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바뀌지 않는 세상에 지쳤고, 자신들의 믿음을 포기했다. 세상을 바꾸는 대신 거꾸로 자신이 변해버린 사람들도 있다. 세상이 사람들의 꿈을 배신한 것일 수도,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꿈을 배신한 것일 수도, 그조차 아니라면 영화는 원래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필름에이드(FilmAid)는 세상을 바꾸는 영화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만든 NGO 단체다. 이 단체는 전쟁이나 기아, 자연재해 등으로 황폐한 지역의 상황을 알리는 영상물을 제작하거나, 분쟁 지역이나 빈민 지역 젊은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영상에 담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으로 영화가 사회에 좀 더 직접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영화는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사람의 의지가 한곳에 모여 완성되는 것이 영화라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는 돈이 든다. 늘 돈이 문제다. 상업성과 거리가 먼 필름에이드 같은 단체의 활동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나는 부자가 될 수 없어도 영화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만큼이나, 이 돈이 더 큰돈을 만들지 못해도 영화가 세상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의지가 담긴 돈이 필요하다. 필름에이드가 만난 건 세계적인 샴페인 브랜드 모엣 샹동(Moet & Chandon)이다. 모엣 샹동은 오스카상과 골든글로브, 베니스와 베를린,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와 시상식을 후원해왔다. 홍콩에서 매해 열리는 아시안 필름 어워즈(Asian Film Awards)를 후원해온 모엣 샹동은 올해도 어김없이 어워즈의 주요 행사 중 하나이자 필름에이드 아시아 후원을 위한 자선 경매 행사인 ‘파워 오브 필름 갈라(The Power of Film Gala)’를 개최했다.

사실 글로벌 샴페인 브랜드와 영화의 협업은 한국에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지난해, 모엣 샹동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모엣 라이징 스타 어워즈(Moet Rising Star Awards at Jiff )’를 열었고, <배우는 배우다>의 신연식 감독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배우 정은채가 수상자로 결정됐다. 수상자인 두 사람은 지난 3월 22일 홍콩에서 열린 파워 오브 필름 갈라에 공식 초청됐다. 행사가 열린 곳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클리어 워터 베이 필름 스튜디오(Clear Water Bay Film Studio). 홍콩의 영화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낡은 촬영 스튜디오보다 행사의 취지에 맞는 장소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 세계 영화, 패션, 미술, 음악계 관계자 4백6명이 이번 행사의 게스트로 참석했다. 해마다 호스트 역할을 하는 할리우드 스타가 참석하는 게 관례처럼 자리 잡은 파워 오브 필름 갈라의 올해 주인공은 틸다 스윈턴이었다. 열여덟 살 연하의 연인인 아티스트 산드로 코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타난 그녀는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이날 행사는 필름에이드 아시아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배우 겸 감독 견자단과 아내인 가수 왕쓰쓰, <와호장룡>의 ‘푸른여우’ 역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홍콩의 전설적인 여배우 정패패, <섀도우 헌터스: 뼈의 도시>의 주인공 제이미 캠벨 바우어, 중국의 모엣 샹동 브랜드 홍보대사인 배우 판빙빙 등의 셀러브리티들로 어느 해보다 화려하게 빛났다. 신연식 감독과 함께 등장한 우아한 블랙 시스루 드레스 차림의 정은채 역시 프레스의 주목을 받았다. 틸다 스윈턴이 그리스신화 속 여신 같았다면, 정은채는 북유럽 전설 속 엘프를 연상시켰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배우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포토그래퍼들 때문에 그녀는 긴 시간, 포토월을 떠나지 못했다.

미국의 힙합 아티스트 그랜드마스터 플래시의 디제잉으로 진행된 칵테일 리셉션에 이어 본격적인 갈라가 시작됐다. 무대에 오른 틸다 스윈턴은 첨예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온 다큐멘터리 감독 루비 양에게 인권상을 시상했다. 시상이 끝나고 필름에이드 아시아의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한 경매가 진행됐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미스터 브레인워시(Mr. Brainwash)의 작품 등 다양한 경매 물품이 새 주인을 만났다. 그러나 이날 최고의 경매 물품은 단연 틸다 스윈턴의 깜짝 제안이었다. 그녀는 낙찰자에게 자신이 직접 베드타임 스토리를 읽어주겠다고 나섰고, 행운의 주인공은 모엣 샹동 임페리얼 매그넘과 함께 무대에서 틸다 스윈턴과 셀카를 찍는 기쁨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 행복한 남자는 과연 어디에서 베드타임 스토리를 듣게 될까? 부디 어지간한 배우보다 훨씬 근사한 산드로 코프가 그 자리에 동석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날 모금된 금액은 3백50만 홍콩달러. 경매를 통한 기부 행사에서 이런 큰 금액이 모금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뜨거운 호응 속에 파워 오브 필름 갈라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행사장 한쪽 벽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Film offer a way to reach people where it is needed and inspiring hope where it is lacking.’ 영화는 길이 필요한 곳에 거기 이르는 방법을 주고, 희망이 부족한 곳에 희망을 불어넣는다는 뜻이던가.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그날 그곳에 가득했다.

이번 아시안 필름 어워즈에서 모엣 샹동은 또 하나의 영화 행사를 후원했다. 다음 날인 3월 23일, 아시안 필름 어워즈 아카데미(Asia Film Awards Academy, 이하 AFAA)의 설립을 알리고, 그 일환으로 준비된 ‘모엣-AFA 스페셜 어워즈(Moet-AFA Special Awards)’의 후원자로 나선 것이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와 홍콩 국제영화제, 도쿄 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산업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공동으로 설립한 AFAA가 선택한 올해의 수상자는 아시아 배우상에 견자단과 유가령, 라이징 스타상에 김남길과 구리야마 지아키로 결정됐다. 전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건 새로운 전통을 세우는 일이다. 영화와 브랜드가 만나 세상을 바꾸는 영화를 위한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