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소금 Sobrightttttttt 위로

블랙 재킷 캄 다운(Kalm Down), 스커트 미나정(Mina Jung).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린 작업물과 여러 아티스트들과 함께 한 협업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정규 음반 와 싱글 앨범 <위로>를 통해 ‘소금만의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시켰다. 지금은 뮤지션, 아티스트라 불리지만 언젠가 용기를 장착하고 운동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음악을 하는 순간에는 몸이 사라지고
영혼만 남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젠더를 떠나서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면서
겪는 고뇌만 남고 껍데기는 없어지는 느낌.

음악 안에서는 그렇다.

만드는 음악에 대해 정의 내려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소금의 음악은 어떤 건가?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어떤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최근에야 그런 생각을 해봤는데 되게 어렵더라.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할 건데, 아마 죽었을 때 비로소 내가 어떤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리스너들에게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런 음악을 했다가 저런 음악도 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음악을 직접 만들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다. 내 곡을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일단 작곡과를 나왔다. 작곡과에서는 처음에 좋아하는 노래를 카피하는 작업부터 시킨다. 그런데 그걸 못 하겠더라.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온전히 나로부터 출발한 음악을 만들기로 했다. 좋아하던 노래는 다 질렸고 그래서 듣고 싶은 노래가 없을 때, 누구에게나 이런 때가 오지 않나. 그런데 아주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드는 기분은 알고 있고. 그 기분을 음악으로 표현한 게 시작이었다. 더 이상 들을 노래가 없어서 내 마음에 있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로 얽혀 있는 무언가를 하나씩 풀어서 음악으로 만들어본 거다.

창작한다는 건 즐거움과 희열, 그리고 험난하고 힘든 순간을 모두 마주하는 일이다. 스물세 살까지 대전에 살았는데 그때까진 음악 만드는 게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냥 술술 나왔고, 하고 싶을 때만 했다. 좋은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강박관념 없이 작업했다. 그러다 스물세 살 때 서울에서 크루로 활동하는 친구들이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린 내 음악을 듣고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을 줘서 만난 적이 있다. 동갑내기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을 만나고 나니 내가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통해 스물세 살이라는 나이는 엎어지고 상처받고 불안해도 되는 나이라는 걸 배웠다. 갑자기 이때를 놓치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길로 바로 집을 알아보고 다음 날 계약해서 서울에 왔다. 안전한 테두리였던 집을 벗어나야겠다고 느낀 거다. 그 후에는 무척 괴로웠다. 분명 나는 안전하게 바닥에 등을 대고 있는데 누가 날 공사장 꼭대기에 눕혀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잠이 안 와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작업하다가 밤 12시에 잤다. 밥도 안 먹고, 계속 만들기만 했다. 방언 터뜨리는 것처럼. 고통과 즐거움이 교차했다. 그렇게 몇 달간 미친 사람처럼 살다 보니 내 사운드클라우드가 유명해져 있었고, 지금의 크루 바밍타이거를 만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을 만들면서 가장 괴로운 시기는 서울에 막 올라온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다.

무엇이 지금을 가장 괴로운 순간으로 만들고 있나? 그때는 내가 불안하기로 작정했으니까. 젊으니까, 회복할 수 있으니까 힘든 것도 최대치로 느껴보자고 작정한 상태. 그래서 불안하고 괴로워도 행복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내가 엄청 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힘들다. 그냥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유도 없고 그냥 완벽하려고만 하는 느낌. AOMG라는 대중적인 회사에 소속돼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고. 다행히 어제 바밍타이거, 밴드 혁오와 작업 하나를 마치면서 그 기분을 털어냈다.

음악을 만들면서 엄청난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 같다. 너무 유치하게 들릴 것 같아 그렇게 표현하기 싫은데, 진짜 음악이 내 전부다. 사실 그 말을 계속 부정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진정성 있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인정하게 됐다. 음악은 어쩔 수 없이 내 전부다.

소금의 음악은 소금만 할 수 있는 거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아무도 닮지 않은 취향이 묻어 있다. 이 세상에서 진짜 하나밖에 없는 특별함, 유일함은 결국 실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음악 안에서 실수한다.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특별하다, 특이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어떻게 그런 창법으로 불렀고, 왜 그런 가사를 썼고, 목소리 톤은 왜 그렇게 잡았는지 나도 모른다. 그냥 실수하는 나 자신을 내버려두면 생각지도 못한 게 나온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걸 나만 아는 경우는 없을 거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나도 몰라야 한다. 단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건 안 된다. 그래서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좋은 영향을 주는 것들을 곁에 두려고 한다. 사람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으니까.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의 말을 읽고, 가까이하자. 책에 있는 인물이 내 주변 사람인 것처럼 대화하고 질문하면서 살자. 그럼 내가 아무리 음악 안에서 실수를 해도 아름답지 않을까?’ 싶은 거다.

소금의 음악에는 ‘너’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음악 안에서 칭하는 ‘너’는 어떤 대상인가? 이런 거다. 만약 지금 옆에 있는 이어폰이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내게 음악을 전달해주는 도구니까 너무 고마운 거다. 그런데 내 음악에서는 이걸 이어폰이라고 표현하기 싫다. 너라고 하고 싶다. 변덕이 심해서 그렇다. 지금은 너무 고맙고 좋은 이어폰이 어느 날 너무 싫어질 수도 있지 않나. 그러면 내가 이어폰이 좋다고 했던 그 노래를 못들을 것 같다. 그런데 너라고 해놓으면 ‘너’가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언제 들어도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좋은 기분으로 들을 수 있는것 같아서다.

직업 앞에 ‘여성’이라는 수식이 붙는 데 대해서 묻고 싶다. 여성이라는 사실이 음악을 하는 데 미치는 영향이 있을까? 연주자나 프로듀서, 믹싱을 하는 사람 등 작업할 때 남자들이 많다 보니 여자로서 남자들과 작업하기 힘들진 않으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직까진 딱히 힘든 적 없었다. 음악 하는 동안에는 한 번도 성별을 의식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표현되는 무언가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음악을 하는 순간에는 몸이 사라지고 영혼만 남는 것 같은 기분이다.(웃음) 젠더를 떠나서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면서 겪는 고뇌만 남고 껍데기는 없어지는 느낌. 음악 안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요즘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만드는 음악이 지금의 음악이라고 느낄 때가 있나? 목표는 지금이 아니라 평생이고 싶다. 은은하게 계속 남는 것. 요즘 것이라고 하면 트렌디하고 힙한 느낌이 강한데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약간 이상할지라도 어느 시대 건지는 몰랐으면 좋겠고, 그래서 시대를 초월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갖고 하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더 ‘요즘 것 같다, 힙하다’는 얘기를 많이 해주는 것 같다.

동경하는 지금의 여성 뮤지션이 있다면? M.I.A. 나는 노래가 좋다고 해서 그 뮤지션에 대해 찾아보지 않는다. 음악만 듣지, 배경을 굳이 알고 싶진 않은 마음이 있다. 그런데 M.I.A.는 어떤 사람일지 못 견디게 궁금해서 그에 대해 검색한 적이 있다. 그 후로 여성 아티스트로서 나도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M.I.A.는 난민 출신이다. 미국에서 음악 하는 난민 출신의 여자 아티스트. 아주 독특한 배경인데, 그는 이걸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워가는 데 이용하고 있다. 거의 운동가 수준으로. 게다가 난민 같은 세계적인 문제를 가사에 직설적으로 표현하는데 음악이나 사운드는 전혀 촌스럽지 않다. 영상도 직접 제작하는데 그것도 엄청나다. 같은 여성으로서 무척 고마웠다.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비요크 같은 멋진 여성 뮤지션이 많지만, 그들이 세상을 초월하고 싶어 하는 느낌이라면 M.I.A.는 직설적으로 바라보는 쪽이다. 사실 초월하는 건 쉽다. 그런데 직면하고 싸워나가는 건 무척 힘들지 않나. 나는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여성이고, 이곳은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 역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텐데, 음악을 하면서 전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을 텐데, 과연 나는 그처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진짜 용감해진다면 이 사람처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무서운데 그렇게 되고 싶다.

여러 호칭이 있다. 창작자, 아티스트, 뮤지션, 싱어송라이터 등. 무엇으로 불리길 바라나?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운동가가 될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겠다. 그런데 당장은 못 할 것 같다. 물론 10년 후 혹은 중년이 되었을 때는 운동가가 되어보겠다는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 미래가 무척 기대된다. 엄청 강하고 멋있고 주체적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다.

 

 

김뜻돌

김뜻돌 이름 뜻 꿈에서 걸려온 전화

재킷과 스커트 모두 푸시버튼(pushbutton), 레이어드한 레드 셔츠 분더캄머(Wnderkammer), 청록색 니트 톱 코스(COS), 슈즈 아쉬(Ash), 양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모든 돌에는 뜻이 있다’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 김뜻돌을 내걸고 몇 장의 싱글 앨범과 정규 음반 <꿈에서 걸려온 전화>를 세상에 내놨다.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생각을 열어주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한 세기가 교차하는 시점에 태어났는데
그 시기가 한국에서는 굉장히 변화가
큰 시기였던 것 같다.

옛 음악을 동경하면서도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소리를 찾는 건
내가 1990년대생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18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과 ‘최우수 모던 록-노래’ 후보에 이름이 올랐다. 새해 첫날에 목표를 적을 때 ‘올해의 앨범상 수상하기’를 적었었다.(웃음) 되든 안 되든 그냥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써놓은 건데, 그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진 것 같아 기쁘다. 그런데 옛날부터 바라는 게 있으면 잘 이뤄지는 편이긴 하다.

싱글 앨범만 내다가 처음으로 정규 음반 <꿈에서 걸려온 전화>를 발표했다. 정규 음반이나 EP를 낼 실력이 못 돼 싱글로 하나씩 냈는데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결국 정규 음반까지 내게 됐다. 사실 처음에는 EP를 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어차피 할 바엔 차라리 정규 음반을 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걸 다 넣어서 종지부를 찍어버리자는 생각으로 정규 음반을 택했다. 그게 훨씬 간지 나기도 하고.

음반 소개에 ‘이 앨범을 듣는 모두가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사랑을 흠뻑 맞고 좋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만들었다’는 말을 적어뒀다. 평소에 예지몽을 잘 꾸는데, 한참 힘들고 지친 시기에 누군가가 나를 북돋워주는 사랑의 말을 계속해주는 꿈을 많이 꿨다. 그게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 같은, 어떤 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존재였는데, 그의 말을 통해 실제로 힘듦을 덜어내고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이런 존재가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음악으로 표현한 결과물이 <꿈에서 걸려온 전화>다.

내 안에서 파생된 이야기가 많지만, ‘삐뽀삐뽀’나 ‘아참,’ 같은 트랙에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일단이 음반은 내가 그동안 생각하고 좋아하고 관심을 가진 것들을 다룬, 나에 대한 모음집이다. 그 안에 사회적인 이야기도 있을 뿐이다. 그건 내가 사회학을 전공한 영향이 크다. 2015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한창 페미니즘이 리부트되던 시기였다. 나 역시 여성운동을 했는데 하다 보니 너무 센 운동이 싫어졌다. 소위 말하는 래디컬한 운동이 지나치게 강하고 직설적이라고 느낀 거다. 그래서 나는 이런 문제를 음악적으로, 위트 있게 풀어내고 싶었다. 그럼에도 처음에 곡을 들은 친구들 반응이 좋지 않았다. ‘아참,’을 특히 반대했는데,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대놓고 들어가니까 ‘안티 생기면 생기면 어떡하냐. 남자 팬 없어진다’고 하더라.(웃음) 그런데 막상 음반을 내니 생각보다 좋아하는 남자들이 꽤 있다. 노래에 담긴 메시지보다 그냥 노래 자체가 흥겨우니까 그런 것 같다. 이렇게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들으며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접하는 게 내가 바라던 일이었고, 그래서 좋았다.

‘삐뽀삐뽀’는 특정한 사건을 다룬 곡인가?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몰라요. 길을 걷다 고공 크레인에 내가 깔려 죽어도’라는 가사로 시작된다.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이 곡을 만들기 4년 전쯤에 친한 친구가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다쳤는데 그 사고가 내게 대단히 크게 다가왔다. 또 한 가지 일화는 남자친구가 운전하다 바로 앞에 고공 크레인이 떨어지는 사고를 목격한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두 사건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고,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가 많다는 화두를 내게 던졌다. 힘들게 돈 벌면서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하던 때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에서의 불안정한 삶과 가난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이런 사유를 거쳐 만든 곡이다.

앞으로도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곡을 계속 쓸 것 같나? 지금은 뭔가를 외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 계속해서 그와의 접점을 찾으려고 시도하지 않을까 싶다.

첫 정규 음반을 발표하면서 발견한 김뜻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동안 투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노래를 많이 발표했는데 그땐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렇게 한 거라고 생각했다. 기술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정규 음반을 만들면서 내가 자잘한 기술적 완벽성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옛날 노래를 다시 들었고, 내가 실력이 없어서 그런 노래를 만든 게 아니라 그건 그냥 내 모습 중 하나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투박한 사람인 거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욕심을 내려 놓게 됐다. 나는 원석이고, 그래서 깎으면 더 예뻐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다듬어지지 않은 그 모습 자체가 음악 할 때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 되는 진짜 나였다.

음악은 언제 시작했나? 어릴 때부터 무대에 오르는 걸 즐겼는데 공교롭게도 좋아하는 게 음악이었다. LP를 모으는 아빠의 영향이 컸다. 고등학교 때까진 제일 좋아하는 취미 정도였는데, 대학교에 다니면서 ‘졸업하면 평범한 직장인이 될 텐데, 지금이 기회다. 지금밖에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압박감이 곡을 쓰게 만들었다.

애초에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직접 만드는 싱어송라이터가 시작이었던 건가? 맞다. 왜냐하면 노래를 잘 부르지는 않았기 때문에.(웃음) 처음에는 곡 만드는 걸 좋아했다.

내가 만들고 내가 불러서 좋은 점도, 어려운 점도 있을 텐데. 원곡자를 이해할 필요 없이 내가 자유롭게 주도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렇지만 반대로 노래만 하는 게 아니라 작곡, 작사, 편곡, 믹싱을 다 하니까 이 과정이 어렵고 험난하다. 돈이 많았다면 고민이 조금 줄긴 했겠지만.

심지어 음반도 유통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판매한다. 그건 수수료 때문에.(웃음) 그런데 하다 보니 구매자와 소통하는 것도 재미있긴 하다.

1990년대생이고, 여성이다. 이 사실이 음악 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한 세기가 교차하는 시점에 태어났는데 그 시기가 한국에서는 굉장히 변화가 큰 시기였던 것 같다. 옛 음악을 동경하면서도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소리를 찾는 건 내가 1990년대생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최근에 깊이 생각하게 됐다. 나는 내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건 어느 정도 고통을 수반하지 않나. 그런데도 그 사실을 미워하지 않고 사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더 많은 걸 느끼기 위해 택한 길이 아닌가 싶었다. 예술이라는 건 고통을 승화하는 일이기도 한데, 그런 면에서 나름 좋은 환경이라는 생각이다.

주변에 또래 여성 뮤지션이 많은 편이다. 그들을 살폈을 때, 우리는 어떻다고 말할 수 있나? 우리는 똑똑하다. 인디 신에도 소위 남성 카르텔 같은 게 있는데 그럼에도 잡초처럼 뿌리를 깊이 박고 자기 분야를 개척해가는 여성 뮤지션들을 보면 환경에 굴하지 않고 똑똑하게 마인드 컨트롤을 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실 내 친구들은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동경하는 지금의 여성 뮤지션이 있다면? 너무 많다. 박문치도 동경하는 친구고, 넘넘밴드의 베이시스트 이재도 좋아한다. 밴드 울프 앨리스의 보컬 겸 기타 엘리로셀도 동경한다. 체구가 되게 작고 말랐는데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는 굉장하다. 옆에서 기타, 베이스 치는 남자 멤버들의 기를 다 빨아들일 정도로.

작고 약해 보이지만, 내면은 강한 데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맞다. 내가 키우는 토끼 ‘미돌’이도 그래서 좋아한다. 작고 연약한데 성격은 더럽다. 그렇게 겉으로 보기엔 유약한데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나 아우라가 센 것을 동경한다. 내가 그러길 바라고.

지금 음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숨통이 트이니까. 성격도 예민한 편이고 상처도 잘 받는데 그걸 친구랑 커피 마시면서 풀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다. 음악으로 표현해냈을 때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일들이 단순히 아픈 일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으면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내가 이러려고 그 일을 겪었구나. 이 고통에 너무 감사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실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음악 하는 게 참 재미있다.

 

 

이하림

이하림 STRAIGHT PROJECT 재즈피플

셔츠와 드레스 모두 한킴(Han Kim).
재즈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며 자신만의 멋을 드러내는 창작자 혹은 피아니스트. 자신의 서사를 모아 첫 음반 를 발표했으며, 음악 안에서 자신을 찾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여자치고 잘한다’, ‘여자가 이런 장르를 하는구나’ 하는
반응도 있었고. 실력 외의 다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괴로웠다.
내가 이룬 성취에 대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깎아내리는
얘기를 들을 때는 힘이 빠지기도 했다.

20대를 전부 바쳐서 성실히 음악을 대했는데 내 성취를
그런 것으로 퉁치려고 든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그 때문인지 여성 음악가라는 수식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나름 큰 책임감도 느끼고.
어쨌든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종교음악으로 시작했다고 들었다. 재즈라는 장르에 빠진 계기가 있나? 2012년 11월쯤이었다. 친구랑 우연히 경성대 쪽에 있다는 재즈 클럽 ‘몽크’에 갔는데, 거기서 한 펑크 밴드의 즉흥연주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어떤 에너지가 느껴졌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매일 출근하듯이 몽크에 음악을 들으러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던 음악을 관두고 재즈를 시작했다. 잼 데이(누구나 잼 연주에 참여하는 날)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재즈를 익히기 시작했다.

잼 데이에 참여하는 것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건 의미가 다를 것이다. 맞다. 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 이름을 걸고 무대에 오르는 건 이 신에 들어가겠다고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2016년부터 내 이름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런데 막상 연주하려니 불안한 마음이 컸다. 연주 전후로 멘트를 할 때면 긴장해 눈앞이 캄캄할 정도라 미리 써서 외워 갈 정도였다.

연차가 높은 연주자들과 호흡을 맞추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스트레스가 많았다. 연주 전날 악몽을 꾸고 링거도 많이 맞았다. 선배님들과 동등한 연주자라는 사실을 잊고 내가 어떻게 연주하는지 평가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한때는 그런 생각 때문에 빨리 나이 들고 싶었다.

그런 걱정은 어떤 과정을 거쳐 해소한 건가? <재즈피플>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데뷔 앨범 <Straight Project>를 내면서 이제는 하고 싶었던 것, 나만의 것, 나를 표현하는 것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데뷔작 <STRAIGHT PROJECT>를 통해 발견한 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아직 잘 모르겠다. 분명히 내 이야기이긴 하지만 외부의 개입을 많이 받던 20대의 모습이라 완전히 내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안에서 나를 가장 잘 표현한 트랙은 있다. ‘Idea’라는 곡인데, 곡의 구성도 뮤직비디오의 감성도 나를 잘 표현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STRAIGHT PROJECT>는 음악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보여지는 요소에도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이다. 음악이야 당연히 중요하지만, 프로필 사진이나 음반 소개 글의 문체, 커버의 색감 등 모든 요소가 모였을 때 비로소 하나의 세계관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수적인 것까지 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재즈를 하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있다. 음악을 하는 데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존재가 사람이다. 어떤 인생을 살고 있고, 어떤 것에서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지 음악에 녹여내는 편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재즈라는 장르 하나로만 풀기엔 한계가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로 인해 재즈 아티스트냐 아니냐 하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내가 하는 음악이야 말로 개척해나가는 재즈의 정신을 잘 구현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1990년대생이고 여성이다. 이 사실이 음악을 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까? 시간이 흐른 탓인지 지금은 나이에 영향을 받는 것도, 내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다. 그런데 여성이라는 사실에는 영향을 크게 받는다. 우선 여성 연주자들의 실력 자체를 저평가하는 분들이 많았다. ‘여자치고 잘한다’, ‘여자가 이런 장르를 하는구나’ 하는 반응도 있었고. 실력 외의 다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괴로웠다. 내가 이룬 성취에 대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깎아내리는 얘기를 들을 때는 힘이 빠지기도 했다. 20대를 전부 바쳐서 성실히 음악을 대했는데 내 성취를 그런 것으로 퉁치려고 든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그 때문인지 여성 음악가라는 수식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나름 큰 책임감도 느끼고. 어쨌든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동경하는 여성 뮤지션이 있다면? 말로 선생님을 가장 존경한다. 내가 위축되어 있을 때 힘이 되는 말도 많이 해주셨는데, 그 일을 계기로 다른 뮤지션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힘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장르를 찾자면, 김뜻돌의 음악을 좋아한다. 그의 음악은 진심이 느껴진다. 그 점이 참 좋다.

음악 작업과 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나? 말로 선생님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실제로 나는 남한테 조언하는 데 굉장히 조심스러운 편이다.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기보다 ‘내가 하는 건 정답이 아니다. 그러니 언제든 반론을 제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한다고 해도, 반대로 음악을 그만둔다고 해도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말하기보다 지지하는 한 사람이 되어주려고 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미워하지 않는 마음, 위축되거나 시기하지 않는 좋은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주변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격려와 축하를 보낼 수 있는 용기도. 이런 것들이 건강하게 음악을 하도록 도와줄 거라고 믿는다.

지금 음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재즈를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었다. 그런데 재즈를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아주 많은 답을 찾았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수입도 재즈를 통해 얻은 것들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선물해준 재즈를 위해 나도 내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재즈라는 장르 안에서 국가대표라는 사명감이 있다. 최근 20~30년 넘은 재즈 클럽들이 문을 닫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나를 음악으로 표현하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중요한 이유지만, 동시에 내가 머무는 신을 더 넓고 근사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도 큰 동력이 된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욱 나를 믿어주고, 부족한 나도, 넘치는 나도 받아들이면서 열정적으로 나아가볼 생각이다.

 

 

드비타

드비타 크렘 CRÈME

톱과 스커트 모두 혜인서(Hyein Seo), 베스트 디와이도샵(Dydoshop), 짧은 네크리스 세이지가세이지(Sagegasage), 레이어드한 롱 네크리스 1064 스튜디오(1064 Studio), 이어링 서울메탈(Seoul Metal).
자신에 대한 사유를 거쳐 데뷔작 <CRÈME>을 발표했다. 장르와 시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음악을 만들고 있다. 누군가의 평가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음악을 하는 것이 뮤지션 드비타의 정체성이다.

나는 나를 표현하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건데,
다름 사람이 주는 곡을 부르는 건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음악 안에서 내가 어떤 걸 표현하고 싶은지,
어떻게 부를지, 어떤 태도를 취할지
모두 직접 컨트롤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내가 곡을 만드는 게 당연했다.

가장 편한 방식이기도 하고. 또 희열도 엄청나다.
며칠 전에도 느낀 건데, 작업이 순조롭게 잘되는 날의
성취감이 있다. 그런 순간들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짜릿하다.

데뷔작 <CRÈME>은 ‘최고 중의 최고(CRÈME DE LA CRÈME)’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어떤 음악을 담아낸 음반인가? 음악 이전에 시를 먼저 썼다. 내 생각과 감정을 무엇으로든 표현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쓴 시에 자연스럽게 멜로디를 입혀보면서 음악이 됐다. <CRÈME>은 시가 아닌 음악으로 나를 표현한 첫 번째 결과물이다. 가장 날것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은 음
반이다.

<CRÈME>의 트랙 중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곡을 하나 고른다면? 당연히 타이틀곡 ‘EVITA!’. 비난과 지지, 양면의 평가를 동시에 받았던 아르헨티나의 전 영부인 에바 페론(Eva Peron)의 애칭인 ‘Evita’라는 제목의 곡인데, 이 단어는 내 이름에도 들어 있다. 다시 말해 ‘EVITA!’는 나 자체를 표현한 곡이자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내 태도를 담은 곡이다. 내게는 데뷔 음반 타이틀곡 이상의 의미가 있다.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이는 뮤지션이 양면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가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클라리넷 연주자인 친오빠에게 음악적으로도, 삶에 대해서도 조언을 많이 얻는다. 오빠가 해준 얘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스스로 누군지 명확히 알면 사람들이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음악을 만들 때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만족하는 게 중요하다’라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왜 음악을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어떤 음악을 하든 남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집중하게 됐다.

데뷔 음반을 내기까지 4년의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EVITA!’는 열여덟 살 때 만든 곡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EVITA!’를 포함해 그간 만든 곡을 모아 EP를 내려고 스튜디오에 갔었다. 아마 그때 나는 스스로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아니었다. 더 준비해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많았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퀄리티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음악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 시간 속에서 새로운 감정도 느끼고 음악적으로 성장하면서 만든 음반이 <CRÈME>이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음반을 완성하는 데도 4년이 걸릴까? 설마.(웃음) 곧 나올 거다. 올해 안에.

드비타의 음악은 장르가 불분명하다. 한 음반에 여러 장르를 시도했고, 심지어 한 곡 안에도 다양한 장르가 혼재되어 있다. 그게 내 재능이기도 하다.(웃음) 애초에 음악 작업을 할 때 장르의 경계를 두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로듀서 태림의 영향도 크다. 내가 한국의 한스 짐머라고 생각할 정도로 천재적인 아티스트인데, 그와 작업하면서 배운 것도 많다.

모든 곡을 직접 만들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다. 내 곡을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음악을 하면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나는 나를 표현하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건데, 다름 사람이 주는 곡을 부르는 건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음악 안에서 내가 어떤 걸 표현하고 싶은지, 어떻게 부를지, 어떤 태도를 취할지 모두 직접 컨트롤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내가 곡을 만드는 게 당연했다. 가장 편한 방식이기도 하고. 또 희열도 엄청나다. 며칠 전에도 느낀 건데, 작업이 순조롭게 잘되는 날의 성취감이 있다. 그런 순간들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짜릿하다.

데뷔작 만들 때도 그런 희열의 순간을 느꼈나? 그렇다. 그 희열이란 게 한편으론 자신감이기도 하다. ‘내가 이걸 만들었어!’ 이런 느낌.

반대로 혼자 다하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은 없을까? 아직은 어려운 게 없다. 이것밖에 모르고 살아서 그런가.

AOMG와 8BallTown에 소속되어 있다. 두 레이블에서 음악을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나? 영향이라기보다 두 레이블이 내게 주는 가장 크고 확실한 도움이 있다.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 내 페이스대로 음악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게 아주 좋다.

1990년대생이고, 여성이다. 이 사실이 음악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 나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을 모른다. 음악을 처음 접한 것도 오빠랑 컴퓨터 앞에 앉아서 뮤직비디오를 본 것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음악, 그게 1990년대생의 음악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건, 사람마다 삶의 경험이 다르겠지만 나와 공감대가 있는 여성들이 있을 거고, 내 음악 안에 그들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 살면서 아시아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심한 차별을 경험했다. 미국 애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성의 모습이 있는데, 그걸 깨고 싶어서 발악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혹은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던 그때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음악으로 도움과 용기를 주고 싶다.

동경하는 지금의 여성 뮤지션은 누구인가? 시저(SZA). ‘나는 나고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설명할 생각 없어’ 하는 태도가 멋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멋있다. 나는 아직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지 않는 탓인지, 언젠간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도 그처럼 나만의 행복을 찾고 싶고,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고 싶다.

내가 만드는 음악이 ‘지금의 음악’이라 생각하나?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실제로 두 종류의 음악 작업을 하고 있는데 지금의 음악, 그리고 다른 시대의 음악을 병행하고 있다. 과거의, 지금의, 미래의 음악을 모두 다 하는 게 목표다.

지금도, 앞으로도 드비타의 음악 세계에 남아 있을 것과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 남아 있을 건 내 철학,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게 바뀔지라도. 항상 내 음악에는 내 생각이 녹아 있을 거다. 존재하지 않을 건, 평범함. 그냥 보통의 음악. 그런 건 절대 없을 거다.

 

 

백다솜

드레스와 신발 모두 비뮈에트(Bmuet(te)), 프린트 톱 수기(Sugi), 양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한국 전통악기가 가진 다양한 소리를 찾고 연구하며 실험하는 아티스트.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통과 현대의 결합을 시도하며, 모든 음악에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담아낸다.

내가 만든 음악을 들으면 마치 그림일기를 보듯
당시에 내게 어떤 일이 있었고,
그래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내 음악에 나이와 성별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만드는 당시의 나는 모를지라도
완성된 결과는 늘 나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전통악기와 가까이 지냈다고 들었다. 우리나라 전통악기를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취미로 단소와 대금을 배웠지만, 사실 그때는 아버지를 따라 미술 쪽으로 진로를 잡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향상 무대에 올라 연주하는 게 더 잘 어울린다는 어머니의 조언을 듣고, 음악으로 방향을 틀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초등학교 6학년을 앞둔 겨울이었으니,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삶의 3분의 2를 음악과 함께 보낸 셈이다. 이제는 내 삶에서 의미를 따지기보다 너무나 당연한 존재가 되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안에서 자유롭게 현대적인 요소를 더하고 있다. 특히 루프스테이션(일정한 구간을 반복 재생하는 악기)을 사용하는 점이 신선하다. 곡을 만들 때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소리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곡마다 표현하고자 하는 지점이 다른데, 그에 가장 적절한 소리를 찾다 보니 현대적인 요소도 결합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연주자로 활동하다 온전하게 나를 표현하고 싶어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혼자 하다 보니 한계가 있어서 루프스테이션을 시도하게 됐다. 한 명의 연주자가 보통 한 시간 정도의 공연을 끌어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관악기는 현악기와 달리 화음을 내는 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질리지 않도록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루프스테이션이라는 장비를 알게 되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자음악은 지난해 서울 ‘남산국악당 단장’ 쇼케이스에서 처음 시도했다. 당시 쇼케이스의 주제가 ‘거울 도시’였다. 도시라는 게 밀집된 지역이지만, 그 안에 있는 요소 하나하나는 결국 우리가 만드는 거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통해서 다시 나를 비춰본다는 뜻으로 정한 주제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어떤 소리로 표현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다 전자음악과 결합하는 방법을 택했다. 전자음악을 통해 도시의 환경, 혹은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심리 같은 걸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전통적인 방식에 머물기보다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쪽인 것 같다. 맞다. 음악을 하면서 이런 도전을 즐기는 편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한 때문인지 심하게 아방가르드한 것도 편견 없이 좋아하고 다양한 음악에 관심을 가진 영향도 있다. 듣는 것을 넘어 연주를 시도한 건 친구인 작곡가 제러드 레드먼드 덕분이다. 그가 ‘현대음악이 이렇게도 될 수 있구나’ 하고 눈을 뜨게 해줬고,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게 만들어줬다. 이런 시도들은 내 음악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주법을 알게 됐고, 또 이런 경험을 통해서 ‘이런 건 어떻게 표현을 하면 더 좋겠다’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엄청난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도들이 국악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른 장르에 비해 자주 접하는 이들이 적은 탓인지 국악은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처럼 전통음악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고, 그에 대한 반응도 긍정적이다. 예전에 해외 페스티벌에 참가 하면서, 그곳에서 일본 아티스트들과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들에게 이런 한국 전통음악계의 방식에 관해 얘기해줬더니, 굉장히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상대적으로 일본 전통음악계는 보수적인 편이라며. 이 얘기를 듣고 우리는 그래도 건강하고 즐겁게 음악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도 음악가들을 보면 전통적인 어법이지만 그 안에 밴드 음악이나 전자음악의 요소를 섞는 경우가 많고, 기본적으로 음악의 바운더리가 넓은 편이다. 그처럼 우리도 이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도전해보고 싶은 또 다른 협업의 형태가 있다면? 지난해에 처음으로 음악과 시각예술을 결합한 무대를 선보였는데, 꽤 흥미로웠다. 지금 하는 작업도 내가 만든 소리가 시각적으로 재탄생하는 무대를 계획 중이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도 완전히 다른 영역과 협업을 시도해보고 싶다. 지금 생각으로는 안무와 결합해보면 어떨까 싶다.

내가 만드는 음악이 ‘지금의 음악’이라고 느낄 때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 베이스가 전통음악이다 보니, 단순하게 옛 음악이라 취급할 수 있지만 나는 내 음악이 ‘지금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생이고 여성이다. 이 사실이 만드는 음악에 묻어 있다고 보나? 나는 내 음악을 일기장으로 생각한다. 누구나 일기장에는 가장 솔직한 내가 담겨 있지 않나. 나도 그렇다. 만드는 모든 음악 안에 내 생각이나 경험을 느낀 그대로 녹아내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만든 음악을 들으면 마치 그림일기를 보듯 당시에 내게 어떤 일이 있었고, 그래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내 음악에 나이와 성별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만드는 당시의 나는 모를지라도 완성된 결과는 늘 나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연주하면서 실감하는 부분은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근육량이 적다 보니 필연적으로 연습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

동경하는 지금의 여성 뮤지션이 있다면? 첼리스트 이옥경. 너무 멋있다. 그분도 첼리스트로서 꾸준히 클래식을 공부하다 자신만의 것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실험을 이어오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고, 그래서 그의 음악을 동경한다.

본인의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길 바라나? 내 음악의 주제는 전반적으로 단순하고 간결하다. 한여름밤, 파도, 겨울날 등 단어로 되어 있다. 관객이 음악을 통해 다양하게 해석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주제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이 사람은 이런 모습을 그렸구나. 이런 경험을 했겠구나’ 하고 자신만의 추측을 하고, 그 이후에는 나처럼 관객도 자신만의 경험이나 생각을 그려보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이를테면 ‘여름’을 듣고 나면 ‘나만의 여름은 무엇일까? 내 여름날은 어땠었지?’ 하고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전달 방식이지 않을까.

 

 

브린

브린 SILKMOTH Veteran

가죽 재킷 유니 와(Yuni Wa), 톱과 스커트 모두 키미제이(Kimmy.J).
싱글 로 데뷔해 최근작 와 를 통해 자신을 정립해가고 있다. 힙합으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R&B, 소울, 하우스, 팝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

‘내 자아를 음악으로 발산하는 건 좋은데
거기서 끝나기엔 아깝지 않나?
그럼 내가 해야 할 건 뭘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내가 생각하는 음악의 순작용이 있다.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들도
체감하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목표를 가진 순간부터
내 음악에 책임감이 생겼다.

음악을 듣고 센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실제로 만나니 생각보다 밝고 다정하다. 음악도 음악인데, 그 이미지는 아마 표정 때문일 거다.(웃음) 좀 전에 봐서 알겠지만, 촬영할 땐 거의 웃지 않으니까 그 모습만 본 사람들은 나를 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바라는 이미지도 귀엽고 발랄한 쪽은 아니라서 그렇게 보는 걸 부정하고 싶진 않다.

뮤지션 브린의 시작은 언제였나?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열일곱 때. 중학교 때 노래방 가면 친구들이 가수 해보라는 얘기를 많이 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음악이었는데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실용음악 학원에 다녔다. 그런데 그곳의 방식이 나와 맞지 않았다. 이후에 힙합 음악을 하는 JJK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방향을 잡고 음악을 시작했다.

그 방향을 장르로 말하면 힙합이었던 걸까? 그렇다. 왜 힙합이어야 했나? 교육 시스템 때문이었다. 실용음악 학원에서는 베껴 부르는 걸 많이 했다. 작은 건반 하나 두고 벽만 보고서 계속 같은 노래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그러다 보니 ‘이게 음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랩 레슨에서는 내가 가사를 쓸 수도 있고, 음악도 내 식대로 바꿔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무엇보다 계속 새로운 걸 할 수 있는 게 좋았다. 그런 차이 때문에 힙합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내 곡은 내가 만든다는 기조가 생겼을 것 같다. 당시에는 기조라고 할 만큼 명확한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남들이 하는 건 못 하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걸 하면 할수록 내가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고, 내가 바라는 길이 어떤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곡을 만들고 부르는 것을 넘어 음반에 대한 기획부터 제작까지 직접 다한다. 뮤지션이지만 크게 봤을 때 나는 내 음악의 기획자이자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고 노래하고 랩 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음반에 대한 기획부터 그에 맞는 프로듀서를 찾아서 같이 작업을 하고, 피처링 부탁도 직접 다한다. 내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 또한 내 일의 한 부분이다.

혼자 다해내기 때문에 자유롭지만 반대로 어려운 부분도 많을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 가지 일만 파는 사람을 따라잡을 순 없다. 프로듀싱이나 믹스 마스터링 같은 내 분야가 아닌 것들도 웬만하면 다해내려고 하는데. 그 부분이 양날의 검이 도리 때가 있다.

브린의 음악은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힙합으로 시작했지만 R&B, 팝, 소울 등 여러 장르를 오가고 있고 음반마다 변화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사실 그 점이 내가 가진 고민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조잡하거나 중구난방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 그런데 아직은 내 음악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음악은 오늘은 의사가 되고 싶고 내일은 선생님이 되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때마다 하고 싶은 걸 ‘나 이거 할 거야!’라며 고집하는 게 좋다. 그게 지금 내가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방식이다.

가사 역시 다양한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다. 사랑과 관계에 관해 노래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내 기준에 맞춰 나아갈 것을 말하기도 하고, 외로움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듣고 보니 좀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웃음) 아마 특정한 상황을 상상해서 쓰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가장 솔직한 나를 꺼내놓기 때문일 거다. 나는 남의 얘기를 들어서 쓰는 걸 못 한다. 그렇게 하면 엄청 오래 걸릴 텐데 또 성미가 급해서 오래 걸리는 건 싫어한다. 무엇보다 직접 체감해야 가장 좋은 게 나온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하고.

솔직한 나의 생각과 모습 중 결국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것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걸 가사로 썼을 때 ‘구질구질해지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결정할 수 있다. 그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지, 아니면 한 곡의 분량으로 간추려서 사람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그간 발표한 곡 중 본인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곡을 하나 꼽는다면? 최근에 낸 음반 <SILKMOTH>의 타이틀곡 ‘Veteran’. 사람들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내가 모두 담긴 곡이다. 벌스 부분에서는 힘을 빼고 부드러운 톤을, 훅에서는 사람들이 ‘그게 브린’이라고 말하는 파워풀한 면이 있다. 그리고 태도는 한마디로 ‘나 일 존나 열심히 해’다. 스스로 열정적이고 성실하다는 데 자부심이 있는데, 그런 나를 표현한 곡이다.

최근 2~3년 사이에 수가 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다른 장르에 비해 힙합은 여성 뮤지션의 비율이 적은 편이다. <쇼미더머니>만 봐도 여성은 캐릭터가 아니라 ‘여성’으로만 분류된다. 나도 한때 <쇼미더머니>에서 그렇게 분류되던 사람이다.(웃음) 아무래도 숫자가 적으니까, 소수라는 게 가장 먼저 보이는 특징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 같긴 하다. 그런 분류로 인해 크게 피해 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아쉽긴 하다. 어쨌든 그런 식의 분류가 여성 참가자들이 가진 매력을 더 잘 그려주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희망적인 부분은 최근 들어 당당하고 멋진 태도를 가진 여성 뮤지션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거다.

여성이 아닌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한다면 어디에 속할 수 있을까? 캐릭터로 따지면 서바이벌 게임에 등 떠밀려서 왔는데 싸울 의지 없어 보이는, ‘쟤 여기 왜 있지?’ 싶은데 왠지 범상치 않은 ‘힘숨찐(힘을 숨긴 찐따의 줄임말)’으로 그려지지 않을까.(웃음)

지금 음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즘은 이유도 필요 없을 만큼 당연하다. 굳이 찾자면 지금 제일 재미있는 게 음악이니까. 계속해서 내가 몰랐고 못했던 영역을 발견하고, 그걸 해내는 재미가 있다. 덕질의 세계 같은 느낌이다. 한정판 물건을 가지려고 열심히 돈 모아서 샀더니 다음 달에 또 다른 한정판이 나오는. 하하.

궁극적으로 어떤 목표를 바라보고 있나?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뮤지션이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이미 나는 문화라는 산업 안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이 사실을 실감한 후부터 ‘내 자아를 음악으로 발산하는 건 좋은데 거기서 끝나기엔 아깝지 않나? 그럼 내가 해야 할 건 뭘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내가 생각하는 음악의 순작용이 있다. 나를 예로 들면, 어릴 때 되게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걸 바꿔준 게 음악이었다. 가사를 써 버릇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많이 고쳐졌다. 그리고 멋진 음악을 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할지 생각해봤더니 당당하고 나를 사랑할 줄 아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음악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거다. 이렇게 내가 느낀 순작용을 다른 사람들도 체감하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목표를 가진 순간부터 내 음악에 책임감이 생겼다. 내가 좋은 음악을 하는 게 끝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이다.

대단히 사회적인 목표다. 일종의 오지랖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