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볼 것. 분명히 아직 쓸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물건일 것이다.

“당신 혹시… 와인이라도 한잔할래?
여기 갖다 놓은 지는 제법 되는 와인이거든. 코르크 따개 가져올게.”
“따개 여기 있어.”
“그거 혹시…?”
“음, 흐음.”
“당신 그걸 아직도 갖고 있었다니, 정말 놀랐는데.”
“이렇게 디자인이 훌륭한 물건을 내가 왜 버렸겠어?”
데이비드 마추켈리, <아스테리오스 폴립> 중에서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건축학 교수 ‘아스테리오스 폴립’과 설치미술가 ‘하나 존넨샤인’이 만나 사랑하고 헤어졌다가 재결합하는 과정을 개성 있는 그림체로 그려낸 그래픽 노블이다. 교직원 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은 2년 뒤인 1986년 봄에 결혼한다. 함께 떠난 여행에서 하나는 모래사장에서 누군가 버리고 간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줍는데, 아스테리오스는 그게 아직 멀쩡하니 자기가 쓰겠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하나는 아스테리오스를 떠나고, 아스테리오스는 화재로 전반부 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다. 불이 났을 때 챙긴 유일한 물건은 하나가 주운 스위스 아미 나이프. 아스테리오스는 자동차 수리점에서 품삯으로 받은 고물 승용차를 끌고 며칠 동안 눈 속을 달려 하나에게 간다. 하나는 모든 것을 잃은 아스테리오스가 자기가 발견한 칼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당신이 주워 준 소중한 추억을 간직했어.” 아스테리오스는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분위기가 너무 진지해지 지 않도록 대화의 방향을 전환한다. 그의 균형 감각이 그들이 헤어진 기간 동안 쌓였을 두꺼운 벽을 슬그머니 허문다.

“이렇게 디자인이 훌륭한 물건을 내가 왜 버렸겠어?” 만화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이 대사를 좀 더 즐길 수 있을 터다. 그때 아스테리오스는 하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근사하지 않았다. 그녀를 도와줄 수도, 그녀에게 만족감을 줄 수도 없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오스는 그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쓰레기통으로 가는 쓰레기들 앞에서 이런 여유를 한번 부려보면 어떨까. 물건을 살 때마다 물건보다 더 크게 오는 포장 용기들을 분리수거함으로 내보내기 전에 ‘이렇게 디자인이 훌륭한 물건이라면 버릴 필요가 없겠는데!’ 하고 감탄해보는 것이다.

재사용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물건의 용도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내가 재사용하는 물건의 1순위는 배송품의 포장재들이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업무와 관련한 문서나 책들을 택배로 받는 일이 잦다. 교정지를 받은 봉투를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가 교정지를 출판사에 다시 보낼 때 사용한다. 받은 봉투에는 출판사의 주소가 쓰여 있어서 주소를 따로 기억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줄고, 교정지를 담기에 가장 적절한 규격 이어서 크기를 고려해야 하는 수고가 줄어든다. 다시 보낼 필요가 없는 포장재들은 선물을 할 때 사용한다.

재사용 2순위는 이리저리 피해봐도 내 손에 쥐여진 일회용품들이다. 페트병 뚜껑은 다양한 색깔에 모양도 가지가지라 모으는 재미가 있다. 투명 플라스틱 컵에 따로 모아두었다가 같은 크기가 서너 개 모이면 화분 밑에 괴어둔다. 바람이 통하니 식물이 잘 자란다. 비누 뒷면에 붙이면 비누가 불지 않아 끝까지 쓸 수 있다. 페트병은 세제통으로 재사용한다. 스파게티 소스 병은 수제 요구르트를 발효하거나 김치, 깻잎장아찌를 담는 반찬 통으로 쓴다. 비타민 음료를 마시고 난 갈색 유리병은 각진 모양이 개성 있고 빛깔도 매력적인 데다 크기가 딱 양념 통으로 알맞아 소금과 고춧가루를 담아두었다. 은박 접시는 화분 받침대로 알맞다. 종이 상자를 모아뒀다가 여름과 겨울에 창 사이에 끼워두면 단열재 역할을 한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내리듯 물건들은 제자리에서 쓰임을 다하면 쓰레기통으로 가는 대신 다른 적절한 자리를 찾는다.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3순위의 재사용 물품들은 오래되어 쓰임을 다한 것들이다. 코르크 재질의 요가 블록은 모니터 받침대로, 다 쓴 탁상 달력은 달력 종이를 떼어내고 두꺼운 겉면에 예쁜 그림을 붙여 액자로 사용하고 있다. 머리를 커트로 자른 뒤에는 헤어밴드를 쓸 일이 없어서 욕실에 두고 세수할 때 이용한다. 이제 착용하지 않는 목걸이나 액세서리를 천장에 달아두면 인테리어 소품으로 변신한다. 오래된 도자기 컵은 수경식물을 재배하는 화분으로 다시 쓴다. 동네 문구점에서 산 염색용 물감으로 이런저런 무늬를 그려 넣으면 분위기가 전환된다. 고장 난 압력밥솥의 밥솥은 설거지통으로 쓰고 있다. 음료나 술병은 화병이, 오래된 화분은 우산꽂이가 되었다. 침대보를 잘라 커튼으로 활용하고 과일 상자 겉면에 천을 붙여서 정리함으로 쓰고 있다. 젊은 작가상을 받은 트로피의 케이스는 멋스러운 나무 재질인데 휴대폰을 넣어두고 음악을 틀면 소리가 울려 꽤 멋진 스피커 역할을 한다. 뚜껑에는 내가 그린 그림을 붙여서 액자로 사용하고 있다. 노트의 겉면을 잘라 엽서로 이용하고 이면지는 버리지 않고 메모지로 활용한다. 제로 웨이스트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나 메모를 보낼 때는 이면지를 사용한다. 아름다운 편지지를 받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함께 환경을 되살리는 일을 실천하고 있다는 걸 서로 확인하면 애틋한 마음이 더해진다.

쓰레기로 수거되어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환경오염이 일어나기 때문에 대형 가구나 가전은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내보내기 전에 다시 사용하는 방법을 찾거나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게 좋다. 우리 집에서는 쓰임을 다했지만 다른 곳에서 환영받는 물건들이 있다.

나는 작가이기 때문에 책이 많다. 책장이 무너진 적도 있다. 그 책장은 원래 침대였는데 약간 수리해서 책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멋스럽고 독특한 디자인으로 재탄생했 는데, 이 책장이 무너진 이후로 집에 이토록 많은 책을 둘 필요가 있는지 고심했다. 대답은 ‘아니다’였다. 이후 책 나눔을 시작했다. 수련을 하고 있는 요가원 한편에 공간을 마련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장식장에 독서대를 하나 펼쳐놓고 책을 두 권씩 늘 비치했다. ‘책 나눔 합니다. 필요하신 책을 그냥 가져가시면 돼요.’ 이렇게 써 붙여두었다. 누군가 책을 가져가면 다시 다른 책을 갖다 놓는다.

재사용(reuse)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물건에 알맞은 다른 위치를 찾아주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디자인에 약간 변형을 가한다. 위치를 바꾸고 모양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꽤 훌륭한 분위기 전환이 된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재사용 품목은 옷이 아닐까? 옷장 한가득 옷이 있는데도 우리는 계절마다 새 옷을 구입한다. 자주 신는 신발은 한 켤레인데 신발장 안은 안 신는 신발들로 그득하다. 패스트 패션 시대를 지나 울트라 패스트 패션 시대. 의류 회사들이 새 옷을 만들어 내놓는 주기가 빨라지고 신상품의 개수도 늘어났다. 1~2주면 신상품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개인이 사들이는 옷은 한 해에 일흔여덟 벌이나 된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만들어서 빨리 입는 옷들, 그래서 많이 가질 수 있는 옷들은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좋을까?

옷감, 천을 만드는 데는 물이 필요하다. 청바지 한 벌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물의 양은 1천5백 리터. 목화를 심고 경작해서 수확하는 데 드는 비용이라고 한다. 가격이 싼 이유는 물건을 만드는 데 회사에서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 다.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비용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패션 산업은 석유 산업의 뒤를 이어 오염 산업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폐수의 20%, 온실가스 배출의 10%가 패션 산업으로 인한 결과다. 우리가 산 옷의 40%는 입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새 옷을 사는 대신 옷장 속 옷을 꺼내 다시 입자. 유행은 돌고 도니, 결국 옷들을 다시 꺼내 입을 적절한 시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2년 전부터 기분 전환을 위한 새 옷이나 신발류를 사지 않는다. 생활비가 가장 많이 들 때보다 4~5배 줄었다. 옷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전에 사들인 옷들로 옷장과 행어는 이미 포화 상태니까.

이제 환한 봄 햇살이 들어와 하루를 상큼하게 시작할 수 있는 봄이다. 방문에는 아직 지난겨울에 만든 크리스마스 리스가 붙어 있다. 메타세쿼이아 줄기에 솔방울과 말린 꽃, 열매들을 달아두었는데 그걸 떼어내 이듬해에 다시 쓸 수 있도록 보관해두 고, 이제 슬슬 면사들을 묶어 마크라메 드림캐처로 바꿔볼 생각이다.

재사용이 생활화되면서 내게 부족한 융통성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전에는 뻣뻣하게 굴던 일들을 제법 유연하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원하지 않는 물건이 들어오면 이걸 또 어떻게 분리수거해서 내놓고, 또 어느 세월에 자연으로 되돌리나 싶어 스트레스부터 받았는데 이젠 이걸 어떻게 재사용해볼까 생각하는 즐거움이 생겼다. 물건을 대하는 태도는 나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재사용은 단지 쓰레기 줄이기 방법을 넘어서 이렇게 해서 안 되면 저렇게 하면 되네, 하는 여유롭고 재치 있는 삶의 태도를 내게 선물해주었다.

사물의 쓰임은 정해져 있지 않다. 불교에서는 만물이 계속 변하는 것이 이치인데, 인간이 스스로의 모습을 규정해놓고 고집할 때 어리석음이 생긴다고 한다. 물건들을 살피고 다른 쓰임을 생각해보는 시간은 내게 지혜를 주었다. 난 원래 오로지 소설가고, 소설 아니면 안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신나서 제로 웨이스트 에세이를 쓰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고집을 꺾고 나자 굳게 버틴 바위 같던 마음에 살랑살랑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온다. 그 봄의 기운을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다.

집 안을 둘러보자. 폐기 직전인 사물의 새로운 자리를 찾아보자. ‘아, 이렇게 디자인이 훌륭한 물건이라면 버릴 필요가 없겠는데!’ 하고 감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