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우는 시간
김미경

재킷과 베스트 모두 아워레가시 (Our Legacy),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한 가지 후회가 되는 건

진작 그만둘걸.
그만두고 사랑하는
여자랑 애 둘,
개 한 마리,
고양이 두 마리,
금붕어 세 마리까지
키우면서 살걸.
그럴걸, 응?”

드라마 <힐러>, 기영재 役

 

니트 브이넥 톱 토템 (Toteme), 와이드 팬츠 메종마레 (Maison Marais), 이어링과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Q. 여성 캐릭터가 이전에 비해 다양해졌지만, 어떤 인물은 충분히 입체적으로 조명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석을 더하려 하나?
물론 작품 속 캐릭터의 영역을 지나치게 벗어나면 안 되지만, 배우가 하는 연기의 힘이 크다. 배우마다 맡은 인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결국 얼마나 정직하게 연기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를 흉내 내거나 어떤 ‘척’을 하면, 절대 진정성 있게 다가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해커 ‘조민자’ 역으로 출연한 드라마 <힐러> 속 ‘기영재’(오광록)의 장면을 선택했다. 영재는 사람 죽이는 일을 제외하면 무엇이든 하는 심부름꾼 ‘서정후’(지창욱)의 스승으로, 정체를 숨긴 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인물이다. <힐러>를 촬영하던 당시 오늘 고른 영재의 대사에 대해 ‘그래, 이런 삶이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본연의 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평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기 때문이다. 종영한 지 약 8년이 흐른 지금 떠올려봐도 좋은,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는 대사다.

1985년 연극 <한씨연대기>로 데뷔했다. 배우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 어떤 기분이 들었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 듯했다. 연극 무대에 서면 굉장히 자유로웠고, 난생처음 만나는 관객과 소통하며 공감하는 순간에는 전율을 느꼈다. 그때부터 연기는 해봄 직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수의 작품에 어머니 역할로 출연했다. 어머니를 연기할때 어떤 면에 중점을 두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어머니가 정형화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자녀를 위해 헌신하거나, 어딘가 무서운 면을 지니고 있는 식이다. 그런데 작품 속 어머니도 한 명의 사람이지 않나. 이 지점에 집중하며, 전형성을 벗어난 자연스러운 인간으로서 한 어머니를 표현하려 한다. 내가 연기한 어머니 중 <고백부부>의 ‘고은숙’, <또 오해영>의 ‘황덕이’, <하이바이, 마마!>의 ‘전은숙’ 등 본인의 서사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는 인물이 있다. 이런 어머니가 내 가슴에 더 깊이 남았다.

여성, 그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의 서사는 작품에 오롯이 담기지 않는 것 같다. 어머니는 자주 등장하지만, 대부분 누군가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각 어머니가 하는 말과 행동의 이유에 대해 아무리 고민하며 연기해도, 완성된 작품을 보면 어머니의 서사가 온전히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자체도 적어 아쉽다.

어머니 이외의 역할을 맡은 김미경 배우의 연기를 더 보고 싶다는 반응도 많다. 어머니보다는 <힐러>의 해커, <태왕사신기>의 대장장이 같은 역할이 나와 훨씬 더 비슷하다. 평소에도 스카이다이빙, 승마, 바이크 등 활동적인 취미를 즐기는 편이다. 내게 이런 면을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며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액션 연기가 필요한 캐릭터도 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제는 나이 들어 몸이 예전만큼 따라주지 않을 수는 있겠다.(웃음)

연기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모든 연기는 나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본에 적혀 있는 인물의 이름을 지우고 ‘김미경’이라 쓴다.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하더라?’ 하고 질문하며 내 안의 무언가를 끄집어내기 위해 애쓴다. ‘이렇게 해야만 해’라는 아집을 버리고,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나 자신을 비워나갔던 것 같다. 백기를 들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게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지향하는 마음가짐이다. 함부로 정의 내리거나 편견을 갖지 않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연기하며 살아온 30여 년의 시간 동안 젠더의 경계에 대해 체감한 변화가 있다면? 내 세대의 여성이 상당히 불리한 시대를 살았다면, 내 딸 또래의 여성은 보다 나아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건 여전히 평등하지 못한 현실을 증명한다고 본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도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나. 우리는 지금 완전한 평등을 향해 가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