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 오리이름정하기

뮤지션, 에세이 작가, 영화와 웹 드라마 감독. 분야를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이랑이 신간 <오리 이름 정하기>를 출간했다.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끄트머리로 밀려나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의 삶을 주연으로 끌어온 이야기’를 기록한 첫 소설집. 12편의 단편 작품을 통해 이랑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황’을 향해 의문을 던지고, ‘나’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말한다.

이랑 오리이름정하기

신간 <오리 이름 정하기>를 ‘이랑 이야기책’이라고 부른다. <오리 이름 정하기>에는 단편소설뿐 아니라 시나리오, 스탠드업 코미디 대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담았다. 영화과를 다니던 대학생 시절,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 전에 소설 형식의 글을 많이 썼다. 이후 이야기를 시나리오화하는 과정을 밟다 출판사에서 소설책 출간을 제안받고 <오리 이름 정하기>를 통해 다시 소설을 준비하게 됐다. 이미 익숙해진 시나리오의 형식을 바꾸는 게 쉽지만은 않았고, 한편으로는 이전에 완성해둔 시나리오도 함께 실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존에 써둔 대본 형식의 글은 소설로 바꾸지 않는 대신 독자들이 읽기 쉽게 고쳤고, 새로운 글은 소설 형식으로 썼다. 다양한 장르의 글을 아우르는 표현을 찾다가 ‘이야기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소설을 새로 집필하며 느꼈던 소설과 시나리오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나리오보다 소설을 쓸 때 훨씬 자유롭다.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쓸 땐 예산을 고려해야 하니 장면 속 움직임을 한정해야 한다. 반면, 소설을 쓸 때는 ‘막’ 쓸수 있다. 이를테면 신과 좀비 떼가 등장하고 마음껏 공간 이동을 하는 식이다. 그리고 소설에는 묘사가 훨씬 많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사용하는 대본에는 등장인물이 꼭 해야 하는 대사와 행동, 공간에 대한 설명 정도만 있으면 되지만 소설은 테이블 하나를 가지고 열 장을 써도 된다. 그래서 소설 집필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오리 이름 정하기>는 사회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평소 본인의 시선이 반영된 건가? 에세이, 단편영화 등 그동안 발표했던 다른 작품에서도 힘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꾸준히 다뤄왔다. 이 책에서 한 명을 꼽자면 ‘똥손 좀비’의 용훈이다. 그는 주연배우가 아닌 보조 출연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좀비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이후 우연히 인기 스타가 되어 괴로워한다.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존재하는 사회로 인해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리 이름 정하기’라는 제목의 단편이 책에 실려 있다. 이를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 수록한 작품들 중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제목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던 때 친구가 ‘오리 이름 정하기’를 추천해줬다. ‘오리 이름 정하기’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땐 단순히 오리라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거다. 하지만 오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신 ‘주님’이 오리의 형태를 가진 생명체를 창조하고, 그 생명체를 뭐라고 부를지 천사들과 회의하는 과정이 전개된다. 이런 점을 독자들이 재미있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회의를 통해 결정된 생명체의 명칭은 ‘오리’가 아닌 ‘댐(DAMM)’이다. 회의에 참석한 천사들은 ‘주님’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반박하지 못한다. 절대적 존재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다 보니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오리 이름 정하기’의 ‘주님’을 비롯해 신적 존재가 자주 등장한다. 사전적 의미를 넘어 종교, 예술, 스타, 피라미드 형태의 사회구조에서 꼭대기에 있는 사람 등을 포함한다. 사람들이 신격화해놓고 함부로 건들지 말자고 동의하는 것들에 대해 “과연 그래야만 할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싶었다. 평소 나와 내 주변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질문이 많다.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하는 인간의 생체 구조부터 알게 모르게 정해져 있는 생활 방식과 사회구조까지. 모두가 그 상황을 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면 적어도 타인의 어떠한 삶에 대해 ‘왜 이래?’라는 반응은 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 여성의 삶 또한 작품에 녹아 있다. ‘이따 오세요’의 정현은 낯선 남자가 사는 옆집으로 잘못 배달된 택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센세이숀-휏숀’의 다은은 타인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성적으로도 소비된다. ‘섹스와 코미디’에는 여성 시나리오 작가 시오가 등장하는데, 한 남성 영화 제작자가 시오에게 여성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겠다며 협업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 ‘판’은 이미 여성이 참여할 수 없도록 짜여 있는 상태다. 실제로 내가 영화를 막 제작하기 시작했을 당시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고, 그동안 성별로 인한 편견과 차별도 여러 번 겪었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작품에 풀어냈다.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로서 여성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나?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여성을 주축으로 한 작품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금도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엔 여성의 이야기가 한번 나오면 “드디어 나왔구나”라는 반응이 많지만, 이 단계가 지나간 후에는 그중에서도 이건 재미있고, 저건 재미없다는 등의 의견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간다면 성별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여러 소수자의 이야기도 하게 될 거다. 평평한 땅에 흩뿌려진 콩처럼, 다양한 형태의 인생이 위아래 없이 존재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뭘까? 일단 자신에게 붙여지는 이름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날은 인간으로서, 다른 날은 여성으로서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아시아인, 감독, 작가 등의 이름표가 새롭게 주어질 때도 있다. 상황에 따라 본인이 어떻게 명명되는지 파악해야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리 이름 정하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은 무엇인가? “나는 거기에 있었다”. ‘나는 오늘 들었다’의 마지막 문장이다. 신이든 괴물이든, 인간이든 좀비든 한 존재는 거기에 있는 것일 뿐 엄청나게 대단하다거나 천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작가의 말’에 “더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지 않고 자기 기록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오리 이름 정하기>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기록인가? <오리 이름 정하기>를 읽은 독자들이 SNS에 남긴 후기 중 “쉽게 읽힌다. 다 읽고 나니 나도 쓰고 싶어진다”라는 말이 가장 기분 좋았다. 이 책이 기록하는 행위에 대한 하나의 샘플처럼 여겨졌으면 좋겠다. 누구나 자신의 기록을 남길 수 있고, 나는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