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시스루 니트 그레이 양

작년 한 해 우리를 행복하게 한 여성 캐릭터를 꼽자면 말이 길어질 것 같지만, 적어도 이 인터뷰 지면이라면 분명하게 남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7년은 그 어느 때보다 다층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빛난 해다. 온 가족이 모이는 저녁 8시 주말드라마에서 ‘결혼 인턴제’를 주장한 변해영(이유리, KBS2 <아버지가 이상해>), 장르물에서 유난히 민폐형으로 소비되던 여성 캐릭터를 진일보시킨 형사 한여진(배두나, tvN <비밀의 숲>), 여성 연쇄 살인범을 쫓는 슈퍼히어로 도봉순(박보영, JTBC <힘쎈여자 도봉순>), 계층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각자의 욕망에 충실했던 우아진과 박복자(김희선, 김선아, <품위있는 그녀>)까지. 이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대미는 배우 정려원이 연기한 안티히어로 ‘마이듬’ (KBS2 <마녀의 법정>)이 장식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검사 마이듬이 뜻하지 않게 여성아동범죄전담부에 투입되면서 펼쳐지는 드라마 <마녀의 법정>. 마이듬은 몰카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일련의 성범죄 사건을 지나오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다른 면을 직시한다. 지난 두 달간 마이듬으로 살았던 배우 정려원 역시 역할 덕분에 새로 보게 된 것들이 많다. 연말 ‘2017 K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그녀는 마이듬다운 수상 소감을 남겼다.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힘차고 떨리는 목소리로. 옷차림과 표정, 발언의 단어와 음절에도 의미를 확대 재생산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한가운데에 서서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한 그녀의 결단과 용기가 얼마나 크고 무거웠을지 차마 짐작조차 못 하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정려원은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아는 배우라는 사실이다.

블루 벨벳 터틀넥 세컨플로어

시상식 이후 자신의 SNS 계정에 남긴 선연한 문장처럼 배우 정려원은 단정한 얼굴로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안부를 묻는 인사에서 그녀는 아직 마이듬을 떠나 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보통 작품을 끝내면 그림 그리고 글 쓰면서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이번 작품만큼은 애써 이듬이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아도 좋겠다 싶어요. 목표 지향적인 성향이나 해야 할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건 살면서 필요한 태도잖아요. 저 자신이 목표가 있어도 좀 빙빙 돌며 한 눈을 파는 편이라(웃음) 이듬이가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해야 할 말을 냉정하게 전하는 점도 좋았고요. 저는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 화를 내려 하다가도 그 전에 마음속으로 화를 다 내고 다음 스텝에 가 있거든요. 그래서 결국 화가 아니라 눈물을 먼저 보이죠(웃음).” 이제는 보내기 아쉬울 정도로 사랑하게 됐지만 그녀에게 마이듬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왜 놀이터에 뺑뺑이라고 있죠? 빙글빙글 도는 놀이 기구요. 예전에 저는 이 뺑뺑이의 회전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언제든 중간에 올라탈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한데 어느 순간부터 이 뺑뺑이가 엄청 빨리 도는 거예요. 미디어 플랫폼은 다양해지고, 그에 발맞춰 이 판이 빠르고 치열하게 돌아가는데 도무지 끼어들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전에는 드라마를 보면 ‘나라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면 ‘내가 저걸 어떻게 해?’로 바뀌었고요. 대사 많고 감정이 널뛰는 마이듬이 부담스러웠지만 이 작품을 고사하고 나면 앞으로 그 어떤 역할도 엄두를 내지 못할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붙잡았어요. 이거 못 하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마이듬이 사회를 새롭게 보며 느낀 것들은 배우 정려원에게 고스란히 쌓였다. “저는 그림과 전시, 예술을 좋아해요. 사회적으로 어떤 움직임이 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했고요. 다만 배우니까 맡은 역할을 통해 얻게 되는 정보들이 많잖아요. 몰랐던 사실들을 마주하고, 그 과정에서 더 깊게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마녀의 법정>은 아무래도 성범죄를 주제로 하는 만큼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어요. 우리 작품으로 상처받는 분들이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요. ‘어떻게 하면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중요한 이슈들을 짚어낼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고민이었죠. 부담스러운 주제라고 외면당하지는 않을까,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등 대중과의 접점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감독님과 작가님이 힘 조절을 잘해주셨어요. 시청자들이 재미있게, 그리고 함께 분노하며 봐주신 것 같아 뿌듯해요.”그녀는 ‘인생 캐릭터’ 외에도 얻은 게 많다. “김여진 선배님이 마이듬 캐릭터를 보고 육성으로 ‘만세’를 외치셨대요. 이런 여성 캐릭터가 존재할 수 있구나 하고요. 이 드라마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셨고, 종영 후에는 작가님에게 감사 인사도 하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여진 선배님 같은 선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여진 선배님 정말 좋아요, 정말.” 30대 직업인으로 의미 있는 성취를 이뤄가는 과정에서도 여성 배우로 사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연기에 조금씩 자신이 붙어요. 캐릭터를 마주하는 것도 덜 두렵고요. 하고자 하는 의욕도 커지는데 그와 반대로 할 수 있는 역할은 줄어들어요. 남자 배우들은 나이가 들어도 역할이 크게 변하지 않잖아요. 여자 배우도 나이와 상관없이 많은 역할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드라마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 매달렸죠.”30대의 한복판에서 새롭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다시 보고 있다고 말했다. “10년만에 보니 캐릭터가 새롭게 다가와요. 캐리 좀 짜증나는 캐릭터 아니에요? 너무 이기적이에요. 독립적이라고 말하지만 굉장히 의존적인 인물이에요. 빅은 또 어떻고요. 여자들이 원하는, 가질 수 없는 남자의 끝판왕을 한데 묶은 판타지예요. 세상에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요. 과거의 나는 왜 그 둘을 보며 울고불고했는지.(웃음) 반대로 미란다를 다시 봤어요. 현실에 충분히 있을 법한 멋진 여성이잖아요. 변호사로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스티브와 결혼하고요. 어쩌면 사라 제시카 파커도 캐리 역할을 연기하면서 짜증이 좀 났겠다 싶더라고요. 당시 그녀도 30대였으니까.”세계를 향한 시야가 확장되는 동안 믿음도 자랐다. “저는 제가 아니라 저를 만드신 분을 믿어요. 제가 되도록, 저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한 신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요. 진공청소기로 태어났는데 불필요한 빨래를 하고 있다면 삶이 힘들지 않을까요. 나는 누구인가, 대체 어떤 목적으로 태어났나,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될 테니까요. 스스로에 대한 생각은 점점 또렷해져요. 정려원으로 한국에서 태어난 이유가 있다고 말이죠. 작년에는 감사할 일이 많았거든요. 올해 역시 그런 해였으면 좋겠어요. 힘든 일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힘든 일을 잘 헤쳐나가 감사하게 느낄 수 있는 한 해요. 그러면서 스스로가 당당해지는 것 같아요.”

Ⓒ MARIECLAIREKOREA 사전동의 없이 본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