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규환 최하나 감독

오버사이즈 블레이저와 블랙 팬츠 모두 자라(ZARA), 티셔츠 코스(COS), 스니커즈는 에디터 소장품.

 

엄마 ‘선명’(장혜진), 새아빠 ‘태효’(최덕문)와 사는 대학생 ‘토일’(정수정)은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한다. 배 속 아이의 아빠 ‘호훈’(신재휘)과 함께 부모를 찾아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지만, 계획은 쉽사리 진행되지 않는다. 결국 “넌 대체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라는 잔소리를 들은 토일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친아빠 ‘환규’(이해영)를 찾아 나선다. 토일과 3명의 ‘애비’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아비규환’을 이룬 영화 <애비규환>에서 가족에 관한 보수적인 관념은 중요하지 않다. 임신과 출산, 결혼과 이혼이 뒤얽힌 토일의 이야기를 첫 장편에 재기 발랄하게 풀어낸 최하나 감독은 유머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애비규환 최하나 감독

 

<애비규환> 최하나 감독

 

<마리끌레르> 2021년 1월호에 함께한 이후 두 번째 만남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지난 인터뷰에서 올해 이루고 싶은 큰 소망으로 ‘웨이트트레이닝 3대 중량의 200kg 달성’을 이야기했는데, 지난여름 직전에 가까스로 도달했다. 그리고 20대가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애비규환>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을 위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첫 장편영화다. 학교에 가기 전, 영화감독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무엇인가?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도서관에서 한 영화 전문 잡지를 읽었다. 90여 명의 사람들이 각자 1995년부터 2008년까지 개봉한 영화 중 ‘베스트 10’을 선정해 소개하는 기사를 접했는데, 영화 목록에 내가 본 작품이 거의 없었다. 이때 영화의 세계가 내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후 어느덧 그 세계에 깊숙이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는 당시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중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어려워 보였다.

영화 제작에 처음으로 도전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욕망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영화의 세계에 비하면 난 그저 자그마한 먼지 같았다.

현재의 마음은 어떤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애비규환>을 완성하고 나니 영화와 좀 더 친해진 기분이 들고, 예전엔 어려웠던 일들이 조금은 쉬워졌다.

<애비규환>을 선보인 후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모습이 있나? 원래 여러 명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한 마디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관객과 언론인을 비롯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무대 체질인가 보다.(웃음)

그럴 수 있었던 건 <애비규환>을 더 많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렇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생각보다 두렵지 않고 재미있다. 내 작품을 궁금해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않나. 그래서 뭐라도 더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기획부터 제작과 홍보까지, 영화와 관련한 모든 과정에서 관객의 다양한 반응을 살펴볼 수 있는 개봉 이후의 시간이 제일 흥미롭다.

지금까지 참석한 <애비규환> 관객과의 대화(GV)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언제인가? 지난 8월에 열린 익산여성영화제의 GV. 익산의 한 문예반 선생님이 GV를 진행했고, 관객은 대부분 50~60대였다. 보통 GV를 찾아오는 관객은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젊은 분이 대부분이라서 이날 GV의 관객 구성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관객들도 나처럼 나이 어린 감독이 편안한 차림으로 무대에 오르니 무척 신기해했다. 이들의 호기심이 마스크 너머로 느껴져서 나 또한 즐겁게 GV에 임했다. ‘왜 토일에게 도토리묵만 먹였느냐’며 임신한 토일을 걱정하시고, GV를 마친 후 다 함께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 하트’를 능숙하게 하시던 관객들이 기억에 남는다. 관객이 새 영화를 찾아 보는 것도 좋지만, 영화가 또 다른 관객을 만나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다.

<애비규환>이 개봉한 지 약 1년이 흐른 지금, 이 영화를 다시 소개한다면 어떻게 말하고 싶나? 누구에게나 가족에 얽힌 사연이 있고, 모든 가족 이야기는 어딘가 조금씩 닮은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애비규환>을 본 관객이 신기한 방식으로 내면이 환기되거나 위안받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애비규환>은 가족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이 담긴 다정한 영화다. 의도적으로 다정하게 다가가진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상 처 주지 않으려는 노력은 했다. 내가 실제로 가족과 나눈 대화를 대사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내 경험을 꾸밈없이 담아내기도 했다. 또 <애비규환>을 통해 관객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20대 여성 캐릭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좋아하진 않더라도, 누구나 흥미로워 할 법한 토일이라는 인물을 말이다.

<애비규환>을 만들 때 가장 참고를 많이 한 가족영화는 뭔가? 사라 폴리 감독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나 또한 가족에게는 혈연관계라는 사실보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토일과 본인의 닮은 점이 있다고 느끼나? 난 토일보다 좀 더 소심하고 조심성 있는 편이다. 그래도 미움받는 것을 덜 두려워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이전에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에서 토일을 연기한 정수정 배우에 대해 ‘미움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맞다. 그게 내가 정수정 배우에게 배운 태도이기도 하다. <애비규환> 개봉 이후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며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을 때, 정수정 배우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면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영화 촬영 현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한다. 그런 현장에서 감독으로서 어떻게 이끌었나? <애비규환> 촬영 현장에서 영화 제작 경험이 제일 적은 사람이 나였다. 배우를 비롯한 선배들에게 많이 의지하며 촬영했고, 선배들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해해주었다. 영화를 위해 모두 한마음으로 노력한 현장이었다.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자주 한 말이 있나? “이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웃음) 모든 배우가 본인이 맡은 인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영화 속 캐릭터들을 감독 혼자 만드는 건 아니지 않나. 각 캐릭터의 언어나 몸짓 등은 배우의 노력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각자 지닌 특유의 표정이나 행동이 있고, 그것을 감독이 전부 관장할 수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배우들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예상치 못하게 탄생한 장면도 있나? 토일이 검은 화장을 하고 있을 때 태효가 설거지를 하다가 부엌에서 나오는 장면. 시나리오를 쓸 땐 태효가 거실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단순한 장면을 그렸는데, 촬영 당일 최덕문 배우가 “난 부엌에서 나오겠다” 하더니 직접 고무장갑에 거품을 묻혔다. 그 덕분에 한층 재미있는 장면이 완성되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촬영 현장의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하다. 대구에서 촬영할 때 영화에 참여한 모든 인원이 한 숙소에 같이 머물렀는데, 나에게 배정된 방이 제일 넓었다. 하루는 촬영을 마친 후 미술부, 연출부, 제작부 스태프 몇 명이 내 방에 모여 그날 촬영 소품으로 쓴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극 중에서 토일이 먹다 남긴, 우리 할머니가 영화 촬영을 위해 직접 부쳐주신 전이었다. 요즘은 코로나19로 모일 수 없으니까 ‘줌 미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웃음)

팬데믹 시대를 맞으며 영화산업이 어려워졌다. 얼마 전에는 서울극장이 문을 닫았다. 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건 단순히 지도상에 존재하던 공간이 없어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극장은 새로운 사람이나 연인, 친구, 가족 등과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이 쌓여 있는 곳이다. 그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점이 아쉽다. 하루빨리 극장 문화가 회복되어 앞으로도 오래 이어졌으면 한다.

감독으로서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의 기조는 어떻게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나? 내가 일상에서 하는 생각들이 매번 창작 욕구로 이어지진 않는다. 다만 내가 우연히 마주한 사람이나 사건들이 내게 남긴 어떠한 인상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 같다.

최근 ‘코미디로 인간 세상을 이롭게’라는 슬로건을 내건 팟캐스트 <희극지왕>에 고정 출연 중이다. <애비규환> 홍보팀에서 팟캐스트 공동 진행을 제안해 시작하게 되었다. 평소 코미디를 좋아하는 편이라 취미 겸 공부 삼아 임하는 중이다. 사람들을 웃게 하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다. 어떻게 해야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는지 파악하려고 하는 편이다.

오늘날 유머가 가진 힘은 무엇일까?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웃음을 통해 전달할 때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평소 크게 웃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확 깨닫게 되는 순간이 종종 있는데, 이럴 때마다 크게 감탄하게 된다. 무언가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진심으로 느끼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를 전할 때 유머는 아주 좋은 무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들 때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뭔가? ‘어렵다’. 그런데 힘들어도 영화를 내려놓을 순 없다. 작품을 완성한 이후에 얻는 만족감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그 만족감이 행복으로만 채워진 건 아니지만, 이 감정을 통해 나 자신이 완전해지는 듯한 느낌은 든다. 영화를 되게 사랑하는 것 같다.(웃음)

주목할 만한 한국의 젊은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 젊은 감독들은 단지 영화를 조금 일찍 만든 것일 뿐, 이들이 청년 세대를 대표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또 영화감독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덜고 싶다. 영화감독도 우리 모두가 그렇듯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조금씩 부족한 한 인간이라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앞으로 영화를 만들며 꾸준히 지켜가려는 가치가 있다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동떨어진 낡은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를 새롭게 꺼내어 보여주거나, 익숙한 걸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이 감독으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