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을 이해하며
장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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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질문이 무엇인지 아는 게 더 중요한 거야.
왜냐하면 틀린 문제엔
옳은 답을 낼 수가 없는 거거든.”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리학성 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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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경계를 허무는 배우나 작품 중 유달리 마음에 남는 존재가 있다면?
<노매드랜드> <쓰리 빌보드> <파고> 등에 출연한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모든 작품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존재한다. 그 점이 너무 멋지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이런 힘을 지닌 젊은 배우를 자주 만나게 된다. 김태리, 우정원, 전여빈, 이봉련 같은 멋있는 배우가 아주 많다. 세상을 향해 도전하고 자신의 소리를 주체적으로 내는데, 그 방식이 잔인하지도 날카롭지도 폭력적이지도 않다. 이들을 보면서 내일은 또 달라지겠지, 이렇게 10년이 지나면 또 달라지겠지 하고 기대하게 된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리학성’(최민식)의 대사를 선택했다. 고민이 아주 많았는데 결국 나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를 찾게 되었다. 지난 수년간 코로나19를 포함해 겪어 보지 못한 일이 워낙 많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로 인해 환경이나 생활 양상이 달라지면서 내가 답을 낼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불안감에 빨리 답을 찾으려 했다. 스스로를 옥죄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마음을 내려놓고, 이제는 다른 시각으로 보고 싶은 마음에 선택한 대사다. 틀린 문제에는 옳은 답이 나올 수 없다는 리학성의 말에서 ‘이미 잘못된 문제에 매달리지 말자. 그리고 이건 옳음을 찾아가면서 겪는 시행착오 중 하나라 여기자’ 하는 마음을 배웠다. 나에게 하는 말이지만, 사실 누군가에게도 필요한 말이지 않나 싶다.

리학성을 연기한 최민식 배우가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다른 표정과 화법으로 장면을 완성했다. 그래서 연기가 좋다. 정해진 답이 있어 똑같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연기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점이 재미있다. 나는 이 대사를 통해 ‘답을 내려고 욕심부리지 않고, 찾아가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고, 그래서 조금 더 위로와 용기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배우로서 어떤 인물이나 서사에 끌리는 편인가? 단숨에 훅 읽히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인생의 흐름이 보이는 이야기가 그렇다. 이런 작품을 접하면 내가 여기 어떤 힘을 보태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꼭 이끌어가는 형태가 아니더라도, 뒤에서 받쳐줄 수도 있고, 가만히 존재할 수도 있고, 나란히 걸어갈 수도 있으니까.

힘을 보탤 때, 그러니까 연기하는 순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마주하는 캐릭터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를 잘 관찰하려 한다. 독백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대사는 상대하는 캐릭터가 그간 해온 말에 대한, 누적된 행동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한다. 물론 내가 맡은 인물로서 가야 할 길도 있지만, 서로의 말에서 맥락을 잘 파악하면서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과정도 중요한 것 같다.

배우는 작품으로 세상을 배운다고 하지 않나. 배움의 관점에서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면? <시>도 그렇고, <밀양>도 그렇고. 이창동 감독님의 작품에 참여하면 늘 이전과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는 점이 굉장히 신기하다. 충격적이기도 하고, 좀 창피할 때도 있다.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나는 선한 말이라고 했는데 상대에게는 아닐 수 있고, 당장은 좋은 거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 보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운 셈이다. 그래서 감독님 작품을 볼 때마다 인생은 ‘이거야’라 단정할 수 없다고 느끼고, ‘이럴 수도 있구나, 그렇겠다’ 하고 여기게 된다. 이창동 감독님은 현장에서 디렉팅도 비슷한 맥락으로 하신다. ‘이렇게 해’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하며 배우 스스로 다른 생각을 하게끔 한다. 그래서 항상 어렵다.

그 배움을 통해 사람과 삶을 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것 같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착해진다.(웃음)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럴 수도 있지, 얼마나 힘들면 그랬을까 싶은 거다. 작품을 통해, 또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삶을 접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젠더 프리도 비슷한 의도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닐까 싶다. 성별의 경계 없이 누가 어떤 역을 맡아도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 아닌가. 결국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휴먼 프리로 가는.(웃음)

맞다.(웃음) 실제로 젠더 프리 프로젝트가 이어져온 지난 시간 동안 그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 30여 년간 연기하면서 젠더 프리를 체감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요즘은 현장에 가면 감독, 촬영감독 중에서도 여성들이 많아졌다. 이를 보면서 성별에 상관없이, 이 작품을 누가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하는 고민들도 ‘여자로서’라는 전제가 줄어들고, 이제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에 집중하게 된다. 아직 넘지 못할 선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역시 점점 무너질 거라고 본다.

배우로서 지금 소망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전히 드라마도 영화도 유행을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 분위기가 있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찾아보면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근사한 방식으로 만드는 이가 있고,그걸 연기해낼 배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시스템이 생기면 좋겠다. 배우로서도, 관객으로서도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더 많이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