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한 편의 영화를 발견하기 위해
1천 편에 가까운 영화를 보고,
이를 위해 각종 영화제와
세계 곳곳을 누비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머.
이들이 추천하는 올해의 보석 같은 영화들.

Asian Cinema 남동철 수석 프로그래머, 아시아 영화(일본·서아시아)

프로그래머의 일 좋은 영화를 먼저 보고 소개하는 것은 기본이고, 영화제를 위해 필요한 초청, 이벤트, 의전,극장, 운송 등 모든 면을 책임진다. 영화제를 찾는 게스트가 보람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고, 영화제 내부를 보자면 여러 스태프들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 역할도 해야 한다.

영화제의 존재 이유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영화를 온전히 창작자의 의도대로 받아들이는 데 극장만 한 곳은 없다. 또한 극장에서 영화를 같이 보는 것은 혼자 모니터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영화제는 기본적으로 극장에서 함께 영1.화를 보기 위해 만들어진 행사이고 그런 만큼 ‘함께 본다’에 방점이 찍힌다. 함께 보고, 함께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한 영화제는 존재할 것이다.

마음이 끌리는 영화 마음이 끌리는 영화에 공통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좋은 영화라면 저마다 다른 이유로 끌리는 지점이 생긴다. 다만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영화에 나온 ‘영화는 내가 지금껏 살지 못했던 시간을 살게 해준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좋은 영화는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선물을 준다.

영화라는 세계 안에서 좋아하는 세계에 살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영화를 좋아했고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1. 바히드 잘릴반드 <비욘드 더 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집에 경찰을 피해 도망친 여자가 숨어든다. 시종 긴장하며 보게 만드는 대단한 흡입력을 가진 영화다.

2. 구보타 나오 <천야일야>

등장인물은 모두 누군가를 잃거나 잃어가고 있다. 시간 앞에서 그들 중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천야일야>는 독창적 방식으로 시간의 비밀을 속삭이듯 알려주는 영화다.

3. 미야케 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청각 장애를 지닌 여성 권투 선수의 이야기. ‘Small, Slow but Steady’라는 영어 제목처럼 작고 느리지만 꾸준히 뭔가를 이뤄내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다.

4. 힐랄 바이다로프 <물고기를 향한 설교>

아제르바이잔 감독 힐랄바이다로프는 놀라운 비주얼의 영화를 만든다. 기름에 찌든 황폐한 땅을 비추는 것만으로 영화의 정서를 온전히 전달한다.

5. 알리 가비탄 <라이프&라이프>

온라인 수업에 빠진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해 어린 딸과 함께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는 여자 선생님의 이야기. 작고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

 

 

 

Asian Cinema 박선영 아시아 영화 (중화권·남아시아·중앙아시아 등)

올해의 흐름 특히 인도 영화가 강세를 보여서, 오픈 시네마 섹션과 두 개의 주요 경쟁 섹션 모두에 인도 영화가 두 편씩 선정되었다. 키르기스스탄 영화의 약진도 돋보여 이전에는 1~2년에 한 편 정도 선정됐는데 올해는 총 3편의 장단편영화가 선정된 점도 특징이다.

프로그래머의 일 프로그래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담당 지역의 영화들 중 우리 영화제의 성격에 맞는 영화들을 선정해 초청하는 것이다. 영화 초청 이후에는 감독과 배우 등의 게스트 초청을 협의하고, 이에 따르는 이벤트를 기획하며 초청한 영화의 홍보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영화제 기간 중에는 게스트 접대, 관객과의 대화(GV) 진행과 각종 이벤트 등을 진행한다.

영화제의 존재 이유 영화제는 평소 보기 어려운 영화들을 한자리에 모아 상영하는 축제의 장이다. 큰 화면과 수준 높은 음질의 사운드가 구비된 극장에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공감하면서 영화를 보는 극장 체험은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고 축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OTT가 대체할 수 없는 매력적인 경험이다. 또한 영화제는 영화와 관객, 감독과 관객을 이어주고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더불어 우리 영화제는 교육 프로그램(CHANEL BIFF Asian Film Academy)과 지원 프로그램(Asian Cinema Fund), 포럼과 마켓 등을 운영하면서, 영화 교육, 영화 담론, 영화 산업 분야의 각계각층 사람들이 모이고 토론하며 배우고, 또 영화를 사고팔 수 있는 다양한 무대와 기회를 마련한다. 온라인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영화제 기간에 일어난다.

마음이 끌리는 영화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해 말하는 영화. 영화적 재미가 뛰어난 영화들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다.

 

1.파드마쿠마르 나라시마무르티 <맥스와 민, 그리고 미야옹자키>

맥스와 맥스의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3대의 사랑과 화해를 다룬, 따뜻하고 코믹하고 사랑스러운 영화. 맥스와 그의 애인 민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좋아해 ‘미야옹자키’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가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주는 귀여운 매개체로 등장하는 점이 포인트다.

2. 샘 쿠아 <침묵의 장소>

말레이시아 샘 쿠아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자 뉴 커런츠 선정작. 큰 호평을 받은 <무죄가족>보다 먼저 연출한 작품이 <침묵의 장소>인데, 이 영화는 첫 연출작이라는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치밀하고도 대담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3. 로케쉬 카나가라즈 <비크람>

<비크람>은 인도판 <탑건>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탑건>과 <비크람> 모두 1986년에 첫 번째 영화가 제작되었고, 2022년 두 번째 영화가 나왔다는 점, 첫 번째 영화와 동일한 주인공을 캐스팅해 2022년에 2편을 만들었다는 점. 무엇보다 <탑건>의 톰 크루즈처럼, <비크람>의 카말 핫산도 여전히 톱스타라는 점이 중요하다. 엄청난 스펙터클과 장엄한 액션을 선보이며, 중간중간 카말 핫산이 직접 부른, 중독성 있는 노래와 군무(군중의 춤)가 곁들여진다.

4. 사임 사디크 <조이랜드>

올해 남아시아 영화 중 유일하게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조이랜드>는 파키스탄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공식 섹션에 초청된 영화다. 사임 사디크 감독의 데뷔작으로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인 파키스탄 사회에서 억압되고 짓눌린 각 등장인물들의 섹슈얼리티가 일으키는 긴장감이 어마어마하다.

5. 아이벡 다이르베코프 <쑥의 향기>

키르기스스탄의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10대 소년들의 감동적인 성장담. 성장영화가 으레 그러하듯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기는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는순간 숨겨진 보석같은 영화를 만났다는 뿌듯함이 밀려올 것이라 장담한다.

 

 

Asian Cinema 박성호 아시아 영화(동남아시아)

프로그래머의 일 영화를 선정하는 일. 하지만 좋은 영화를 선정하기 위해서는 어떤 영화가 기획, 제작되고 있는지 정보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여타 영화제보다 먼저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초청했을 때 수락받을 수 있도록 기반을 잘 갖춰놔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좁게는 영화제 전 직원, 넓게는 모든 영화인과 관객이 함께 할 때 가능한 일이다. 선정한 영화를 널리 알리고 잘 설명하는 것도 프로그래머의 역할이다. 특히 예술적인 영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영화는 이 영화를 필요로 할 수 있는 관객들에게 메시지가 오롯이 전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화 산업의 일환으로 영화인들을 지원하고 응원하는 모든 일 역시 프로그래머의 일상이다.

영화제의 존재 이유 극장 산업은 TV의 등장과 비디오 대여점의 흥망성쇠 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집에서도 맛있는 커피를 먹을 수 있지만 카페가 없어진다는 상상을 하기 힘든 것처럼. 그리고 영화제는 영화 산업의 정점에 있는 크레마 같은 존재다. 든든한 영화 산업이라는 기반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영화제는 작가와 관객을 스크린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에서 벗어나 실질적, 물리적, 직접적으로 만나게 한다. 감독과 배우등 영화인, 관객뿐만 아니라 언론인, 투자자, 관련 분야 전공 학생 등 수많은 사람을 한곳으로 불러 모은다. 그렇다고 영화제가 마냥 만남과 축제의 장소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좋은 영화제의 선정작은 상업성 위주로 구조화된 영화 배급망에서 영화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상기시켜주고 가까운 미래의 트렌드까지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제가 없는 영화계란 패션쇼 없는 패션 같은 것이 아닐까.

마음이 끌리는 영화 수백 편씩 보는 영화 중에 새로운 트렌드가 엿보일 때 우선 주목하게 된다. 최근 주목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영화의 트렌드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다. 아시아에는 여전히 낡은 검열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작자의 자유로운 표현 욕구가 분출되면서 아주 느리지만 서서히, 또는 놀랍도록 갑작스럽게 터부가 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1. 카밀라 안디니 <나나>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중 한 명인 인도네시아의 카밀라 안디니가 연출했다. 독립 직후 정치적 격변기에 휘말린 한 여성의 연대기를 그렸다. 피란길에 아버지와 남편을 모두 잃은 나나는 이후 재혼해 유복한 삶을 살지만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남편의 여자 친구로 나오는 모델 출신 배우 라우라 바수키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조연상을 수상했다.

2. M.L. 뿐드헤바놉 데와쿤 <6명의 등장인물>

캐스팅이 화려하다. 태국의 원빈이라 불리는 마리오 마우러를 비롯 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단순히 배우들의 외모만 뽐내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연기력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M.L. 뿐드헤바놉 데와쿤 감독의 노련미가 엿보인다. 이탈리아의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을 각색한 작품.

3. 호유항, 제나르 마에사 아유, 김태식 <룩앳미 터치미 키스미>

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젊은 남녀들은 어떻게 썸을 타고 사랑을 할까? 각각 배경과 인물은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해가는 재미를 주는 옴니버스영화다. 김태식 감독이 연출한 한국 파트에서는 모태 솔로 포크레인 기사와 키스방 매니저의 달콤 쌉싸름한 관계가 전개된다. 호유항 감독과 제나르 마에사 아유 감독이 연출한파트도 유머러스한 커플의 이야기가 따스한 시선으로 연출된다.

4. 허슈밍 <아줌마>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과는 어딘가 서먹한, 외로운 한 중년 여성에게 삶의 유일한 낙은 한국 드라마를 보고 어설프게 대사를 따라 하는 것. 그리고 드디어 처음으로 오게 된 한국에서 온갖 사건을 겪으며 자신을 재발견하게 된다. 우정과 사랑 중간쯤의 멋진 연기를 펼친 정동환 배우를 비롯해 강형석, 여진구 등 한국 배우들과 함께한 작품.

5. 데이비 추 <리턴 투 서울>

파괴적이고 매력적인 걸 크러시 캐릭터가 등장한다. 어린 시절 프랑스로 입양된 프레디가 우연히 서울로 오게 되는데 그 과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입양아 레퍼토리와는 사뭇 다르다. 오광록 배우가 연기한 아버지와의 긴장감 있는 관계 속에 이모를 연기한 김선영 배우의 어설픈 통역이 웃픈 감정을 잘 드러내준다.

 

 

World Cinema 박도신 월드 시네마(미국·캐나다·뉴질랜드)

프로그래머의 일 기술적으로 본다면 프로그래머는 영화제에서 상영할 작품 선정이 가장 큰 역할일 것이다. 1년에 봐야 하는 5백~6백 편의 영화 중 어떤 작품을 부산국제영화제 관객들에게 소개해야 하는지 정해야 하기에 작품 선정에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으로 작품이 좋아야 한다. 동시에 개인적 취향은 아니더라도 객관적으로 관객들이 공감할 만한 영화라고 판단되면 그 역시 선정 기준에 반영한다.

영화제의 존재 이유 지난 3년의 팬데믹 기간 동안 OTT 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극장에서 2~3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가격으로 2개의 OTT 서비스를, 수백 편의 콘텐츠를 가족, 친구와 함께 집에서 편안하게 볼 수 있다. 여러모로 극장 산업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극장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만든 영화가 여러 사람이 모인 공간인 극장에서 상영된다는 것은 흥행의 여부를 떠나 영화인들에게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영화제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영화를 만든 사람과 관객들이 소통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OTT 비중이 점점 더 커지는 현 상황에서 그런 시간을 마련한다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 작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가 OTT로 방영되는 드라마 시리즈를 상영하는 온 스크린 섹션을 마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마음이 끌리는 영화 개인적으로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그중에서도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신인 감독들의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이야말로 영화제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작품이기에 추천하고 싶다. 캐나다 교포 감독이자 배우인 앤소니 심 감독이 연출한 <라이스보이 슬립스>, 올해 아일랜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콤 베어리드 감독의 <말없는 소녀>, 그리고 올해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상영되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 등이 그렇다.

 

1.앤소니 심 <라이스보이 슬립스>

1990년대 캐나다로 이주한 젊은 어머니와 아들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캐나다에서 배우이자 감독으로 활동하는 앤소니 심의 두 번째 장편이다. 정이삭 감독 등 교포 영화인들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나리> 못지않은 연출력과 배우들의 헌신적인 연기가 돋보인다. 올해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첫선을 보였다.

2. 마틴 맥도나 <이니셰린의 밴시>

2017년 <쓰리 빌보드>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며 작품상을 거머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니셰린의 밴시>는 한 남자의 가슴 시린 고독을 기이한 사건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캐릭터를 중심으로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탄생시키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주인공 역을 맡은 콜린파렐의 연기는 내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로 회자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탄성을 자아낸다.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이 놀랍지 않은 이유다.

3. 데이빗 크로넨버그 <미래의 범죄들>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며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하는 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최신작이다. 비범함과 기괴함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정형화된 주류 영화가 식상한 관객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

4. 제임스 그레이 <아마겟돈 타임>

1980년대 뉴욕, 열두 살 폴이 학교에서 흑인 친구 존과 함께 마리화나를 접하게 된다. 평소 흑인 친구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그의 부모는 형이 다니는 사립학교로 폴을
강제로 편입시키게 되는데…. 미국 독립영화의 거장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앤소니 홉킨스, 앤 해서웨이 등이 명성에 걸맞은 연기력을 선보인 이 작품은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소개되어 10분에 가까운 기립 박수를 받았다.

5. 노아 바움백 <화이트 노이즈>

예기지 못한 사건을 계기로 평범한 한 남자와 그의 가정이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불안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노아 바움백의 열한 번째 장편이자 그가 직접 원작 시나리오를 쓰지 않은 첫 작품이다. 감독 특유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연출에 현실에 기인한 유머가 가미된 이 작품은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World Cinema 서승희 월드 시네마(서유럽·남유럽·아프리카)

올해의 흐름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프랑스 알랭 기로디 감독의 <노바디즈 히어로>와 이탈리아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스칼렛>두 편을 선정했다. 특히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은 첫 장편 <마틴 에덴>(2019)을 오픈 시네마로 초청할 만큼 애정이 깊은 감독이어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 상영작으로 선정한 감회가 남다르다. 두 감독 모두 부산에 직접 오셔서 관객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서유럽 영화는 여성 감독의 작품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리고 올해는 특히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기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서너 편의 필모그래피를 가진 감독들의 좋은 작품이 많이 눈에 띈다.

프로그래머의 일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와 본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영화를 적절히 배합해 프로그래밍 하는 역할이다. 축제에서 감독과 관객이 만나는 자리를 성사시키는 것도 프로그래머가 해야 할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영화제의 존재 이유 작년에 혼자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는데 코로나19 이후 처음 본격적으로 열린 영화제에서 거장 감독들이 관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모든 영화는 관객과 직접 만나 교감하고 호흡할 때 진정한 생명력을 얻는다. 영화제의 큰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이 끌리는 영화 필립 포콩 감독의 <아르키>. 프랑스와 알제리 양국에서 터부시해온 주제를 다룬다. 알제리 전쟁 기간 중 프랑스군에 입대해 참전한 알제리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르키’다. 영화는 바로 이 사람들을 조망한다. 심오한 주제를 미니멀한 기법으로 만든 훌륭한 영화다. 스페인 호나스 트루에바 감독의 <와서 직접 봐봐>는 젊은 지식인들의 불안과 본인의 자리를 찾을 때까지 겪는 어려움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스냅숏이다. 감독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도시와 시골, 디지털과 필름을 대비시키면서 작지만 큰 영화 한 편을 완성했다.

 

1.엠마누엘 무레 <어느 짧은 연애의 기록>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을 연출한 엠마누엘 무레 감독이 새로이 선보이는 러브 스토리다.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따라 깊어지는 연인의 사랑이 줄리엣 그레코의 샹송 ‘La Javanaise’의 선율과 어우러져 파리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때늦은 사랑에 아파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자 주인공의 고백 장면에서 눈물을 참지 못할 것이다.

2. 펠릭스 반 그뢰닝엔, 샤를로트 반더미르히 <여덟 개의 산>

유년기를 함께 보낸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다니엘 노르그렌의 슬픈 노래, <마틴 에덴>의 주인공이었던 루카 마리넬리와 브루노 역의 알레산드로 보르기의
뛰어난 연기, 산의 풍경 등이 어우러진 역작이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두 감독 모두 부산을 찾을 예정이다.

3. 엠마누엘 니코 <러브 달바>

올해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처음 소개돼 화제가 된 <러브 달바>는 여러 단편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엠마누엘 니코 감독의 도전적인 데뷔작이다. 아버지 때문에 정상적인 소년기를 박탈당한 열두 살 소녀 달바를 열연한 젤다 삼손의 연기가 돋보인다. 이용철 평론가의 평처럼 ‘소녀들이 툭하면 어른처럼 구는, 혹은 여성성이란 소재로 이들을 착취해온 기존 영화를 매섭게 폭로하는 작품’이다.

4. 미아 한센 로브 <어느 멋진 아침>

여덟 살 난 딸과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둔 산드라의 삶과 사랑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다. 짧은 커트 머리의 레아 세이두가 산드라 역을 맡아 열연한다.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어느 멋진 아침>은 미아 한센 로브를 거장 대열에 합류하게 만드는 작품이 될 것이다.

5. 다리오 아르젠토 <다크 글래시스>

이탈리아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는 반세기에 걸친 연출 경력을 자축하듯 본인에게 명성을 안겨준 장르 지알로로 다시 관객을 찾는다. <딥 레드>(1975), <서스페리아>(1977)의 신화를 일궈낸 호러 무비의 레전드답게 다양한 캐릭터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이미지를 환각의 색으로 물들이면서 관객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World Cinema 박가언 월드 시네마 (중남미·동유럽·북유럽)

프로그래머의 일 프로그래머는 기획자다. 화제작을 상영하고 스타를 모셔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산에서 상영하는 수백 편의 영화가 전부 화제작일 수는 없을 것
이며, 지금은 노바디라도 언젠가는 섬바디가 될지 모르는 게스트가 훨씬 많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객의 니즈를 기민하게 포착하고, 양질의 콘텐츠를 잘 포장해 관객 앞에 선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다.

영화제의 존재 이유 집에서 리모컨만 누르면 수백, 수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지금, 관객이 굳이 극장을 찾아주실까 하는 우울한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같은 상영관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감상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동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 최애 배우의 얼굴을 대형 스크린으로 보면 얼마나 짜릿하며, 나의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n회 차를 달리며 곱씹고 뜯어가며 보는 맛도 있지 않은가. 패스트 패션처럼 영화를 만들고 소비하는 행위도 점점 속도와 효율을 따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안타깝다. 영화제는 유튜브와 틱톡의 시대에 수집하고 싶은 바이닐 레코드를 찾아 헤매는 이들을 위한 곳이다.

마음이 끌리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처럼 “예뻐야 돼. 뭐든지 예쁜 게 좋아”를 모토로 삼고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널리 알려서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믿는
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고, 완결된 내러티브보다는 수많은 가능성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작품에 끌린다.

영화라는 세계 안에서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예술가들을 동경했지만 나에게는 예술 작품을 직접 만들어낼 만한 창의적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 주변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불행해진다는 말이 있다. 나는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있지도 않고, 내 마음에 쏙 드는 영화 1편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지 못한 영화 99편을 견뎌야 하고, 나의 취향이 관객의 취향과 동떨어져 있었음을 확인 사살 당하는 순간도 있다. 그렇지만 창작자들이 인고의 시간을 거쳐 완성한 작품을 누구보다 먼저 볼 수 있고, 평가하고 선별해 관객 앞에 선보일 수 있으며, 언어도 세대도 문화도 상이한 감독과 관객이 함께 흥분한 눈빛으로 열띤 대화를 나눌 때, 이 일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는다.

1. 기 다비디 <이노센스>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살상 행위는 정당화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총칼을 쥐게 된, 아이들의 순수가 파괴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들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려준다.

2. 줄리아 무라트 <룰 34>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황금표범상(대상) 수상작. 2021년에 <배드 럭 뱅잉>이 있었다면 2022년에는 <룰 34>가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개인의 욕망 추구 과정을 놀라운 연기력으로 설득한다.

3. 마리나 얼 고르바흐 <클론다이크>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8년 전,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 마을에서는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고, 멍청하게 싸우는 남자들 속에서만삭의 임신부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4. 안나 카제약 <빌어먹을 휘게>

아름다운 스칸디나비아의 풍광 속에서 가족과 단란하게 함께 보내려던 시간이 ‘빌어먹을’ 휴가가 되어버렸다. 인생의 성공 여부가 ‘결혼’과 ‘육아’로 귀결되는 환멸 어린 여자의 일생.

5. 아담 세들락 <뱅어. 띵곡이 필요해>

힙합 가수로 성공해 여자 친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띵곡’이 필요하다. 그런데 급전을 구하려니 다시 약물에 손대는 길밖에 방법이 없다. 아이폰으로 촬영한 프라하의 밤 풍경과 속도감 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Korean Cinema 정한석 한국 영화

올해의 흐름 올해 신설한 한국영화의 오늘_스페셜 프리미어 섹션을 가장 강조하고 싶다. 한국영화의 오늘_스페셜 프리미어 섹션은 대중적이고 매력적인 ‘미개봉 한국 주류 상업영화’를 소수 엄선해 프리미어로 상영하는 섹션으로 한국의 최신 대중영화이자 상업영화를 관객에게 널리 알리고자 신설했다. 올해는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 방우리 감독의 <20세기 소녀>를 소개한다. <소년들>은 따뜻하고, <20세기 소녀>는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올해 뉴 커런츠 섹션의 한국 작품 2편과 한국영화의 오늘_비전 섹션의 특징은 독창성과 다양성이다. 장르, 형식, 양식 등에서 다양한 특색을 지닌 작품들을 선정했다. <지옥만세> <괴인> <기행> <빅슬립> <너와 나> 등이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지난해에 신설돼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온 스크린 섹션에서는 한국 영화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2편에서 올해는 7편으로 확장되었다(전체적으로는 지난해 3편에서 올해 9편으로 늘어났다). 하반기 온라인 플랫폼에서 릴리즈될 예정인 중요한 오리지널 시리즈를 부산에서 먼저 만날 수 있다. 온 스크린 섹션이 지닌 상업적, 산업적 영향력이 일반 관객, 전문가, 영화업계에서 공히 인정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올해 한국영화의 오늘_파노라마 섹션은 뛰어난 독립예술영화를 먼저 선보이는 중요한 장이다.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 폐막작인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를 비롯해, <고속도로 가족> <드림 팰리스> <교토에서 온 편지> <오픈 더 도어>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등 뛰어난 독립예술영화를 프리미어로 상영한다.

마음이 끌리는 영화 좋아하는 것에 대해 왜 좋아하게 됐는지 대개는 잘 설명하지 못하지 않나. 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 영화는 창의성과 독창성이 발견되는 작품을 만나면 항상 끌리는 것 같다. 젠체하거나 시류에 휩쓸리는 영화들에는 끌리지 않는다. 최근 한국 신인 감독들의 작품은 이 점에서 매우 세련되고도 다양한 영화적 화법을 지닌 경우가 많다. 올해 뉴 커런츠에 선정된 한국 영화 2편과 한국영화의 오늘_비전 12편이 이런 장점을 잘 보여준다.

1.정지영 <소년들>

한국 영화의 거장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은 시골 소읍 슈퍼마켓의 강도 치사 사건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 세 소년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열혈 형사의 휴머니즘을 다룬 이야기다. 설경구, 유준상, 진경, 허성태, 염혜란이 열연한다.

2. 방우리 <20세기 소녀>

1999년 어느 소녀, 소년들의 싱그러운 사랑에 관한 영화다. 김유정 배우를 비롯해 변우석, 박정우, 노윤서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모두 사랑스럽고 귀엽다. 20세기 청춘에게는 향수를, 21세기 청춘에게는 설렘을 안긴다.

3. 이하람 <기행>

이하람 감독의 <기행>은 가난한 한 소년이 처녀 귀신을 따라 지옥 여행을 떠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무성영화에서 애니메이션 기법까지 유희적이면서도 기상천외한 시청각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4. 임오정 <지옥만세>

임오정 감독의 <지옥만세>는 자신들을 괴롭혔던 악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나선 두 친구의 모험을 발칙한 기획력과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솜씨 좋은 이야기꾼의 작품이다.

5. 이정홍 <괴인>

<괴인>은 목수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한 남자와 그의 주변 인물, 그리고 그들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사소한 미스터리 한 가지를 중심으로, 신기한 리듬과 짙은 잔상을 만들어낸 영화다.

 

 

 

Wide Angle 강소원 와이드 앵글(단편 극영화·다큐멘터리)

올해의 흐름 와이드 앵글 섹션은 매우 다양한 소재의 개성 있는 작품이 대거 출품되었다. 최근 몇 년간 이어져오던 여성 감독의 약진이 더욱 도드라진 해이기도 하다. 한국 다큐멘터리 경쟁에서는 여성 감독의 영화가 정확히 절반을 차지하고, 아시아 다큐멘터리 경쟁에서는 5편 중 4편의 영화가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또한 소재의 측면에서 굉장히 새롭고 다양한 영화가 많다. 간단히 한국 다큐멘터리의 소재를 일별하자면, 섭식 장애, 인공지능(AI), 사채업, 갯벌, 야생동물 보호 센터, 최면술, 최고령 제주 해녀, 70대 동성 커플, 6 25전쟁 당시 미군 공습 등 이제까지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흥미로운 소재를 다룬 영화가 대거 등장한다. 선정할 영화가 워낙 많아 쿼터도 어렵사리 늘렸다. 한국 다큐멘터리 경쟁과 쇼케이스 12편의 작품에 주목하기 바란다. 다큐멘터리 특별전도 준비돼 있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대담하고 창의적이며 모험적인 다큐멘터리 10편을 소개하는 ‘21세기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시선’이라는 특별전도 놓쳐서는 안 된다. 특별전과 관련해 왕빙, 리티 판, 베레나 파라벨, 루시엔 카스탱-테일러 등 현대 다큐멘터리 진영에서 선두에 서 있는 감독들이 부산을 찾아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마음이 끌리는 영화 다큐멘터리는 무엇보다 카메라를 든 이의 관점과 태도가 중요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주제나 소재, 촬영 대상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 어떤 시선으로 어떻게 접근하는가가 다큐멘터리의 핵심 요소 라고 본다. 그래서 요즘 사회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 중요한 인물을 다룬 영화보다는 세상의 시선 바깥에 있는, 매스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흥미를 덜 끄는, 그런 작고 사적인 영화들에 더 마음이 끌린다. 카메라를 든 이의 주관이 드러나는, 때로는 환상과 상상, 꿈과 기억까지 끌어안는 다큐멘터리가 요즘 내게는 흥미롭다.

1. 베레나 파라벨, 루시엔 카스탱-테일러 <인체해부도>

단언컨대 이번 영화제에서 놓치면 다시 못 볼 영화. 감독의 말대로, “모두가 지니고 있지만 누구도 보지 못한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인체해부도>는 제목에서 짐작되듯 병원 수술실로 카메라를 가져간다. 뇌와 척추, 혈관, 내장, 안구까지 인체의 표면과 내부로 거침없이 파고드는 카메라. 생을 위해 이토록 치명적인 육체의 해체 해부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 받을 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의 화제작.

2. 반박지은 <두 사람>

70대 동성 커플인 수현과 인선은 1980년대에 베를린에서 만나 반평생을 함께했다. 반박지은 감독이 두 사람의 사적인 삶과 사회활동을 친밀한 시선으로 다루었다. 사려 깊고 위트 넘치는 두 인물이 펼쳐내는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그들의 삶이 이미 하나의 증명이 된다.

3. 이동우 <사갈>

<사갈>의 주인공은 사채업자다. 우연찮게 연락이 닿은 그는 12년 전 이동우 감독과 영화과를 같이 다녔던 형이다. 그가 감독에게 자신을 찍으라 한다. 사채업자이자채무자인 그는 도박 중독자이기도 해서 진창 같은 삶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그를 찍은 이 영화는 조폭영화이자 블랙코미디, 때로는 로드 무비처럼 보인다. 다큐멘터리에서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가감 없이 포착한 유니크한 작품.

4. 엄소연 <LA 주류 가게의 아메리칸 드림>

<미나리>의 다큐멘터리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재미 한인 2세 감독이 그린 미국 이민자 가족의 삶이 경쾌하고 생생하게담겼다. 한국계 미국인인 엄소연 감독이 LA에서 주류 가게를 운영하는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찍었는데, 이 명랑 가족의 이민사는 어느새 1990년대 LA 폭동부터 2020년의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까지 아우른다.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하고 부산에서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5. 샤오추첸 <남쪽, 적막철도>

요약하자면 1992년에 개통해 대만 남부를 횡단하는 철도의 역사를 담은 작품인데, 이렇게 설명하는 것으로는 이 영화에 대한 호감을 전달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남쪽, 적막철도>는 대만 남부 끄트머리에 외로이 놓인 철도의 마지막 순간을 허우샤오시엔의 정서로 그려낸 수작이다. 오래된 철도의 움직임과 주변의 자연 풍광을 유려하게 담아낸 이 영화의 톤과 리듬에는 샤오추첸 감독의 깊은 애정과 향수가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