할 수 없다고 답했죠. 그리고 그사이 주체적 캐릭터의 정점이라 할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궁극의 책임감을 떠안은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크게 와닿는 것 같아요. 다르덴 형제가 감독한 <로제타>의 로제타나 자비에 돌란의 <마미> 속 엄마처럼 책임감으로 스스로 큰 짐을 진 이들의 치달음에 관한 이야기에 유독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아요. 주체적인 캐릭터를 좋아해왔는데 이‘ 제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데 막상 연기를 하면서 느낀 건 그 전에는 내가 유관순 열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거예요. 이전에는 감히 닿을 수 없어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면 <항거>를 통해 그분의 의지와 바람, 희망을 조금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어요.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모습은요? 책임감을 진 여성들을 사랑하지만 덜어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고단하고 외로운 일이잖아요. 모든 것을 다 떠안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도 그렇고,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고요.

<항거> 속 유관순 열사는 인간적 두려움, 스스로에 대한 의심 속에서도 나약함을 감추지 않으며 자기를 단련하는 사람이죠. 그런 점에서 오히려 더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같은 지점에서 강인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감독님이 쓴 어떤 글을 보면 체 게바라 등 역사 속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물었다고 해요. 그 이야기를 보면서 유관순 열사 역시 형무소 안에서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지내며 더 큰 초월성을 얻게 됐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도자의 진정한 면모에 대해. 독단적이거나 독립적인 결정권자가 아니라 자신의 약한 모습도 보여주면서 스스로의 힘을 쌓아가는 사람이라고요.

고아성이 생각하는 ‘강함’이란 무엇인가요? 며칠 전 박완서 작가의 소설집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을 읽었어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높은 보직의 공무원이 된 주인공이 보잘것없던 때 다니던 포장마차에 다시 간 이야기가 있어요. 그가 금의환향한 듯한 우월감을 가지고 찾은 그곳에서 옆자리에 앉은 허름한 행색의 동년배에게 철저히 패배해요. 허름한 청년에 대해 ‘그 사람은 단 하나의 부분도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었다’라는 뉘앙스로 묘사한 구절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 같아요. 그렇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이 타의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타의의 간섭 없이 자의와 신념으로 선 사람…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100% 그렇게 되지는 못할 것 같아요. 배우가 100%의 자의로 있을 수 없는 직업이기도 하고, 제가 이렇게 교육받은 사람이기도 해서. 동경하며 조금이라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봐요.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에서 20대 중·후반부터는 그래도 확고한 가치관이 생긴 것 같아요. 하나의 기준은 있어요. 어떤 선택을 할 때 ‘내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일까’ 하는 생각은 끊임없이 하는 것 같아요.

기준을 세우고 이를 유지하기에 배우는 외부 평가에 자유로울 수 없는 직업이기도 합니다. 특히 여성 배우에 대해서는 예쁘다거나 예쁘지 않다거나 매력 있다거나 매력 없다거나 하는 평가가 숨 쉬듯 끊임없이 이뤄지는 곳이죠. 이런 평가들이 본인을 흔들기도 했나요? 다행히 예쁘다, 예쁘지 않다는 개념보다는 자연스러운가, 시네마틱 한가 하는 기준이 제겐 더 중요했어요. 영화에서 영화적으로 무척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아름다움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미적 기준보다 먼저 다가왔어요. 이에 맞춰 살고 싶었고요. 예를 들어 연기를 할 때 빛나는 배우들이 있잖아요. 딱 그 인물로 보일 때 전해지는 매력들이 어떤 외적 요인보다 더 중요했어요. 그래서 예쁘다거나 예쁘지 않다는 평가에 크게 개의치 않아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지만 외적인 부분에 대한 평가에 자유로울 수 있는 건 큰 능력이자 행운이죠. 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주변에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어른도 많았고요. 제인 캠피온 감독의 <내 책상 위의 천사>에 자넷 프레임이라는,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가 나와요. 저는 그보다 예쁜 사
람을 본 적 없어요. 그 영화가 이 기준을 세우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죠.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일기 잘 썼을 때. 글을 쓰는 도중에 정확한 표현을 찾았을 때 제 자신이 더없이 예쁘고 멋있어요.(웃음)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때 가장 쾌감을 느껴요.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연기에서도 강하게 발현되죠? 그렇죠.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늘 있는 것 같아요. 배우가 되지 않았더라도 비슷한 욕망
을 기저로 하는 직업을 선택했을 것 같아요.

지금 고아성의 가장 큰 욕망은요? 표현하는 것. 멋있는 일을 남기는 것.

생활인으로서 믿는 나의 모습이 있다면요? 모르겠어요. <항거> 이후로 촬영을 안 하고 생활인으로 지내는데 요즘에는 제 단점만 떠올라요. 배우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저는 그다지 말할 것이 없어요. 한데 그런 생각은 들어요. 내 결점을 바꿀 수는 없다, 그저 이 결점의 방향을 조금 좋은 쪽으로 틀어야지 완전히 없애거나 고칠 수는 없다고요.

결점을 곱씹는 건 좀 의외예요. 제가 그렇게 자신 있어 보여요?(웃음)

지금까지 연기해온 캐릭터들이 덧입혀지면서 고아성 하면 자동적으로 확신에 찬 단단한 모습을 떠올려서 그런 것 같아요. 농담을 줄이려고 해요. 농담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아서 왜 그 정도까지 농담을 했을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명상을 하지 않는 이상 고쳐지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스스로 큰 변화를 만들지 않으면 이런 사소한 버릇은 고쳐지지 않고, 결국 내가 더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최근에 했어요.

결국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문제잖아요. 이 점에서 한 개인으로서 고아성과 배우 고아성의 충돌도 있어요? 네. 대외적으로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하는 편이에요. 배우로서 힘든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아요. 제게 맞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작품 위주로 활동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품에녹여내는 것이 개인적인 해소 방법이기도 해요. 그래서 충돌이 있을 때는 다음 작품에 이런 점을 넣어봐야지 하고 해결하는 편인 것 같아요. 배우로서  한 작품을 할 때 두세 가지 중심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는 사람이 잘 느낄 수 있는, 잘 전달되는 하나의 주제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중심은 저만 알고 행하려고 해요. 유관순 열사의 경우 사고하는 사람, 의지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고요. 나머지 두 가지 중심은 말 안 할 거예요.(웃음)

자기만의 즐거움이 있네요. 어떻게 보면 혼자 노는 걸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찾는 직업적인 재미가 커요. 배우뿐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다 비슷할 것 같아요. 다만 배우는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 주어진 인물에 자기 경험을 최대한 담아내는 사람이니까 100% 창작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 이런 재미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항거>를 보내며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단 하나의 장면이 있다면요?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떠오른 몇몇 장면이 있어요. 포스터에도 등장한 장면이에요. 용기를 내서 옥중 만세 운동을 벌이고 마음속으로 그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하던 차에 일본 헌병이 수감실로 쳐들어오던 때의 표정을 두고 ‘그래, 나다!’ 하는 듯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마치 속내를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어요. 혼자만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딱 그 장면이 떠올라요.

고아성 BIFF

재킷 제이백 쿠튀르(Jaybaek Couture), 반지 마르스봄(MARsboM), 이어링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