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버스 옆자리에 누군가 앉잖아요? 그럼 헬싱키 사람들은 ‘아, 오늘은 버스에 사람이 좀 많네?’ 해요.” 핀란드 헬싱키에서 산 지 3년이 넘었다는 한국인 코디네이터의 말이다. 인구 58만 명, 인구밀도로 따지면 1제곱킬로미터당 단 2.7명이 사는 헬싱키는 매일매일이 일요일 오후 같은 도시다. 차분하고 여유롭지만 여름의 활기가 오래된 보도블록마다 퍼져 있는 곳. 우리가 헬싱키에 머문 7월은 마침 도시 전체가 문을 닫는 휴가 시즌이었는데, 이 한 달만큼은 모두가 일을 멈추고 도시 밖으로 떠난다. 디자인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하다 우리의 취재를 돕기 위해 급히 헬싱키로 돌아온 코디네이터 역시 긴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인사와 동시에 한 달을 쉬는 기분에 대해 물었다. “아무래도 제게는 아직 한 달이라는 휴가가 길고 지루하죠. 회사에 2주씩 휴가를 나눠 쓰면 안 되겠냐고 물었더니 한 달을 꽉 채워 온전히 쉬고 돌아오라고 권하더라고요.” 일정을 시작하면서 나눈 짧은 대화만으로도 이들 삶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직감했다. 우리가 핀란드 디자인 하면 자동 검색어처럼 붙이는 말들, 가령 자연으로부터의 영감, 기능주의와 미니멀리즘, 타임리스 같은 몇 개의 공식 같은 표현만으로 이들의 디자인을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나흘 동안 핀란드 디자인의 골격이라 할 수 있는 6개의 주요 브랜드 담당자들을 만나며 명확해진 것이 있다면 우리가 공식처럼 알고 있는 핀란드 디자인 요소를 아우르는 하나의 대전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를 만나건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지속가능성(sustainable)’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우리도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지만 내게는 창조경제만큼이나 실체 없는 빈말처럼 느껴졌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이 단어의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어떤 분위기로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한 핀란드 무역대표부의 김윤미 대표는 핀란드에서 사용하는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 해석한다. “핀란드 사람들은 제품을 설명할 때 색과 형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요. 지금 이 컵에 푸른색 문양이 몇 개나 찍혀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죠. 그보다는 디자이너가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제품을 고안하게 됐는지,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노동과 자연을 존중했는지, 이 제품과 연결된 사람들이 어떻게 이익을 고르게 분배했고, 그 결과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아가 새 시대의 사람들이 지금의 브랜드 철학을 어떤 방식으로 계승·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한 청사진까지 모두 이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에 포함합니다.” 핀란드 사람들이 집집마다 아르텍과 이딸라를 들이고, 자국의 브랜드를 국가 유산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딸라가 세계에서 가장 예쁜 유리컵을만들거나 아르텍이 절대적으로 완벽한 의자를 디자인했기 때문이 아니다. 핀란드 사람들은 자국의 브랜드가 품은 이야기와 가치, 태도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방식 중 하나로 소비를 선택하는 것이다. 때로 이들의 소비는 적극적인 운동이 돼 사회를 변화시킨다. 환경과 동물 보호, 성평등도 이 작은 컵 하나를 구입하는 아주 결정적이고 합당한 이유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6개 브랜드의 담당자들은 이런 소비 방식이 점차 세계적 경향이 되어간다는 흐름에 주목하며 ‘자신들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6개 브랜드 담당자들의 일관된 태도 하나가 더 있다면 ‘당장 사지 않아도 괜찮다’다. ‘머스트 해브 아이템’, ‘잇 템’이 시즌마다 경신되는 소비의 세계에서 우리의 제품이 과연 당신이 정말 사랑할만한 것인지 심사숙고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20년 뒤에도 우리는 이 제품을 만들고 있을 것이니 20년 뒤에 사도 좋다고 말했다. 이 당혹스러운 영업 방식에 완전히 영업당하고 말았다. 당장 물건을 팔아도 모자랄 브랜드가 이러니 소비자도 이에 박자를 맞춘다. 핀란드 사람들은 하나의 제품을 자신의 인생에 포함시킨다는 마음으로 물건을 고른다. 접시 하나, 테이블 하나를 사면서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근데 이게 어렵다. 어떤 물건이 마음에 온전히 드는지,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려면 내 마음부터 알아야 하는데 그걸 따지기에는 시대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게다가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졌다. 그 뿐인가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도 필요하다. 집 안 어디에 놓고, 어떻게 꾸미고 어디를 비울 것인가로 통용되는 집과 공간에 대한 고민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로.

한편으로는 의자 하나 사는 게 이럴 일인가, 찰나의 욕망에 즉각적으로 화답하는 것 역시 마음을 돌보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핀란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말한다. 인생 속에 어렵사리 들인 좋은 물건이 주는 충만함을 느껴보라고. 귀하게 대하며 그 물건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인생의 순간들을 담아가라고, 그렇게 켜켜이 쌓인 추억을 다음 세대를 축복하는 의미로 대물리자고 말이다. 나흘 동안 핀란드 디자인을 알겠다고 동분서주했지만 이들이 가르쳐 준 건 삶을 대하는 태도,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