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연애

 

그거 없이도
일단 이 말부터 해야겠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진심으로. 그러니 내 이야기를 듣고 나와 그녀 사이를 부정할 생각이라면, 여기까지만 읽어줬으면 한다. 소개팅에서 만난 그녀와 나는 햇수로 5년 차 커플이다. 밝고 긍정적이며 다정한 그녀를 만난 뒤부터 내 연애는 물론이고 인생도 활짝 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런저런 사건이나 삶의 위기는 있었어도, 그녀와 나의 관계는 굳건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 애인이자 조언자이자 소울메이트다. 그런데도 우리 관계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섹스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카톡 창에서도, 술자리에서도 여자와 섹스 얘기만 하는 내 친구들은 5년 내내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제멋대로 확신한다. 밥을 쌀로 짓는 다는 말보다 섹스 없는 연애가 더 믿기 어려운 말이라며. 이런 얘기를 그녀와 나눠보지 않은 건 아니다. 우리는 섹스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더러워서 피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우리는 지금 이렇게 연애하는 것이 좋을 뿐이다. 맛있는 것 같이 먹고, 좋은 것 같이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다. 게다가 남들이 다 하니까, 키스하고 난 다음 단계는 무조건 섹스니까, 연애하면 누구나 섹스를 하니까 따위의 이유로 우리의 관계를 남의 기준에 맞출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리고 그놈의 섹스를 구호처럼 외치는 친구들 중 하나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하는 놈을 못 봤다. S(스타트업 대표, 35세)

데이트 없는 연애
이렇게 맞지 않는 사람이 있나? 일은 몰라도 인간관계만큼은 꽤 원만한 편이라 자부했는데, 유독 전 남친과는 금메달을 두고 경쟁하는 선수들처럼 치열하게 싸웠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그는 카페 직원의 작은 주문 실수도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나는 뭘 하든 그 안에서 여유를 찾으려 하는 편인데, 그는 수험생보다 빡빡한 일상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없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다 3개월 만에 연애를 끝냈다. 그리고 몇달 뒤 죽은 연애세포도 깨운다는 어느 날 새벽 2시에 우리는 전과는 다른 방식의 새 연애를 시작했다. 우리의 새 연애에는 몇 가지 룰이 생겼다. 괜한 싸움을 일으키는 대화는 되도록 자제할 것, 입맛이 다르고 좋아하는 영화나 자주 가는 동네도 다르니 데이트는 금지, 오직 잠자리만 함께할 것. 사실 징글징글하게 싸우고 헤어졌으면서 우리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된 이유는 하나다. 밤의 연애가 주는 희열을 다시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밖에서 가위바위보도 지기 싫어하는 한일전의 국가대표 선수처럼 싸우다가도, 침대 위에만 올라가면 하나의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원 팀이 되었다.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그와 보내는 밤은 차원이 달랐다. 그 점은 그도 유일하게 나와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기괴한 연애를 시작했다. 그냥 섹스 메이트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도 당당히 다시 만난다고 말했고, 우리 둘 다 남들과 다르지만 분명히 연애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주 데이트하던 때보다 지금 서로를 더없이 사랑한다. 어제도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세 번쯤 했을 거다. P(마케터, 33세)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너 그 사람이랑 사귀는 거 맞아?” 친구에게 이 말을 들은 지 1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그와 나는 애인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친구의 결혼식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그와 나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고, 서로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시끌벅적한 술집에서 몰래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바로 다음 날부터 데이트를 시작했다. 같이 영화 보고, 술 마시고, 여행도 가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심지어 섹스도 했다. 사귀자는 고백을 받지는 못했지만, ‘오늘부터 1일’이라고 정한 날이 없어서 1백 일이나 1주년을 챙기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사귀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친구들의 의심 앞에 추호의 흔들림 없이 당당할 수 없었던 건 서로를 누군가에게 애인이라고 소개한 적 없다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솔직히 좀 이상하긴 했다. 같이 사진을 찍지 않고 럽스타그램을 하지 않는 것이야 손발 오그라드는 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라지만, 1년 넘게 친구들한테 나를 소개하지도 않고 내 친구들 모임에도 매번 못 가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 그런데 바로 어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데이트를 하던 중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그는 나를 ‘친구’라 소개했다. 그렇다. 우리에게 어떤 사이냐고 묻는 그 친구와 같은 관계인 친구였다.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지만, 우리는 친구였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내게 그는 사람들한테 사생활 떠벌리기 싫어서 그랬다, 사람들이 알아줘야 사랑이냐, 널 사랑하는 건 사실이다 등등의 헛소리를 해댔다. 그 순간 확신이 들었다. 나 말고도 이런 ‘친구’가 또 있겠구나. 그날 나는 그에게 이별이 아닌 절교를 선언했다. 친구야, 안녕. K(간호사, 2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