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 리 작가 겸 여성운동가, 퀸즐랜드 지방법원 前 재판연구원

눈물을 닦고 상처를 마주해 진실을 고발하기까지

어린 시절 오빠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십 수 년의 시간을 버텨왔다. 그러다 사춘기를 겪으며 내적 방향성이 ‘진실과 정의’를 향해 있음을 깨달았고, 정의 같은 걸 찾으려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뒤로하고 지방법원의 재판연구원이 되었다. 1년간 법원에서 일하며 수많은 성범죄 사건을 마주하는 건 더없이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직면할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건을 고발했고, 피고인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는 작가이자 여성운동가 브리 리의 실제 이야기이며, 그는 법조인이자 성폭력 피해자로서 감내하고 고통받다 용기를 낸 경험을 담아 책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을 썼다. 자해까지 이어지던 성폭력 피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고소인으로서 법정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한 그는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울어야지.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고 나서는 눈물을 닦고 다시 정신을 차려야지. 그러곤 분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지. 그래야지.”

십 수 년 동안 혼자 견뎌온 일을 가족, 애인, 친구에게 말하고 고소하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듯 이 책을 내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법률 시스템의 명암을 모두 아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법조계에서 일하는 사람 중 정작 자신의 불만을 법정에 호소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법조 경력을 담보로 시스템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변호사도 거의 없고요. 저처럼 특권을 가지고 주변의 지지를 받는 사람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책은 창작자가 온전히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예술의 종류라는 생각에서 책을 통해 제 이야기를 전하기로 했습니다.

책 제목을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가해자 완전책임)’은 무척 흥미로운 개념입니다. 이름만 듣고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원리는 간단합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때렸는데 B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B의 두개골이 마치 계란 껍데기처럼 얇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 해도 A는 자신의 행동이 일으킨 파문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범죄자는 행위의 심각성을 가늠할 자격이 없으며, 피해자가 나올 때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죠. 이 원칙은 약자인 고소인을 배려하고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로스쿨 시절에 처음 배운 뒤로 오랫동안 이 개념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민해왔고, 성범죄 사건에서 중요한 원칙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이를 책 제목
으로 택했습니다.

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뉩니다. 1부에는 재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마주치는 성범죄 사건을 통해 과거 자신이 겪은 일을 밖으로 꺼내는 과정이, 2부에는 과거 성폭력의 가해자를 고소하고 끝내 유죄판결을 얻어내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지치는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아주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책을 통해 제대로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제게는 훌륭한 친구들과 의지가 되는 동반자와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었으니까요. 제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모두 저를 믿어주었습니다. 그들의 지지 없이는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브리즈번에서 2시간 떨어진 지역 워릭(Warwick)에서 마주한 사건의 피해자가 결정적으로 제게 용기를 심어줬습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상황을 언급한 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곧 끝을 맺는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안도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마침내 스스로를 위해 정의를 되찾는 노력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성폭행 피해의 트라우마로 폭음, 폭식, 자해까지 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지만, 사실 이는 성범죄 피해자 대부분이 겪는 일입니다. 이런 행동과 감정은 어디에서 기인한 거라고 생각하나요? 이건 무척 복잡한 문제입니다. 지금도 괴로워하는 분이 있다면 꼭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권합니다. 저는 심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 분야가 아닌 부분에 대해 조언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저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적 학대나 성인 간의 성폭력을 비롯한 성범죄가 널리 퍼져있고, 이 사회가 가해자보다 피해 생존자를 비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피해 생존자들을 비난하는 게 훨씬 쉬우니까요. 사회가 전가하는 수치와 비난을 피해자가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여타 사건과 달리 성범죄 사건은 유독 피해자에게 가혹한 측면이 있습니다. 피해자는 피해 당시 야한 옷을 입고 있어서는 안 되고, 관계를 원치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도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해자는 술을 마셨다거나, 어린 시절 학대당한 트라우마가 있다거나, 자신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몰랐다거나 이 중 하나에만 해당해도 이를 이유로 유죄판결을 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법과 절차는 피해자가 인간으로 존중받거나 신뢰받지 못하는 세상의 산물입니다. 피해자를 존중한다면 이러한 범죄는 지금보다 덜 일어날 겁니다. 또 피해자를 신뢰한다면 이러한 범죄에 대한 고발도 많아질 겁니다. 우리의 법률 시스템은 많은 사람의 태도만큼이나 과거에 갇혀 있습니다. 진보는 이처럼 느리고 어려운 일입니다.

성범죄 사건의 법적 절차에 필요한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모든 사람은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때, 하다못해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보호받고 존중받고 신뢰받아야 합니다. 피고인은 무죄 추정의 원칙으로 보호받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고발인은 공정한 재판을 받고 있지 못합니다. 시스템이 고발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셈입니다. 고발인은 이런 시스템 속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보다 공평하게 만들면 더 많은 고발이 뒤따를 것이고, 사람들은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싸우기를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해악에 대해 책임져야 할
유일한 사람은 바로 가해자입니다.”

용기를 내어 과거의 사건을 고소하고 유죄판결을 얻어낸 이후 내적, 외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무적입니다. 스스로를 위해 싸운 저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그 마음은 배심원의 평결이 다른 방향으로 내려졌더라도 똑같았을 겁니다. 싸우는 과정은 제가 겪은 가장 무섭고 어려운 사건이었고, 앞으로 그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게 너무 강하거나 무서운 적 따위는 없습니다.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호주 법조계와 사회에도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미투 운동은 많은 것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그간 여성들이 높은 확률로 학대와 추행, 폭력을 당해왔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라도 알 정도로 널리 퍼졌습니다. 퀸즐랜드에서는 저를 포함한 사람들이 성범죄를 다시 심의하도록 하기 위해 싸워왔고, 실제로 현재 심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2년 전 미투 운동이 일어난 이후 성범죄 근절을 위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행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엄청난 백래시도 있고, ‘혐오’라는 이름의 갈등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못된 짓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때로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가기도 하지만, 법적 절차가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권력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지 않죠. 그들이 두려워하고 방어적으로 나오리라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에요.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아무 거리낌 없이 여성을 학대하고 유린하다가, 갑자기 이런 행위로 유죄로 잡혀 들어가고 있으니까요. 당연히 화도 나고 무섭기도 하겠죠. 페미니즘은 평등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답답한 일이기도 해요. 변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모두와 친하게 지낼 수는 없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책 말미에 ‘그가 건드렸던 여자아이가 분노한 페미니스트로 성장했으니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소녀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제가 믿는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치는 바로 평등입니다. 모두가 평등하길 바라는 마음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여러분은 강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목소리를 내고 항의한다고 해서 그로 인해 일어나는 힘든 일이나 귀찮은 일을 여러분이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 모든 해악에 대해 책임져야 할 유일한 사람은 바로 가해자입니다. 계속해서 경찰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끊임없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사랑받으십시오.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원천이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겁니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모든 세대는 새로운 형태의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다만 모두가 바라는 최종적인 결과물을 얻지는 못했고, 지금을 사는 저 역시 완벽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렇지만 아름답고 멋진 세상은 어떻게 그것을 발전시킬지, 그리고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저는 이미 가장 아름답고 멋진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