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는 안 되고 생선은 괜찮아, 생선도 달걀도 안 먹고 열매와 채소만 먹어, 하는 구분보다 중요한 건 우리 식탁에 오른 그들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과정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동물과 식물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음식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무래도 맛이지만, 다른 여러 가지 요소가 맛을 더하거나 빼기도 한다. 플레이팅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그것일 테다. 식당 분위기도 분명 한몫한다. 인테리어가 취향에 맞고 기분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면 어쩐지 소화가 더 잘되는 것 같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불편한 상대와 밥을 먹으면 소화시키기 바빠 맛을 느낄 새도 없다. 같은 음식인데도 어쩐지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 눈을 감고 먹을 때와 뜨고 먹을 때 맛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보는 즐거움을 고려하지 않은 플레이팅은 반갑지 않지만 그냥 넘어간다. 아무리 음식 맛이 좋아도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식당이라면 망설이게 된다. 접시의 색깔이 식욕을 자극하거나 가라앉히기도 한다.

이기성과 유키코가 식사 중인 일본의 가스토 식당에서 이들의 접시 위에 놓인 오므라이스가 처한 문제는 맛이 아니다. 이 오므라이스는 ‘미적’이지 않다. 이기성은 두께가 적절치 않고 끝이 탔기 때문에 식당에서 팔기에는 부당한 음식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는 음식의 미적 상태에 대해 자기 의견을 피력했을 뿐 그래서 다른 음식으로 바꿔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유키코가 그렇게 한다. 음식점 종업원에게오므라이스를 다시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정작 오므라이스가 잘못되었다고 말한 이기성은 당황한다. 종업원도 난처해한다.세 사람이 제각기 다른 이유로 난감한 이 상황에서, 누가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달걀요리에 유독 민감하게 구는 이기성이 까다롭다고 여기는 이도 있고, 종업원에게 항의한 유키코가 눈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주방장이 훌륭한 요리 실력을 갖추지 못한 게 문제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고, 적절하게 언변을 구사해 손님의 마음을 달래지 못한 종업원의 센스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은 사람도 있을 테다.

 

초조하게 할 말을 찾던 그에게 유키코가 먹는 오므라이스의 달걀부침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의 ‘오므라이스’ 하면 연상되듯 얇거나 매끈하지 않고프라이한 것처럼 두껍고 가장자리가 타들어가 있었다. 어차피 일이 다 틀렸다고 낙담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달걀의 형태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그는 오므라이스가 왜 잘못되었는지, 돈 받고 팔기에는 왜 부당한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활비가 부족할 때마다 수십 가지의 달걀 요리로 남은 날들을 버텨온 베테랑답게, 그의 논지는 어느 주제보다 생생하고 조리 있었다. 유키코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다시 만들어달라고 했다. 여태 문제가 있다고 해놓고는 막상 유키코가 그렇게 나오자 그는 당황했다. 종업원도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요청은 왜 하는 겁니까?”

“이런 달걀은 먹을 수가 없잖아요.”

“맛이 이상합니까?”

“아니, 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 김금희, <마지막 이기성> 중에서 –

 

두꺼운 달걀부침 오므라이스 문제에 대해서 나는 좀처럼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는데, 이유는 오므라이스에 있었다. 나는 달걀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요리를 해 먹을 때 달걀을 사용하지 않고, 장을 볼 때 달걀 코너는 그냥 지나친다. 이기성에게 오므라이스 달걀부침의 두께가 중요한 것처럼 나에게는 먹거리의 윤리적 문제가 중요하다. 나는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는 방식과 수정시키고 산란하기에 이르는 과정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자마자 부리를 자르고 40시간 동안 억지로 불을 밝혀 고문하듯 많은 모이를 먹여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육장에서 고통스럽게 사육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나는 이 소설의 장면을 슬쩍 바꿔보았다. 이기성이 미적 문제를 거론하고 난 뒤 유키코가 종업원에게 다른 오므라이스로 바꿔달라고 요청하는데, 그 내용이 바뀐다. 햇볕을 쐬며 적정량의 모이를 먹고 마당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방목한, 정상적으로 자란 닭이 낳은 달걀로 바꿔달라고. “이 달걀은 먹을 수가 없잖아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육식에 대한 생각을 가장 크게 바꾸게 된 계기는 네네츠족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때문이었다.

<시간을 멈추는 소녀>라는 단편을 쓰는 중이었는데 가상의 부족인 게데투족에 대해 구상하는 동안 북극 툰드라 지역에 살고 있는 네네츠족에 대해 공부했다. 네네츠인은 순록에 의지해 유목 생활을 유지하고, 순록은 네네츠족 덕분에 포식자들로부터 보호받으며 먹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받는다. 이 두종의 삶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네네츠족은 ‘순록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네네츠인의 식량은 순록이다. 그들은 순록의 고기뿐 아니라혀, 내장, 피까지 버리는 것 하나 없이 모두 먹는다. 순록의 가죽으로 집을 짓고 옷도 해 입으니 의식주 생활을 모두 순록에게 기대는 셈이다. 순록은 네네츠족에게 삶을 유지하게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한다.이들이 순록을 먹는 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네네츠인이 순록을 먹는 것과 우리가 닭과 돼지를 먹는 것을 똑같이 ‘육식’이라는 행위로 묶을 수 없다. 네네츠족은 순록을 죽여야 할 때가 오면 눈을 가리고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순간에 숨통을 끊는다. 장대에 순록의 머리를 달아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장례 의식을 치른다. 그러고 나면 순록의 모든 부위를 버리는 것 없이 모두 먹는다. 감사를 잊지 않고 예의를 갖춘 과정을 거치고 난 순록은 되도록 많은 사람과 나누어 먹는다.

우리가 고기를 더 많이 얻기 위해 축산업을 통해 동물들을 강간에 가까운 방식으로 인공수정 하고, 어미와 새끼를 잔인한 방식으로 갈라놓고, 움직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 가두어 살을 찌우고, 줄을 세운 채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대량 학살하는 것, 내가 먹고 싶은 부위만 골라 먹고, 다른 누군가가 끼니를 굶는 것은 잊은 채포식하는 행위와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네네츠족과 순록의 삶을 알게 된 이후 육식이냐, 채식이냐의 논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기를 먹거나 채소를 먹는 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었다. 고기는 안 되고 생선은 괜찮아, 생선도 달걀도 안 먹고 열매와 채소만 먹어, 하는 구분보다 중요한 건 우리 식탁에 오른 그들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과정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동물과 식물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겉모양을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비닐 포장을 씌워 모두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호박을 기르는 것이, 인공수정사가 소와 돼지의 질에 손을 넣어 강간하듯 임신시키고 태어나자마자 꼬리를 자르고 움직이지 못하는 좁은 우리에 가두어 살을 찌운 뒤 세 살때 도살하는(돼지는 원래 30년까지 산다) 것은 무엇이 다를까?

나는 며칠 전 SNS를 통해서 신설된 도로 아래서 괴사되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나무는 도로에 짓눌린 채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사육장에 갇힌 채 제대로 땅을 딛지 못해 발이 늘 부어 있는 개와 그 나무는 다르지 않았다. 나는 스파트필름, 몬스테라, 보스턴 고사리, 문샤인, 홍콩야자, 파키라와 함께 살고 있다. 식물들과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은 식물에게도 사람이나 동물과 함께 살 때와 마찬가지로 애정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스파트필름이나 홍콩야자처럼 물과 햇볕, 바람만 있으면 쑥쑥 자라나는 생명력 강한 녀석들도 있고, 온도와 습도를 세심하게 맞춰줘야 하는 까다로운 녀석들도 있다. 각자의 생육조건이 다르지만 내가 식물을 기르면서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식물 역시 가장 좋은 환경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산다는 사실이다.우리 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스파트필름은 어떤 조건에서도 살아남았다. 심지어 통풍이 전혀 되지 않는 화장실에서도 꿋꿋하게 버틴다. 창가에 놓아두면 흰 꽃을 피우고 싱싱한 잎새를 풍성하게 내밀었다. 스파트필름은 화장실에서 견뎠고, 창가에서는 행복했다. 싱싱하게 뻗은 이파리의 기세를 보면 녀석이 ‘창가가 가장 좋아’ 라고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물을 좋아해’ 하며 미소 짓지 않아도 화분의 흙이 금세 마르는 것을 보면 물을 더 마시고 싶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다른종을 기르는 경험은 내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와 가장 친밀한 관계인 고양이 ‘먼지’는 아픈 고양이다. 선천적으로 앓고 있는 질환들 때문에 운동을 하지 못하고 신경이 예민한 편이다. 다른 고양이에 비해서 날렵하지 못하고 대신 나와 감정 교류가 많다. 나는 먼지를 고려해 움직임이나 소리를 조심하고 여간해선 외박을 하지 않는다. 먼지는 내가 가위에 눌리거나 늦잠을 자면 나를 깨운다. 나는 어린 시절 식물에는 관심이 없고 동물은 무서워했다. 그런 내가 식물과 동물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사는 종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먼지 덕이 크다. 작은 소음에도 두려워하는 먼지를 보면서 등산을 할 때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야생동물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거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을 떠올린다면 이런 글을 쓰기가 무색할 정도로, 나는 고기 마니아였다. 그리고 식습관을 바꾸기 위해 몇 차례 시도를 했다.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는 지금 단계에 이르기까지 5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먹지 않아서 허기지니 다시 먹고, 먹지 않아서 불행하니 다시 먹고, 먹지 않아서 소외감을 느낀다며 다시 먹는 다양한 단계를 거쳐 힘겹게 채식에 성공한 경우다. 쌀, 콩, 감자, 고구마, 상추, 사과, 버섯, 호두 같은 것들로도 하루를 살아낼 영양분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나 자신이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채식을 시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다이어트 뒤에 찾아온 요요 현상처럼, 이상주의자였던 나는 처음부터 고기는 절대 안 먹어, 하고 현재 상태의 몸을 고려하지 않는 높은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고기를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일단 먹는 횟수를 줄이고, 그다음에는 생선으로 대체한다. 고기 대신 생선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생선을 내려놓으면 된다. 생선이 고기와 같은 생명이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생선을 멀리하게 된다. 그래서 남은 것이 내 경우에는 곡식과 과일이다. 오늘 아침에는 오렌지와 상추, 해바라기씨에 올리브유와 소금, 설탕을 뿌려 먹었다. 힘을 내야 할 때 전에는 고기를 찾았다면 이제는 맵거나 신 음식을 먹는다. 식탁이 소박해지자 몸이 가벼워졌다. 마음도 가벼워졌다. 풍성한 식탁을 되돌려줄테니 이전으로 돌아가라면 당연히 사양한다. 소박한 식탁의 기쁨은 고기 맛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