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일. 우리가 바라는 새해 첫날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떤 바람결에도 구겨지지 않을 기백을 지닌 채, 빼꼼 고개를 내미는 희망을 찾아 한 해를 살아내기 위해. 여기 시작하는 마음을 충만하게 해줄 장소와 음악, 영화와 책을 모아보았다. 좋음으로 가득한 2025년의 첫날.

둥글게 춤추며 가자

기백이 필요하다. 종잇장처럼 쉽게 구겨지거나 펄럭이지 않는 마음 같은 것. 연말이면 목욕을 5시간쯤 한 사람의 손처럼 쪼그라든다. 아무것도 해낸 게 없네… 이 말만 되뇌는 거다. 하지만 해는 뜨고 바깥은 따스해질 것임을 안다. 게다가 무지 아름답겠지. 무언가를 직면해야 할 때, 흐린 눈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순간이면 니체의 문장을 떠올린다. “아, 나의 영혼이여. 나는 그대에게 오늘이라는 말을 할 때 마치 앞으로와 이전에를 말하듯 하라고 가르쳤으며 모든 여기와 거기 그리고 저기를 넘어 둥글게 춤추며 가라고 가르쳤다.” 오늘은 어제, 내일과의 싸움에서 지기 십상이고, 홀로 쪼그려 앉아 있는 시간은 누군가와 손잡고 춤추려는 마음을 쉬이 눌러버리지만, 2025년에는 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둥글게 춤추며 갈 수 있길. 그리하여 또다시 오늘이다.

낙산사

어릴 적 내게 1월 1일은 한 해 중 가장 특별한 날이었다. 취미로 사진을 찍던 아빠의 손을 잡고 매년 일출 명소에 가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아빠 옆에서 작은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흉내나 낼 뿐이고, 새벽녘에 눈을 뜨기란 쉽지 않았지만, 아빠와 함께하는 1월 1일이라면 금세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스치고 어둑어둑했던 사위가 조금씩 밝아질 때, 태양이 머리를 빼꼼 내밀다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다 드러내는 순간이면 진정 새해임을 실감했다. 특히 양양에 위치한 낙산사에 갔던 날이 떠오른다. 고즈넉한 사찰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떠오를 해를 기다리는 게 좋았다. 하지만 날이 흐려 아무리 기다려도 해가 보이지 않았고, 포기하고 내려가던 중에 바다 위에 떠오른 동그란 태양을 보았다. 사실 다른 무엇보다 신나서 셔터를 누르던 아빠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터덜터덜 내려가던 아빠의 얼굴에 화색이 돌던 순간이. 그때 나는 타오르는 해 대신 아빠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최근 통화 내역을 보니 아빠에게 전화를 건 지 오래다. 2025년에는 효도해야지, 꼭.

add 강원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HALEY HEYNDERICKX ‘OOM SHA LA LA’

‘둥글게 춤추며 가자’는 다짐을 위해 새해 첫날에는 춤출 수 있는 노래를 들으려 한다. 몽롱한 사이키델릭 기타 사운드 위로 헤일리 헨드릭스가 주문을 외듯 ‘움 샤라라 움움 샤라라’라고 나른하게 내뱉을 때면 한 해 소원이 다 이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살랑살랑 춤춰야 할 것 같은 노래가 이어지다 점점 감정이 고조되더니 헤일리 헨드릭스는 갑자기 ‘정원을 가꿔야 해!(I need to start a garden!)’라고 울부짖는다. 그때 마음이 씻기는 듯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삶이 무료하고 따분하다고, ‘내 인생은 본질적으로 코미디’라고 자조하던 그가 소리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춤추다 울부짖는 마음을 어슴푸레 알고 있어서, 자꾸만 찾아 듣는 노래다.

마다밀

계절이 그리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감각하는 것도 한 해를 잘 살아내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3백65일이라는 긴 시간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주변을 놓치기 쉽지만, 순간순간 계절의 맛을 알려주는 요리가 있다면 더욱 생기 있게 지금을 살아낼 수 있다. 후암동에서 시작해 최근 용산으로 자리를 옮긴 ‘마다밀’은 제철 식재료로 만든 정갈한 브런치를 내어주는 곳이다. 사철마다 메뉴를 달리해 우리가 몸담은 계절을 오롯이 느끼게 한다. 올 겨울에는 ‘굴 가리비 크림 스튜’나 ‘딸기 리코타 샐러드’ 등을 선보인다. 새해에는 스스로를 잘 챙기고 주변을 돌아보며 생동하는 계절을 감각할 수 있길. 새해 첫날 마다밀에서 내어주는 산뜻하고 다정한 한 끼를 먹으면, 그 소망을 위한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add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7길 30-10 1층 instagram @madameal_

피크닉 <우에다 쇼지 모래극장>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한강의 소설 <흰>에 수록된 문장이다. 새해에는 흰 것을 보고 싶다. 아주 하얗고 무결하며 순수한 것을. 그래서 피크닉으로 향해 전시 <우에다 쇼지 모래극장>을 보려 한다. 우에다 쇼지는 일본의 소박한 시골 지역인 돗토리현에서 평생토록 사진을 찍었다. 일본 사진계의 거장으로 평가받으면서도 특정한 사조를 따르거나 분파에 속하지 않은 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 ‘우에다조(우에다 스타일)’라는 고유명사까지 생겨났다. 특히 그가 70년 가까이 셔터를 눌렀던 장소인, 거대한 모래언덕에서 찍은 초현실적 사진을 오래 감상하고 싶다. 우에다 쇼지의 사진은 시공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모든 가능성을 품은 흰색처럼, 내가 찍는 사진 안에 서는 상상하는 것이 전부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무한한 캔버스를 닮은 그의 작품을 보며 미지의 한 해를 개척할 긍지를 얻고 싶다. 전시는 2025년 3월 2일까지 피크닉에서 열린다.

add 서울시 중구 퇴계로6가길 30

투스키

‘여유’의 정의를 찾아보니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라고 한다. 새해에는 부디 이런 마음을 갖길 바라며 ‘투스키’로 향할 것이다. 해방촌의 언덕 자락에 위치한 투스키는 ‘모든 것’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Tout Ce Qui’로 이 이름을 지은, 프랑스인 주인장이 운영하는 레코드 숍이자 카페, 내추럴 와인 바다. 커다란 통창으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디스코, 하우스, 재즈, 록, 소울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선곡한 노래를 들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날이 좋다면 야외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오렌지 내추럴 와인을 마시는 것도 좋겠다. 주인장 특유의 여유가 공간에 배어 있기 때문인지, 해방촌의 분위기 덕분인지,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홀가분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다.

add 서울시 용산구 소월로20길 55 1동 1층 instagram @touski

아도

저녁을 먹으며 가볍게 반주를 한 뒤 2차로 차를 마시면 좋겠다. 문래동에 위치한 ‘아도’는 밤 12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찻집이다. 차에도 카페인이 있어 늦은 밤 많이 마시면 잠들기 어려울 수 있지만, 다과를 곁들여 한 잔 정도 마신다면 괜찮을 것이다. 아도를 찾고 싶은 이유는 예약 후 이용 가능한 아늑한 다락방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차를 내려 마시며 다가올 1년을 어떻게 보낼지 이야기 나누고 싶다. 2025년의 계획에 나와 당신이 함께 있길 바란다는 말이다. 최근 압구정동에도 지점을 냈다고 하니 조만간 이곳에도 가봐야겠다.

add 서울시 영등포구 도림로125길 16 1층 instagram @a.do.official

최재원 <백합의 지옥>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로 최재원 시인이 문단에 등장했을 때, 그의 기백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일상 속에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종이 위로 스스로를 밀고 나가 그 자체로 시가 된 사람 같았다. 두 번째 시집 <백합의 지옥>이 나왔을 때는 4백23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에, 시 속에서 언어들이 엉키고 뒤집히고 충돌하며 뿜어내는 에너지에 압도당했다. 삶에서 말을 발견 하고 또 글로 쓰며 시인이 보냈을 시간을 생각하면 아득해졌다. 새해 첫날에는 <백합의 지옥>에 수록된, 한 편이 무려 1백58쪽에 달하는 시, ‘목련은 죽음의 꽃’을 읽으려 한다. 5편의 시가 한데 모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거대한 공연장에서 여러 명의 배우가 동시에 말을 건네는, 일종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삶과 죽음 그리고 상실이 무수히 반복되는 인생이라는 여정에 대해 고뇌하는 시라고 표현하고 싶다. 하나의 질문을 붙들고 끝까지 돌진하는 의지, 언어의 거대한 힘에 무력해지지 않은 채 멈추지 않고 쓰는 마음을 <백합의 지옥>을 읽으며 얻고 싶다.

러셀 리저브 15년

흔히 위스키를 느림의 미학이 담긴 술이라 말한다. 오크 통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야 깊은 향과 풍미가 우러나기 때문이다. 위스키를 음미하기 위해 미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 그 술이 지나온 시간뿐만 아니라 내가 마주한 순간 또한 온전히 감각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오래도록 나의 훌륭한 데일리 위스키로 자리매김해온 ‘러셀 리저브 10년’보다 오래 숙성된, ‘러셀 리저브 15년’이 최근 한정판으로 출시되었다. 버번위스키임에도 마치 간장처럼 짙은 색을 띠고 있어 그 자체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잘 익은 과일 향을 풍기다가 진득한 바닐라 맛이 가득 피어오르고, 토치로 구운 흑설탕 같은 달콤함이 오래 이어지며 마무리된다. 버번위스키의 정수라 할 수 있을 법한, 러셀 리저브 15년과 함께 2025년을 느리게 시작한다면 좋겠다.

이수명 <내가 없는 쓰기> <정적과 소음>

텍스트에 파묻혀 있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건 무거운 일상과 자의식에서 도망쳐 아름다운 문장 안에서만 살길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이수명 시인의 산문집 <내가 없는 쓰기> <정적과 소음>은 매우 소중하다. 시인은 ‘아무것도 아닌 글을 쓰고 싶은’ 욕구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문학화시킬 필요가 없는 평평한 순간들, 어떠한 의미도 들어서지 않는 평이한 순간을 유지하려는 시도라고 말이다. 2편의 산문집은 <내가 없는 쓰 기>라는 제목처럼 ‘나’의 바깥에 시선을 둔다. 소파, 수건, 물병, 지붕 등 일상적이고 사소한 세계를 가만히 응시한다. 의미를 부여하거나 감정을 의탁하지 않은 채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그 숭고한 태도가 이 두 권의 책에 담겨 있다. 오래도록 시와 시론, 산문을 넘나들며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지속해온 이수명 시인이 포착한 순간을 따라가다 보면, 더욱 가볍고 희미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와 저기를 넘어, 글 안에서 더욱 둥글어지길 바라며 새해에는 이수명의 산문을 읽어야겠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일출의 잔상 때문인지 새해 첫날에는 활활 타오르는 무언가를 보고 싶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상 시인이라 불리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은 주인공 ‘알렉산더’가 사랑하는 가족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기도하며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성냥으로 흰 천에 불을 붙이고, 집이 활활 타오르다 무너지는 모습 을 9분 가까운 롱테이크로 담아내는데, 이때 장 뤽 고다르가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한 것처럼 ‘기적으로서의 영화 체험’이 가능해진다. 알렉산더가 자신의 믿음 아래에서 집을 태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생을 생답게 살아가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기도하는 마음, 무언가를 믿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야말로(그 믿음이 무엇이든) 우리가 허무와 무의미를 넘어 ‘지금’에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하는, 숭고한 영화다. 최근 4K로 리마스터링해 재개봉했으니, 불의 현현을 선명히 들여다보며 한 해를 맞이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