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으로 올라가는 골목

 

연희동의 가파른 골목을 올라 <고원>으로 향했다. 새하얀 옷을 입은 호스트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니 명상의 시간이 시작된다. 싱잉볼 소리를 들으며 숨을 고르고, 차를 마시며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어두운 방에 앉아 빛과 음악을 감상하며 ‘현재의 나’에 대해 자문하는 시간. 몸과 마음의 감각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 경험을 통해, 무대미술가 여신동은 건강한 삶을 살아갈 방법을 제안한다.

명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0여 년간 무대미술가로 활동하면서 관객들이 각자의 삶을 투영해 공연을 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공연 감상이 곧 자기 대면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 대면은 명상의 첫 단계라고도 볼 수 있다. 몇년 전 베를린에서 명상에 대해 배웠는데, 숨의 이동에 집중하며 호흡하다 보면 깊은 내면을 마주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무(無)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고 한다. ‘나’를 찾아가는 명상이 내가 지향하는 작업과 비슷한 결을 지닌다.

2020년에 ‘연극과 일상성에 관한 명상’이라는 부제를 붙인 연극 <pan123mE1>을 연출한 적이 있다.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일상의 단편을 무대에 담백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연극이 아닌 우리 일상에도 각자의 드라마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강말금과 김신록 등 <pan123mE1>에 함께한 4명의 배우는 본인이 식사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며 몰랐던 습관을 발견했고, 그 이후 무대에 올라 실제로 밥을 먹었다. 연극을 본 관객들도 각자의 식사 습관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그 과정을 통해 자신과 대면하기를 바랐다.

<고원>의 관객들은 1시간 동안 명상과 관련한 체험을 한다. 이를 전시라고 볼 수 있을까? <고원>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는 어려운 듯하다. 처음에는 몰입형 전시(immersive exhibition)를 생각했다. 오픈런으로 진행하며 점차 발전시킬 계획이라 향후 더 극적인 체험을 준비할 가능성도 있다. <고원>의 관객들은 빛을 바라보고, 소리를 듣고, 향을 맡는 체험을 하며 오감을 일깨우게 된다. ‘고원’이라는 제목에는 ‘내가 태어난, 감각이 살아난 곳’과 ‘높은 위치에 자리한 곳’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녹아 있다.

 

공간 외부에 다양한 오브제를 배치해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호스트가 내어주는 차를 마시며 명상할 때, 연희동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가파른 골목의 끝에 자리한 공간에서 <고원>을 진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곳은 원래 내 작업실이었다. 올라올 땐 힘들지만, 도착하면 연희동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반전 매력’이 마음에 들었다. 관객들도 <고원>을 찾아오면서 잠시나마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선보인 무대와 큰 차이가 있는 공간인 것 같다. 맞다. 이 공간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무대가 아니다. 각 관객이 공간 안에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공간을 꾸릴 때 일반적인 무대연출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무엇에 중점을 두며 <고원>을 마련했나? 관객의 시간. 우리는 쉽게 과거를 돌이키고 미래를 상상하면서도 현재는 무디게 인식하는 편이다. <고원>에 머무르는 1시간 동안, 관객들이 삶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느껴지는지 자각하면 좋겠다.

<고원>의 체험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 열두 번 진행된다. 아침, 낮, 밤에 선보이는 체험의 구성이 조금씩 다르다. 아침에는 싱잉볼을 활용한 ‘차크라 마사지’로 잠들어 있던 몸을 깨우고, 낮에는 ‘사운드 메디테이션’에 침향을 곁들이고, 밤에는 차를 마시면서 호스트가 하는 ‘티 세리머니’를 본다는 것이 시간대별 차이점이다.

명상의 방에서 진행하는 ‘사운드 메디테이션’은 뮤지션 오혁과 협업해 완성했다. 명상의 방에 들어간 관객들은 내가 제작한 시노그래피(scenography)를 보면서 오혁의 음악을 듣게 된다. 오혁과 ‘우리만의 명상법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출의 여명, 휴식, 호흡과 심장박동을 비롯한 신체 리듬을 모티프로 작업했다. 이 밖에도 명상과 자기 대면에 흥미를 가진 이들이 내레이션, 앰비언트 사운드 디자인, 포스터 촬영 등을 맡아주었다. 큰 수익을 바라며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기에 <고원>의 취지에 관심이 없었다면 함께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원>에 함께한 사람들 중 호스트는 관객을 맞이하는 역할을 한다. 호스트가 갖춰야 할 자격이 있었을 것 같다. 관객들을 직접 마주하고 명상을 위한 가이드를 알려줘야 하니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호스트를 원했다. 현재 11명의 호스트가 돌아가면서 <고원>을 지키고 있는데, 배우와 해금 연주자 등 무대에 서는 퍼포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전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던 이들도, <고원>을 계기로 처음 만난 이들도 있다.

기억에 남는 관객의 말이 있다면? 여러 관객이 “명상의 방에서 생각을 비워내려 했지만 오히려 수많은 생각이 밀려왔다”는 말을 했다. 그게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원>을 통해 자기 대면에 대한 내 의견을 관객과 나눌 수 있다. 자기 대면은 특정한 도구나 철학적 접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몸과 마음의 감각을 인식하려는 태도다. 이곳을 찾아왔던 관객들은 언제 어디서든 자기 대면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보다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

 

 

보통 무대를 떠올리면 검은색으로 뒤덮인 공간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무대라는 공간의 범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무대는 ‘극적 공간’이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무대가 까만 이유는 공연이 만들어낸 드라마가 전하는 감정을 온전히 남기기에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무대가 아니더라도, 어떠한 드라마가 탄생하면서 감정을 느끼게 한다면 그곳 또한 무대라고 생각한다. 이 관점을 확장하면, 감정의 요동을 불러일으키는 일상의 찰나까지도 일종의 무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랜 기간 활동하면서 무대미술에 대하는 태도에 생긴 변화가 있나? 처음 무대미술을 시작했을 땐 시각적 표현의 욕구가 컸다. ‘내 솜씨’를 드러내는 데 몰두한 것이다. 하지만 조형, 조명, 의상 등이 어우러진 무대는 결국 관객에게 무언가를 선사하지 않나. 이제는 관객의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무대미술가로서 앞으로 꾸준히 지켜가려는 가치가 있다면? 국내에서 열리는 일부 공연들로 인해 피로감을 느낀 적이 있다. 마치 판타지 같은, 나와 상관없는 듯한 이야기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무대들을 보면서 예술의 진정성에 대해 고민했다. 무대 위에 허상을 꾸며내며 관객들을 속이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건히 품고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명상의 방에서 볼 수 있는 여신동의 시노그래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