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몰타를 유럽의 은행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몰타의 전부는 아니다. 사진가 겸 저널리스트 알레산드로 간돌피(Alessandro Gandolfi)가 이 작은 섬나라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건 3년 전, 몰타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치아(Daphne Caruana Galizia)의 살해 사건 때문이었다. 파나마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지에 조세 피난처로 설립한 역외 회사와 주주 명단이 공개된 초대형 스캔들 ‘파나마 페이퍼스’를 통해 몰타의 무스카트 총리를 비롯한 기업가의 탈세 여부를 취재하던 저널리스트가 차량 폭발로 암살당한 사건은 몰타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이 일로 총리는 사임했고, 정치인의 부패와 기업가의 투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알레산드로 간돌피는 이 문제를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이룩한 경제성장의 후폭풍이라 설명했다. 그가 취재한 내용에 따르면 시칠리아에서 960km가량 떨어진 인구 49만 명의 작은 바위섬이 유럽연합(EU)에서 세 번째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건 빠른 정치적 결정과 기업에 유리한 세금 정책 덕분이었다. 그가 만난 건축가 콘라드 부하지아르(konrad buhagiar)는 이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나라는 국토도 작고 천연자원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은 늘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곳에서 정치적 결정은 항상 빠르게 이루어지고, 재론의 여지가 필요한 윤리 문제에 대해서도 다음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지중해 바다 한가운데에 자리한 섬나라의 실상은 보이는 풍광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를 면밀히 살핀 알레산드로 간돌피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저널리스트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치아가 살해당한 사건이 지금의 몰타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우선 그는 굉장히 능력 있고 용감한 기자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다. 그런 그가 몰타라는 작은 섬에서 취재했다는 건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과 기업가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일이었지만, 몰타 사회 일각에서는 ‘ 갈리치아 자신도 어느 정도 예견했을지도 모른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런 의견이 그의 살해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투명하고 합법적이지만은 않은 이해관계가 촘촘히 엮여 있는 작은 사회의 의식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 볼 수 있다.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치아의 죽음을 둘러싼 조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그를 죽인 사람들은 죗값을 치를 거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많은 몰타인들은 이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금과 관련해 ‘예외 처리’를 할 수 있는 정치인이나 법망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사업을 하는 기업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갈리치아의 죽음 이후에도 이러한 인식에 전혀 변함이 없을까 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정치인과 기업가의 유착 관계는 급격하게 경제성장을 거둔 나라들이 필연적으로 지닌 문제이기도 하다. 몰타는 유럽연합을 구성하는 나라 중 하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나라가 지중해 한가운데 떠 있는 외딴 섬나라라는 사실이다. 변변한 천연자원 하나 없이 지금의 경제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지리적 이점이 크다. 이곳은 천혜의 상업 거점이자 물류가 이동하는 길목이다. 몰타는 최초이자 최고의 경제적사업적 서비스를 제공해온 섬으로, 투자나 활동 거점 변경을 위해 모든 기업가들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세금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누군가는 잘못됐다고 말하지만, 몰타의 정치가들은 이 나라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몰타라는 이름은 3천 년 전 이곳을 지배했던 페니키아인의 언어 중 ‘말리트(malit)’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은신처, 피난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몰타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업가의 은신처가 되어주는 나라의 정책이 이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냐는 자조적인 농담이 오가기도 한다.

 

 

건축가 콘라트 부하지아르는 정치적 결정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몰타의 상황에 관해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는 건축가 겸 복원 전문가다. 오랫동안 로마에서 공부한 이후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몰타에 돌아와 새 국회의사당과 발레타(Valleta)의 유명한 바라카 리프트(발레타 시내 저지대와 성벽 위를 잇는 약 21층 건물 높이의 승강기로, 1905년부터 1973년까지 운영한 이후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보수한 후 운영을 재개했다)를 포함한 여러 건축물을 지었다. 그는 몰타 정부의 여러 복원 사업에 참여하면서 깨달은 것들을 얘기해줬다. “예전에는 복원에 대한 규칙도 없고 문화도 없었습니다. 건물들은 보통 보수해서 쓰곤 했는데, 그 기준이라는 것도 의문점투성이였습니다. 물론 몰타 자체가 항상 엉망진창이긴 했죠. 모두들 배에서 자기 짐을 내려 쌓아두는 지중해의 거대한 창고 같은 곳이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몰타는 병든 자들의 격리지이자 안식처였고, 문화와 언어가 교차하는 곳이었으며, 이탈리아와 프랑스, 영국에서 온 지배자들을 위한 땅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상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변변찮은 존재였고, 천연자원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섬에서 정치적 판단은 항상 빠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그 판단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하거든요. ‘도박장을 다시 열어야 할까?’라는 의견이 제기됐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도박 사업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세계 각국의 회사들에게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유럽연합에 접근할 수 있도록 몰타 여권을 판매하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돈이 많이 벌릴까요? 떼돈을 벌 수 있다고요? 그럼 합시다. 몰타는 항상 이런 식입니다. 교활하고 뻔뻔하죠. 때로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요.” 놀라운 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만이 아니라는 거다.

이런 몰타의 상황은 끊임없이 이어진 외세의 침입과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적 배경의 영향도 있을까? 그렇다. 이에 관해서 몰타의 기사 단원인 니콜라스 드 피로(nicholas de piro) 자작(다섯 등급으로 나뉜 귀족 작위 가운데 넷째)의 이야기를 들었다. “몰타는 페니키아인의 식민지였고, 그 뒤로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지만, 가장 큰 영향은 유럽 북쪽에서 받았습니다. 로마와 스페인,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남기고 떠난 영국 등이 있죠. 그들은 이 땅을 한 번씩 거쳐 갔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정복한 민족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 때문인지 가끔은 우리조차 진정으로 우리가 누군지 알지 못할 때가 있어요.”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 몰타인의 DNA에는 수없이 많은 문화적 영향이 담겨 있고, 그래서 이들이 정확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가지기란 어렵다는 뜻일 터다. 이들은 항구나 통로 역할에 익숙해져 있다. 또 너무 작은 나머지 항상 다른 나라에게 잡아먹힐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에, 몰타의 정체성은 무척 다면적일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외부의 눈치를 봐야 했던 역사가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몰타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용인받는 건강한 방식으로 성장하는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어떤 시도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신속하고 단호하면서 부도덕한 정부는 필연적으로 민주적 권리뿐 아니라 인권마저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다만 기대할 만한 점이 있다면, 오랜 시간 주변국에서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받아 변화에 익숙한 몰타인들의 성향이다. 몰타인 특유의 기민함을 보다 윤리적이고 올바른 방식으로 변화하는 데 활용한다면 갈리치아의 죽음과 같은 사건을 다시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