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유희(遊戱)쯤으로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면 형인 박찬욱이 자꾸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인사가 돼가는 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설치 화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그 분야에서 일찍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은 박찬경이 영화를 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서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했다.

2005년 10분짜리 단편 <비행>을 만들 때만 해도 그랬다. <비행>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故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만나러 가는 한 시간 동안의 비행 얘기다. 박찬경은 방송에 나가지 않은 방송 클립 등을 이용해 당시 남북한 정상회담의 의미, 남북통일의 당위성 등등을 작품에 담아냈다. 그런데 그건 그가 설치 작품이나 미디어 아트 작품 등으로 일관되게 보여준 세계였다. 그래서 그다지 ‘영화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으며 그 전 해에 만든 <파워통로>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파워통로> 역시 남북의 인공위성 아리랑과 광명성이 당시로서는 가까운 미래인 2010년에 우주에서 도킹하는 것을 상상하고 만든 작품이다. 2004년 미디어 아트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으로 대한뉴스의 땅굴 사진 등이 합성돼 있다. 그건 영화라기보다는 미디어 아트 작품이었다. <비행>을 내놓을 때까지 박찬경은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미디어 아티스트였다는 얘기다. 그러니 여전히 왜 영화를 하느냐는 질문을 매번 받게 되는 건, 어쩌면 설치 화가로 사회적 삶을 시작했기 때문에 생긴 천형(天刑) 같은 일일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설치 작가로서 매번 관객에 대해 갈증을 느꼈다. 화가는 사람을 만나는 데 한계가 있다. 주어진 사람들, 어쩌면 매번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격이다. 영화처럼 다중의, 익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 그렇다고 소수의 사람이나마 우리의 미술 언어에 익숙해지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미술계에 있는 상당수 사람들, 특히 나처럼 설치로 시작한 사람들은 결국 비디오 아트나 미디어 아트로 넘어가게 되고 또 종국에는 이렇게 영화로 넘어오게 된다. 작품을 통해 더 많은 사람과 얘기하고 싶은 작가적 욕망 때문이다.”

 

그의 놀랄 만한 신작 <만신>

박찬경은 최근 3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 동안 기묘하고도 놀라운 작품 한 편을 완성했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인가, 극영화인가. 처음 그의 신작 <만신>을 보고 든 생각이다. 결론은 둘 다이면서 둘 다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큐와 장편 극영화를 넘나들면서 변증법적인 새 작품이 나왔다. 한편으로 <만신>은 박찬경의 전작 <신도안> <파란만장>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 등과 같은 맥락에 놓인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 선상에서 질적 변이를 일으킨 작품이다. 이것도 매우 변증법적이다. <만신>은 박찬경을 더 이상 설치 화가냐, 미디어 아티스트냐, 아니면 영화감독이냐 따지는 논쟁의 중심에 놔두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박찬경은 이번 영화 <만신>으로 명백하게 영화감독으로 재탄생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는 영화감독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더 이상 영화 이외의 예술 분야로 눈길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이제 유희가 될 것이다.

“(웃음) 하긴 이번에 제대로 영화를 배우게 된 것 같다. 캐스팅도 그렇고, 드라마를 짜는 것도 그렇고, 각색 작업을 하는 과정이나, 어떻게 하면 관객이 편하게 이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결국 내레이션을 넣은 것까지도 그랬다. 하나하나 대중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것 같다. 이제 장르 영화를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예전부터 공포영화 만드는 게 꿈이었다.(웃음)”

<만신>은 만신 김금화의 일대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만신은 무당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김금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라 무당’, 그러니까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무당으로 추앙받고 있다. 무형문화재가 된 김금화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그의 열두 거리 굿 장단은 한 편의 오페라이자 뮤지컬이며 록 공연이다. 박찬경은 중간중간 인터뷰와 기록 화면을 섞어가며 김금화의 기구한 무당 인생을 마치 한 폭의 병풍 그림처럼 허구적 느낌의 드라마로 죽 펼쳐 보인다. 김금화의 어린 시절은 김새론이, 젊은 시절은 류현경이, 중년의 모습은 문소리가 맡았다. 그런데 과연 <만신>이 단순하게 김금화의 생을 기록한 전기영화에 불과한 것일까?

“궁극적으로는 김금화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기록하고 싶었다. 그녀가 종군위안부로 잡혀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열네 살에 시집을 갔다가 소박을 맞고 돌아와서 신이 내려 강신무가 되는 이야기, 해방 정국과 6·25 전쟁,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만신 김금화의 일생을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재해석하고 싶었다. 이건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역사를 무당의 차림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게 다일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귀신이 쓰인 듯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귀신들이 나타나 이렇게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건 무당 얘기도 아니고 한국 역사 얘기도 아니다아~.’ 그럼 무슨 얘기일까. 박찬경은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의 영화적 욕망과 야심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는 결국 역사적으로 천대받고 핍박받은 무속 신앙과 여전히 일정 부분 오해와 경시(輕視)를 받고 있는 영화 예술을 동일시한다. 그에게 ‘만신 김금화 혹은 무당=영화감독’인 셈이다. 따라서 영화 <만신>은 무당 김금화의 얘기를 하는 척 사실은 오묘하게 채색된 자신의 예술적 성찰을 담은 작품이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면, 바로 번쩍 눈에 뜨일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 때문이다. 박찬경은 바야흐로 미디어 아트와 영화 예술의 경계는 물론이고 모던 아트와 무속이 대표하는 전통 예술과의 경계도 뛰어넘고 있는 데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도 무너뜨리고 있다. 한국 영화계는 새해 초반부터 뛰어난 작가 한 명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현대미술을 하다 보면 자꾸 서양미술을 좇아가게 된다.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하는 회의가 많았다. 작가들이 자꾸 전통이나 민속, 무속의 오브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어느 날 굿을 하는 걸 보고 깨달음 같은 것이 왔다. 모든 게 다 완벽한 설치미술이나 미디어 아트로 보였다. 신당도 그렇고 제상에 놓는 음식의 배치도 그렇고, 무당들이 벌이는 퍼포먼스도 그렇고, 하나도 버릴 게 없었다. 그때부터 무속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물론 한편에서는 그걸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작업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미술에서 영화로 넘어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걸 이원화된 시각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찬경은 <만신>의 일반 개봉을 계기로 영화감독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그는 최근 형 박찬욱과 함께 <고진감래>라는 서울시 영상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일반인이 서울을 소재로 찍은 영상을 모아 두 감독이 편집해 한 편의 영화로 완성하는 작업이다. 두 감독은 국내에서만 6천5백23편, 해외에서 5천3백29편을 접수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작품을 골라내는 작업을 한 끝에 1백41명에게서 1백54편을 선발, 이를 한 편의 영화로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아무래도… 형한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실은. 심지어 영화적 취향까지도. 영화 작업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처럼 상업 영화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종류의 영화를 할 거냐고? 지금으로서는 절대로 ‘빤쓰 내리는’ 영화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정도만 있을 뿐이다.(웃음)”

<만신>은 2월 19일 개막한 제3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에 공식 초청돼 상영됐다. 충분히 예상했듯이 열화와 같은 반응을 얻었다. 극장에서는 마치 만신 김금화의 실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이렇게 소리를 냈다. ‘이제 곧 형보다 더 유명해질 거다아~ 더 큰 인물이 될 거다아~’ 어쩌면 박찬경이 김금화를 만난 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로 그 목소리를 들은 때부터였다…고 하면 거짓말처럼 들리는가. 당신도 분명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