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 패턴 카디건과 플리츠 튜브톱 롱 드레스 모두 쟈뎅 드 슈에뜨(Jardin de Chouette).

나는 침대 가득히 넘실대는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좀 전까지 약간 뒤숭숭하고 기묘한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블랙 재킷 발맹(Balmain), 망사 스커트 퍼블리카 아뜰리에(Publicka Atlier), 스틸레토 힐 마나스(Manas).

생각할 수 있는 자유,
상식을 벗어난 일을 생각하는 자유,
생각하지 않는 자유,
자신의 일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자유

프린트 톱이 달린 레드 재킷과 팬츠 모두 디올(Dior).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를 정열적으로 사랑하리라

트렌치코트 클로에(Chloe), 블랙 롱 드레스 케이수 바이 김연주(Kayesu by Kim Yeon Ju).

신세경은 요즘 배우 최승현과 영화 <타짜2>를 촬영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작품에 빠져 있는 그녀를 화보 촬영을 위해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 덕분이다. 여배우가 오마주하고 싶은 아티스트로 그녀는 프랑수아즈 사강을 선택했다. 1954년, 그녀의 나이 고작 열아홉 살 때 발표한 <슬픔이여 안녕>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프랑스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여류 작가가 된 사강. 이런, 미궁에 빠졌다. 사강을 오마주한 화보라니. 그래서 이렇게 정했다. 신세경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사랑이라는 감정의 덧없음을 느끼는 사강의 소설 속 주인공. 신세경은 그렇게 <타짜2>의 청초한 헤로인을 잠시 벗어두고 쓸쓸한 소설 속 여주인공이 되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제게 애증의 소설가에요. 현실을 예리하게 그려내죠. 사랑을 포장하지 않고 그 감정의 덧없음에 대해 얘기해요. 사랑을 예리하게 바라보고 낱낱이 드러내죠. 가끔은 그게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냉정하게 표현해요. 사강이 미워서가 아니라 모두가 가진 그 얄궂은 감정이 원망스러운 거죠. <슬픔이여 안녕>도 좋아하지만 제목이 말줄임표로 끝나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주인공들이 사랑 앞에 솔직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나니까요.”

사강의 소설이 마음에 들어온 건 스무 살 무렵이다. 깊은 감정의 슬럼프를 겪을 무렵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때 위안이 되어준 건 영화 <타락천사>와 사강의 소설이었다.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영화나 달콤한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비극의 절정을 보여주는 영화와 사랑에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소설이라니. “이기적인 걸까요?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모습을 보며 오히려 위안을 받았어요. 그런데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왜 그렇게까지 힘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애 같았다고 해야 하나?” 여전히 빛나는 청춘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녀가 사강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사랑에 회의적일 것이라는 오해는 말기 바란다. 현실의 그녀는 또래처럼 판타지에나 존재할 법만 말도 안 되는 사랑을 꿈꾸기도 하고, 어딘가에 영원한 행복이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빠질 때도 있다. 그리고 마음은 훨씬 단단해졌다. “늘 감정에 솔직하려고 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고 믿어요. 사실 요즘에는 불완전한 자신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어요. 이전보다 단단해진 것 같긴 한데 여전히 사소한 일로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니까요.” 감정에 휘둘리는 건 배우라는 직업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사람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과 ‘밀당’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 삶을 풍족하게 하는 것들을 소홀히 하지 않죠. 작품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지하철을 타고 전시도 보러 가고, 친구와 가까운 곳에 기차를 타고 여행도 가고, 책과 영화도 보고 음악도 많이 들어요. 그중에서도 책과 음악은 단순히 내용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당시 주변 상황까지 기억에 남아요. 가령,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들은 음악, 그때의 계절, 주변의 냄새 같은 거?(웃음) 굳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도 기억에 남아요. 연기하며 지나치게 많은 감정을 소모하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 그것들을 떠올리죠. 그런데 요즘은 소모된 감정을 채우는 방법이 조금 바뀌었어요. 이제는 요리처럼 감정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도 있어요. 별 생각 없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죠.”

많은 사람이 아직도 서태지 뮤직비디오 속 아홉 살 신세경을 기억한다. 별다른 연기를 한 것도 아닌데 그 얼굴은 신비로움을 품고 있었다. 영원히 그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 같던 그녀는 훌쩍 자라더니 뭇 남성이 꿈꾸는 첫사랑의 아이콘이 되었다.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쌓아오며 어느 작품은 그녀를 더 빛나게 해주었고, 또 어느 작품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며 치켜세우는 설문조사에서 1위를 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말도 안 되는 가십에 상처받기도 했다. 분명 그녀가 속한 세상은 작은 상처에도 깨지기 쉬운 나이에 버텨내기 만만한 곳은 아니다. “연기하는 순간이 참 좋아요. 다만 그 배우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이 힘들게 하죠.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과 싸워야 할 때도 많아요. 저에 대한 오해에 답답할 때도 있죠. 그렇다고 나 자신을 꽁꽁 감추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시선을 대하는 내 감정을 컨트롤하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아요. 잘 조절하다가도 어느 순간 놓칠 때도 있으니까. 예전에는 찬장에 놓인 밥그릇처럼 딱 적당한 온도를 유지했다면 지금은 보글보글 끓는 냄비 같다고 할까?” 그리고 유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라는 사람은 실제로 만나는 게 더 좋으실 거예요. 확신할 수 있어요.”

스물네 살의 그녀가 꿈꾸는 20대는 이렇다. 절절한 사랑을 다룬 멜로 작품도 잘 해내고, 요리 공부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 마음껏 경험하고 싶은 것이 신세경의 바람이다. 그리고 행복하고 싶다. “커리어를 튼튼하게 잘 쌓아 인정받는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멋있는 배우가 되고 싶지만 행복한 사람이고도 싶어요. 어쩌면 그래서 세상엔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려고 하는지도 몰라요. ‘이 일이 아니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라고 믿으면 오히려 이 일을 오래 못할 것 같거든요. 물론, 연기하는 순간은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이 넓은 세상에는 연기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려고 애써요. 연기에 목매지 않아야 결과가 좋지 않거나 사람들의 질타를 받아도 견뎌내고 다시 일어서서 배우로 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함께 작업한 배우는 물론 현장의 스태프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정받을 만한 작품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신세경이 바라는 인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2년 전만 해도 엄마가 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여자의 일생을 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를 보며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가 생긴다면 삶의 이유가 확실해질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게는 사람이 가장 중요해요. 사람과 관계된 일에는 항상 관심이 많죠.” 그 관심이 점점 커지던 차에 그녀는 얼마 전 유네스코 홍보대사가 되었다. 물품이나 돈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육의 기회를 주고 스스로 도울 수 있게끔 이끌어준다는 유네스코의 지원 방식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차츰 차츰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그녀가 내게 오늘 촬영한 사진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얼마 전 촬영하다 등에 상처가 났는데 그 부분이 찍힌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쑥스러워하며 덧붙였다. “혹시 거슬리지 않는다면 그 상처 지우지 않아도 돼요? 상처가 마음에 들어서요(웃음).” 그녀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나온 구절을 인용하며 ‘여배우란 고통에 의한 지혜를 깨치기에 좋은 직업’ 같다고 했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조금씩 생각이 정리가 되어가고 있는 신세경은 이제는 상처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줄 아는 여유가 생긴 눈치다. “요즘은 너무 좋고 재미있어요. 흥미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에요. 작품을 하며 잔뜩 긴장하고 집중하며 보내는 지금이 좋아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많이 정리가 되었어요. 여전히 잘 모르는 부분이 많지만, 지금 이 순간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