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에서 배우 강태오가 확실히 믿는 것. 그 믿음으로 천천히, 또 꾸준히 써나갈 한 편의 이야기.



오늘 화보에서는 차갑고 정적인 분위기에서 강태오 배우의 새로운 면면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처음 시도해보는 컨셉트라 기대돼요. 차분하고 무게감 있는. 요즘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자기 중심이 확고한 사람들을 보면 멋있더라고요. 그, 왜 대류 현상이라고 하죠?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공기가 만나면 찬 공기가 아래로 차분하게 가라앉잖아요. 저도 전역하고 그런 찬 공기 같은 사람이 되어보려고 한동안 열심히 노력했거든요. 그때는 다들 ‘아이 캔 두 잇’ 모드에 빠지기 때문에.(웃음) 아이 캔 두 잇 모드.(웃음) 오래가던가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계획한 바를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고. 그런데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더라고요. 딱 한 달 갔습니다.(웃음)
한 달이면 선방했네요.(웃음) 공백기 이후 첫 작품인 드라마 <감자연구소>가 곧 공개되죠. 요즘 기분은 어때요?
3년만의 복귀작이라 설레는 마음이 가장 커요. 본업으로 돌아와서 다시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간다는 생각에 기대되면서도, 오랜 시간 저를 기다려준 팬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어요. 무척 떨려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후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죠. 여러 선택지 중에서 <감자연구소>를 택한 이유가 있다면요?
전역을 반년 정도 앞두었을 때부터 틈틈이 여러 대본을 읽어봤어요. 군대에서 조교로 복무하면서 훈련병을 교육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개인 시간이 많지 않아 당직 근무를 설 때 밤을 새워가며 읽었거든요. 그중에서 유일하게 제 졸음을 깨워준 작품이 <감자연구소>예요. 제가 대본 읽는 속도가 더딘 편인데, 재미있는 웹툰 보듯이 단숨에 읽어내려갔어요. 또 전작의 캐릭터와 색깔이 확연히 달라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고요.
‘소백호’는 어떤 캐릭터인가요? 소개 글에는 ‘냉철하고 차가운 원칙주의자’라고 적혀 있던데, 얼마 전 공개된 트레일러에서는 코믹한 면도 보이더라고요.
백호는 고집이 세고 본인만의 기준이 확실한 캐릭터예요. 빈틈없이 논리적으로 말해서 상대방 할 말 없게 만드는 사람 있잖아요. 겉으로는 차갑고 인간미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여운 반전 매력이 있는 캐릭터예요.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에 코미디 요소가 많은데, 백호 자체는 아주 진지한 성격이지만 상황이 웃겨서 재미있는 장면이 많아요.
연기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고민한 부분은 무엇이었어요?
백호가 자신과 결이 상당히 다른 ‘미경’(이선빈)을 만나 변화하는 과정이 중요한 포인트예요. 백호처럼 냉철하고 원칙주의적인 인물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과정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죠. 어느 순간 갑자기 달라지는 게 아니라 점점 스며들 듯 변해가는 모습이 담겼으면 했거든요. 보시는 분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장면마다 감정의 강도를 조절하는 게 중요했어요.
결국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카메라가 켜지면 최대한 그 순간이 진짜라고 믿어요.
스스로 납득하려 노력하는 거죠.
<런온>의 ‘영화’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준호’ 등 이전 작품에서 연기한 인물들에 비하면, 백호는 강태오 배우의 실제 성격과 거리가 먼 캐릭터일 것 같아요.
제게도 저만의 기준과 원칙이 있습니다. 고집도 있고 냉철한 면도 있어요.(웃음)
그런 면이 없다는 게 아니라요.(웃음) 인물의 다정하거나 해맑은 면이 배우 본연의 모습에서 묻어나는 것 아닐까 싶었거든요. 스스로 그렇게 느끼기도 하나요?
다정한 면이 많은 것 같기는 해요. 친구들에게는 장난기 많은 편이고요. 인터뷰 때마다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 항상 잘 모르겠다고 답해요. 때론 소심하고 생각이 많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한없이 단순하기도 하니까. 저라는 사람의 캐릭터를 몇 가지 단어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 같아요.
인물을 이해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 편인가요? 인물에 자신이 가진 면을 투영해보기도 하는지 궁금해요.
저와 연관 지어 이해하기보다는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편이에요. <감자연구소>에서도 시놉시스에 지금까지 백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상처가 있는지 과거사가 쭉 정리되어 있거든요. 그걸 보면서 흰색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인물에 대한 대략적인 상을 만들어갔어요.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니 대사는 일정한 톤으로 뱉고, 걸을 때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걸어야겠다. 이런 식으로 말투와 자세를 하나씩 만들어갔죠.
그렇게 이해한 내용을 토대로 연기에 임할 때는 어때요? 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편인가요, 즉흥에 기대는 편인가요?
세세한 행동 하나하나를 미리 계획해두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계획을 세워도 금방 잊어버려서.(웃음) 앞서 말한 큰 그림을 인지한 상태로, 어떤 느낌만 가지고 연기하는 것 같아요. 감독님이나 동료 배우들의 피드백을 유심히 듣는 편이라 열어둔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가요.
연기할 때 인물이 속해 있는 특정 상황을, 그 세계를 진짜인 것처럼 믿으려 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 같나요?
연기란 게 결국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잖아요. 아무리 비현실적인 상황이라도 실제처럼 받아들여야 감정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더라고요. 그래서 카메라가 켜지면 최대한 그 순간이 진짜라고 믿어요. 스스로 납득하려 노력하는 거죠.
긴 시간 연기하면서 얻은 깨달음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는 다른 배우들과 경쟁해서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그런데 제 연기를 봐주시는 분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책임감은 항상 있어요. 저는 연기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잖아요. 우리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에게 무언가를 믿고 맡기듯이, 적어도 연기에서는 믿고 볼 수 있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실망할 걸 아니까 열심히 노력하고요.
끝을 어떻게 잘 매듭지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어요.
천천히 시대의 흐름에 맞춰갈 수 있다면 좋겠죠.
그러려면 지금 후회 없이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군 복무 시기를 제외하면 지난 10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작품에 임했어요. 이토록 꾸준히 새로운 작품과 인물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요?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늘 있어요. 작품을 마치고 나면 당연히 지치고 쉬고 싶은데, 한 달도 안 돼서 다시 촬영장에 가고 싶어지더라고요. 또 이런 즐거움도 있어요. 해마다 성장하는 모습이 작품에 모두 기록되는 거잖아요. 예전 제 모습을 들여다보는 건 분명 민망한 일이지만(웃음) 그렇게 차곡차곡 흔적을 쌓아나가는 기분이 참 좋고,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나게 될지도 기대돼요. 그 사이사이에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 있으면 뿌듯하기도 하고요.
30대에 접어들고 자주 하게 되는 고민도 있나요?
언제쯤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요. 같은 일을 10년 이상 했으니 나름대로 긴 시간을 버틴 거잖아요. 이 정도 연차가 쌓이면 주변에서 어떤 노련함이라든가 노하우 같은 걸 기대할 것 같은데, 저 스스로는 아직 모르는 것도 부족한 점도 많은 사람이라고 느끼거든요. 여전히 슛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확신이 없을 때가 있고, 아주 열심히 준비한 장면인데도 온전히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사실 현장에서 괜히 프로인 척, 여유로운 척 행동한 적도 몇 번 있어요. 속으로는 ‘여기서 실수하면 어쩌지, 나도 무서운데’ 이런 생각 하면서.(웃음)
그럴 땐 어떻게 해요?
가끔은 ‘몰라, 잘되겠지’ 하는 마인드로 임해요. 그러다 보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때도 있더라고요. 중요한 장면을 앞두고 전날 밤에 생각이 많아지면, 이제는 그냥 저를 믿고 한숨 자요. 그 전까지 최선을 다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믿는 거죠. ‘할 수 있잖아, 태오야. 보여줘’ 하면서.(웃음)
다시 아이 캔 두 잇 모드로.(웃음) 불안을 다루는 법을 터득한 거네요. 혹은 자신을 더 잘 믿게 됐거나.
더는 도망갈 곳이 없을 때 쓰는 최후의 수단에 가까워요. 나를 믿는 건. 늘 걱정이 앞서는 편이라 스스로에게 엄격한 게 더 익숙해요. 시작부터 저를 믿어버리면 애초에 노력을 안 하지 않을까요? 그 대신 과정에 대한 확신은 있어요. 촬영이 끝나면 항상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는데, 후회는 안 해요.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제가 아니까. 현장에서 잠깐 창피하고 아쉽더라도 이번에 배운 걸 다음에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넘겨버려요.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지, 내일을 준비하자. 이렇게 긍정적인 사고 회로를 만들어두는 거죠.
건강한 방식이네요. 강태오의 연기 인생을 한 편의 이야기에 비유한다면 지금은 어디쯤에 와 있는 것 같아요?
기승전결로 설명하자면 ‘기’에서 ‘승’으로 넘어가기 전 어디쯤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깃’?(웃음) 아직 한창 시작하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그 뒷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가기 위해 배우로서의 인생 그래프를 전략적으로 그려보는 중입니다.(웃음) 계속 수정해나가고 있고요.
그 그래프는 어떤 형태를 띠고 있나요? 가파른 상승 곡선일지.(웃음)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나아갔으면 하죠. 우상향으로. 그런데 실제로 그리는 건 경사가 완만한 그래프예요. 천천히, 꾸준히 올라가는.
가파르게 오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오히려 지금은 올라가는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내려가는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어요. 저는 뭐든지 내려오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이야기든 끝맺는 순간이 있는 것처럼요. 물론 지금은 한 계단씩 천천히 밟고 올라가는 과정에 있고, 지금 있는 곳이 고점인지 저점인지, 정확히 어디쯤 와 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 끝을 어떻게 잘 매듭지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어요. 천천히 시대의 흐름에 맞춰갈 수 있다면 좋겠죠. 그러려면 지금 후회 없이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