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났다는 기대가 무색하게 비가 추적이던 8월 초의 어느 날 점심시간 무렵 정동길 초입은 유난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조금 더 걸으니 디올 뷰티가 공식 후원한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전시가 열리는 미술관 입구를 향해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심술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막바지를 향해가는 전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열정이라니! 근래 아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라더니 이 정도였나싶을 만큼 놀라웠고, 요즘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가 된 아트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뷰티와 아트의 만남은 특정 제품을 위한 콜라보레이션이라는 형태로 종종 있어왔으니 사실 이 둘의 만남이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현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어떤 생각의 전환으로 뷰티 브랜드들이 아트의 영역에 손을 내밀었는지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의 협업이 주로 판매를 위한 전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지금은 지속 가능성, 윤리 경영 등의 측면으로 보다 폭넓게 접근하는 경향이 크다. 디올 뷰티가 공식 후원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며 사람들의 이목을 끈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한국 전시는 디올 뷰티가 최근 시작한 ‘디올 문화 정원’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 프로젝트는 브랜드가 꽃과 정원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무슈 디올의 정신과 열정을 계승해 튈르리 로즈 가든과 베르사유 궁전의 ‘퀸즈 그로브’ 정원의 재건을위해 장미 2백 그루, 라벤더 1천4백 포기 등 다양한 식물을 다시 심는 것을 시작으로 유서 깊은 정원을 복원해 파리의 정원을 보존하는 동시에 지속 가능하도록 노력함으로써 미래와 환경에 대한 연속성을 증명한다. 이렇게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대적 예술 활동의 대한 후원으로까지 이어지는 행보는 시슬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슬리 도르나노 재단을 통해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문화 프로젝트를 다방면으로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일례로 프랑스 문화유산 재단, 파리 시청과 협력해 성모 승천 성당의 천장 벽화 복원에 나서고, 스트리트 아트 역사의 페이지에 인상적인 한 줄을 새긴 파리 13구의 벽화 예술 프로젝트 ‘거리 예술 13(StreetArt13)’을 지원한 것이 대표적이다.

“변형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종합적 이해라는 결과를 낳는다. 감각적 인상과 느낌, 지식과 기억이 다양하면서도 통합적인 방법으로 결합되는 것을 말한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미셸 루트번스타인 <spark of genius>저자

그런가 하면 브랜드의 철학을 관통하는 가치가 문화 예술과 만난 경우도 있다. 가장 먼저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브랜드는 바로 라프레리. 라프레리를 상징하는 코발트블루 컬러는 현대미술가 니키 드 생팔을 상징하는 블루 컬러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순수하고도 탁월한 가치, 자연의 진귀함에서 제품의 영감을 찾는 심미안이 예술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자연스레 예술 후원 기업의 대표 주자가 되는 수순이었다. 아트 바젤, 웨스트번드 아트 앤 디자인, FIAC 파리, 프리즈 등 굵직한 아트 페어와 파트너십을 맺었을 뿐 아니라 신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제품의 키워드를 주제로 현대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그렇게 탄생한 작품을 아트 페어에서 선보인다. 올해 9월에 선보일 예정인 ‘스킨 캐비아 하모니 렉스트레’는 ‘조화의 추구’를 주제로 기술적 지식과 예술적 능력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 실용성과 미학적 아름다움의 결합으로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바우하우스와 만났다. 그 결과 바우하우스의 여성 작가들을 오마주한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아트 바젤의 라프레리 라운지에서 전시되었다. 한편 이솝이 예술을 대하는 자세는 사뭇 다르다. 브랜드 철학 안으로 예술을 끌어안는 느낌이랄까? 이솝은 제품과 디자인 측면에서 순환하며 지속 가능한 요소를 중시하고, 이는 곧 우리 삶의 질을 높인다는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같은 브랜드 철학은 함께 협업할 디자이너를 선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얼마 전 진행한 ‘키클로스 캠페인’처럼(키클로스는 그리스어로 순환을 의미한다) 조향사나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와 협업을 검토할 때 그들이 얼마나 이솝의 가치관을 공유하는지, 제품이나 캠페인의 의도에 잘 부합하는지를 우선 고려한다. 이솝의 철학은 지역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 로컬 프로젝트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추석에 깃든 의미를 담은 ‘하비스트 캠페인’을 매년 꾸준히 선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올해는 시련을 견디며 단단해지는 과정에 대한 격려와 결실의 기대를 담은 방짜유기장 이수자 이지호 작가와 함께한다.

데코르테는 브랜드의 철학을 좀 더 친밀하게 보여준다. 여자의 스킨케어 시간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패키지와 디자인에 공을 들이고 향을 통한 심신의 안정도 화장품의 기능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디자인 협업이 디자이너 마르셀 반더스를 브랜드의 아트 디렉터로 영입해 브랜드 철학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 시선을 국내로 돌려보자. 전통과 유산의 가치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프로젝트를 꼽자면 단연 설화수의 ‘설화문화전’이 아닐까? 설화수는 2006년부터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찾은 미학과 실용성을 재조명함으로써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후원하는 일을 올곧게 이어오고 있다. 단청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색부터 다양한 전통 문양, 옹기, 활 등 폭넓은 주제를 바탕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설화문화전은 단순히 보여주는 전시에 그치지 않는다. 제품에 작품을 입히고 판매해 수익금의 일부가 무형문화재에 기부되는 착한 소비로 이어지도록 한다. 소비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문화 예술과 손잡는 경우도 있다. 연작이 보태니컬 아트를 추구하는 아티스트 그룹 팀보타와 함께한 전시처럼 브랜드의 철학, 근간을 보다 공감각적으로 경험하도록 해 소비자가 브랜드와 소통하는 것을 넘어 감각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는 순기능을 꾀한다.

물론 뷰티와 아트의 만남에 대해 누군가는 여전히 잘 포장된 마케팅 속성일 뿐이라거나 MZ세대의 가장 각광받는 재테크 수단으로 떠오른 ‘아트’라는 강력한 흐름에 편승한 것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본 것들과 앞으로 보게 될 것들은 그런 얄팍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뷰티와 아트의 만남은 브랜드 철학의 실천과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에 지극히 긍정적인 영향을 서로 주고받아 경계를 허문 발전된 변형적 사고의 결과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