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나는 캥거루족이다. 과로로 정신이 너덜거려도 육체는 건강하게 보전할 수 있는 주머니에 산다. 하지만 ‘독립적’이지 않다는 걸 나도 안다. 매달 생활비를 보태는 것만으로 부모님의 돌봄 노동을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게 혼자 사는 사람은 선망의 대상이다. “혼자 살아요”라는 말은 왜 그렇게 도도하고 멋지게 들리는지.

최근에 만나기 시작한 애인도 혼자 산다. 데이팅 앱에서 서로 ‘슈퍼라이크’를 보낸 순간부터 우리는 제법 잘통했다. 처음 만날 날 그는 코로나19를 빌미로 한잔 더하자며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 뉘앙스가 능구렁이처럼 귀여워서 군말 없이 따라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작은 조명을 켜고 인센스 스틱에 불을 붙였다. 이어 LP 플레이어를 세팅한 후 포트 와인보다 더 달콤한 음악을 틀었다. 초대를 받고 나서야 우리 사이가 원나이트 스탠드로 끝날 관계는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와 사귀기로 한 날부터 매주 며칠씩 그의 집에서 지냈다. 분위기 좋은 바에서 데이트를 하다가도 종착지는 언제나 그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새롭고 매력적인 음악을 잔뜩 들으며 처음 본 위스키를 홀짝였다. 나는 주로 캥거루족과 연애를 해왔기에 건강한 성생활을 위해 전혀 건강에 이로워 보이지 않는 모텔을 들락거리며 3시간 안에 욕정을 해소해야 했지만 이젠 대실과 숙박 중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의 집에선 섹스가 해치우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가 됐다. 어떤 장르의 음악을 틀어놓는지, 조명은 어떤 것으로 켜는지에 따라서도 섹스의 느낌은 천차만별이었다. 이 모든 옵션을 그날의 기분에 따라 선별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섹스를 위한 ‘치트키’를 창의적으로 생성했다.

 

동거

5개월째 간헐적 동거를 지속 중인 나는 공교롭게도 이 루틴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처음엔 나를 압도하는 그만의 공간이 좋았지만, 이제는 그의 눈초리가 신경 쓰인다. 끼니때마다 나를 위해 요리하는 그는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을 때 자주 서운함을 표출했고, 외식하고 싶다고 하면 “그냥 집에서 먹자” 하며 알뜰한 자취러다운 말을 했다. 포크와 술잔이 어디 있는지, 그의 주머니 사정은 어떤지 몰랐을 때가 가끔은 그립다. 우리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 위해, 손님을 넘어선 동거인처럼 그의 삶 곳곳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게 옳을까? 설거지를 마친 후 방 안에 꽉 찬 음식 냄새를 빼고, 자다가 방귀를 대차게 뀌는 그런 현실적인 장면은 낭만적이던 연애의 시간을 지우는 것 같아 슬프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51년에 걸쳐 사르트르를 인생에서 필수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헌신했다. 보부아르는 자녀를 원치 않으며 사르트르를 위해 아침 식사를 차리거나 심부름을 하지 않고 사랑받기 위해 세계와 지적으로 호응하지 않는 식의 행동을 할 마음이 추호도 없음을 밝혔다(데버라 리비의 <살림 비용> 중에서). 둘은 호텔에서 생활하면서 급진적이나마 서로에게 맞는 공존 방식을 만들어갔다. 동거를 간접경험해본 나는 앞으로 함께 지내는 방식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해 볼 시기를 맞은 것 같다. 마음에도 없는 요리 조수가 되어 애인의 집에서 전전긍긍하거나 서로의 민낯을 날것으로 마주하는 일은 우리의 연애 이전에 나에게도 해롭다. 물론 내가 돈을 더 많이 벌고 언젠간 원룸이 아닌 투룸 이상의 집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애인과 ‘즐겁게’ 함께할 방법이라면 도전해볼 만하다. B(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