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도를 그리며

헤어진 후, 도시는 지뢰밭이 되었다. 처음으로 함께 어색하게 밥을 먹던 식당, 차를 세워두고 함께 음악을 듣던 남산 어딘가의 길모퉁이, 즐겨 가던 카페와 늘 앉던 자리. 밟기 쉬운 기억의 지뢰들이 주변에 가득하고, 허약한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폭파되어 무너질 것만 같다.

이 도시 곳곳에는 나의 지나간 연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이 유산처럼 묻어두고 떠난 지뢰들은 길 아래 촘촘히 묻혀, 나는 매일을 인디아나 존스 같은 비장한 마음으로 집을 나설 수밖에 없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보지만 지뢰를 피하지는 못한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길을 택했을까 자책하지만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다. 눈앞에 놓인 어느 대기업의 내비게이션은 내 흔한 이별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듯 명랑한 목소리로 나를 지뢰가 가득한 서울의 길들로 이끌었다. 우리는 연약한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매일 잔혹한 도시를 횡단한다. 이쯤 되면 내비게이션을 만드는 유능한 기업에 선량한 시민들이 겪고 있는 이별의 잔해들을 피할 수 있는 섬세한 길 안내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잔인한 도시를 피해 안락한 집으로 대피하지만, 집은 또 다른 위험으로 가득하다. 욕실에 단정히 쌓인 수건들은 여전히 그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접혀 있고, 그와 아이디를 공유하던 스트리밍 서비스는 내가 더 이상 고객이 아니라며 가벼운 영화 한 편 보고 싶은 외로운 마음을 차갑게 외면한다. 군데군데 비어버린 속옷 서랍과 화장실 수납장을 바라보며, 더 이상 집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포자기의 심정이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나는 다시는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확신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를 다시 발견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이다. 물론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랑스러운 사람은 몇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발굴할 수 있는, 이제는 지나가버린 시절에 멸종한 생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익숙해질 새로운 얼굴을 마주칠 수 있을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얼굴이 내 호기심에 보답할 가능성은 있을까? 나는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미션이다.

어느 날 SNS에서 낯선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하게 된 것은 목적을 잊은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포스팅한 사진에서 시작해 각자의 동네와 취향,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들이 골목길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예상보다 길어진 대화를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하던 중, “내일 저녁 같이 먹을래요?”라며 그가 물었을 때, 나는 그의 SNS 프로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얼굴이다. 지금껏 나와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낯선 누군가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SNS 프로필에 스스로 얼굴을 걸어두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얼마 전 헤어진 그와는 양극단에 있는 다른 사람임이 확실하다. 괜찮을까? 안전한가? 어쩐지 나와 철저히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인 것 같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거절해야겠다. 아직 지뢰밭 한복판에 서 있는 나에게 이 만남은 성급하고, 심지어는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연애 상대에 대한 나의 판단이 언제 옳았던 적이 있었나? 내 선택이 틀렸다고 외치는 이별의 증거들이 지뢰가 되어 이 도시에 가득한데. 그에 대한 판단을 잠시 유보하기로 한다. 이번만큼은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새로운 얼굴과 세상을, 잠시 훔쳐볼 수 있다면 하루 저녁의 안전 정도는 위태롭게 걸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음을 먹었다.

다음 날 저녁 마주한 그 얼굴은 SNS에서 본 프로필과는 사뭇 달랐다. 서 있는 자세에서 느껴지는 냉소적인 분위기는 이내 앳된 눈매와 둘 곳 모르는 불안한 손동작에서 색다른 의미를 얻었다. 용기를 얻는다. 완전히 망쳐버린 저녁 한 끼가 될지언정 이 모든 게 내 잘못은 아니다. 이 어색한 첫 만남에 참여한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다. 그러나 막상 이 정적을 이겨낼 만한 영리한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잠시 후 그의 차를 타고 이동하게 될 텐데…. 그런데 잠깐, 이 사람이 연쇄살인범이나 강도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 이대로 뒤돌아 최대한 빠르게 뛴다면 괜찮을까? 뾰족한 수가 없다. 나는 꼼짝없이 이 어색한 첫 만남을 완수해내야만 한다.

이런 어수선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차에 올랐다. 오른쪽 손잡이를 꽉 잡는다. 그런데 문득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귀를 사로잡았다. 내가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얘기하기를 주저하는 그 음악이다.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길티 플레저’라고 여기는, 사실은 가장 좋아하는 이 노래를, 이 사람은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용감하게 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초조하게 움켜쥔 오른손이 어느새 느슨해진다. 갑자기 차 안의 공기가 안전하게 느껴졌다. 최소한 연쇄살인범일 리는 없다.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나와 공통점이 있을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쌀쌀한 날씨에 흰 셔츠를 입고 나왔구나. 새삼 깨닫는 나 또한 별일 없으면 흰 셔츠를 입는 사람이다.

차는 어느새 남산길로 접어들고, 수많은 지뢰들이 묻힌 길 위를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보기만 해도 옛 기억에 마음이 요동치던 식당의 간판을 지나, 전 연인과 처음 함께 살던 동네의 교차로를 무심히 지나친다. 교차로에서 늘 보던 풍경이 마치 어제 태어난 사람이 된 것처럼 흐릿하고 아름답다. 이별 후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들었던 이 길이 어쩐지 만만하게 느껴진다. 지뢰를 밟은 발 아래가 뜨겁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음 곡은 무엇일지 다만 기대할 뿐이다. 잠시 커피를 사러 들른 카페는 전 연인과 종종 가던 곳이지만 처음 본 가게처럼 낯설다. 원래 문손잡이가 이렇게 생겼었나? 늘 앉던 저 자리는 원래 이런 의자였나? 원래 주인이 저렇게 웃는 표정이었나? 모든 게 새롭고 또 묘하게 익숙하다. 눈치채지 못한 채 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운전석에 앉은 그의 옆모습이 제법 익숙해졌다.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는 희귀한 순간이다. 지뢰밭이던 도시의 지도가 새롭게 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