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이 계절마다 마리끌레르는 젠더프리의 문을 열어왔다. 단단한 편견에 균열을 내기 위해, 굳건한 규정을 탈피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8인의 여성 배우가 올해 여덟 번째 젠더프리 필름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보다 자유로운 형태로 나아가는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당신 실패하지 않았어. 나도 지방대 나와서 취직하기 되게 힘들었거든.
그런데 합격하고 입사하고 나서 보니까 말이야,
성공이 아니라 그냥 문을 하나 연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드라마 <미생> 김동식 役

코트 Kelly Shin.
수트 셋업 Kelly Shin,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혜은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나 싶어요.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거 자체가 최소한 제게는 진부한 일인 거죠.” 더 이상 나누지도 규정하지도 말자, 좀 촌스러우니까. 에두르는 법 없이 시원하고 진취적인 김혜은 배우의 마인드는 그가 택한 드라마 <미생> 속 김동식 대리의 말로도 연결되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니까 성공과 실패를 명확하게 규정을 지어놓는 거 자체가 되게 촌스럽다 싶어요. 그냥 통틀어 우리의 삶인 거지. 직장에서 잘려도 다른 일 하면 되는 거고,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면 되는 거예요. 김 대리의 말처럼 다가오는 현실을 마주하고 문을 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삶인 거지, 성공과 실패는 우리의 몫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움을 가졌던 것이 성공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요. 그건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삶 앞에 제목을 미리 달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성별도, 우리의 삶도 규정하지 말자는 그의 말을 규정하고 싶어졌다. 이토록 예리한 통찰을 얻기까지 어떤 경험을 지나온 걸까.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던 걸까. “깨달음은 무슨 깨달음. 그냥 한 거지.(웃음) 그런데 나는 그냥 하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연기도 그래요. 이렇게 치열하고 어려운 건지 알았으면 못 했을 거예요.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배우 인지 뭔지 이런 거 생각 하나도 안 하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생각하고 뛰어든 거죠. 내가 궁금해서요. 그러다 보니 나도 이해하고, 남도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연기에서 혹은 작품으로 ‘자유로움’을 느끼는 순간뿐이다. “내가 생각한 대로 연기가 되면 좋겠다. 정말 자유롭게 연기를 하고, 이래서 연기하지 하는 기쁨을 계속 맛보고 싶은 게 꿈이거든요. 어떤 때는 작품이 갈망을 채워줄 때가 있어요. 드라마 <밀회>를 할 때 정말 앓을 정도로 좋았어요. 이 작품을 만난 게 행운이다 싶었고요.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니 인생에 서너 작품은 있다고 하더라고요. 언제 또 나타나려나, 기다리면서 계속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