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계절을 살다 가는 벌처럼, 인간의 삶도 멀리서 보면 짧은 계절과 같지 않을까. 그래서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생생하게 기록하고, 또 기념하고 싶다.” 슬로바키아 작가 안드레이 두브라브스키(Andrej Dúbravský)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보내는 헌사.

아시아 첫 개인전을 축하한다. 처음 전시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솔직히 말해 섭외 메일을 받고 굉장히 놀랐다. 대체 나를 어떻게 찾은 건가 싶었다.(웃음) 평소 스킨케어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뷰티 산업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고, 이곳에서 열리는 대규모 아트 페어에도 주목해왔다. 이번 기회에 한국의 역동적인 예술 현장을 직접 경험할 수 있어 기쁘다.
슬로바키아의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작업한다고 들었다. 그곳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
10년 전쯤 슬로바키아 남부 농촌 지역에 집을 마련한 뒤부터 매년 여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정원에서의 하루는 몹시 분주하다. 각종 채소와 꽃에 물을 주고, 동물들을 돌보면서 그림도 그린다. 대부분의 작업을 야외에서 하다 보니 여름 내내 기후변화의 영향력을 피부로 느낀다. 낮 동안에는 더위를 피해 있다가 해가 지면 네다섯 시간 동안 집중해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할 정도다. 작업할 때는 대형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닭과 고양이가 그 위를 거닐게 하면서 자유롭게 그린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곳곳에 닭의 분비물이나 비료 가루, 내 반려견 ‘슐레츠’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거다.(웃음)
작품 전반에서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정원을 직접 가꾸면서 마주하는 자연에서 어떤 영감을 얻나?
어릴 때부터 자연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한때 자연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유일하게 오래 집중할 수 있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결국 화가의 길을 택했다.(웃음)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곤충과 식물들을 관찰하다 보면 마치 사파리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만개한 꽃들, 꽃 위를 날아다니는 벌들, 잔디 사이사이 숨어 있는 벌레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생명력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는다.
당신에게는 ‘나자(Nadja)’라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고 들었다. 나자에 대해 더 이야기해달라.(웃음)
나자는 어린 시절 내게 큰 영향을 준 외할머니를 바탕으로 만든 여성 분신이다. 그는 주로 정원에서 활동하는데, 나와 맡은 역할이 확연히 다르다. 나는 곤충들이 찾아오도록 꽃을 가꾸지만, 나자는 오직 채소만 기른다. 그는 생활력이 강한 여자라 먹지 못하는 식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웃음) 사소한 일에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낸다는 점도 나와 다르다. 내가 갖지 못한 면을 모두 지닌 존재라고 보면 된다.(웃음)
이번 전시는 여름의 정취를 담은 작품이 주를 이룬다. 실제로 작가가 보낸 여름의 경험이 반영된 것인가?
그렇다. 최근 우리 마을에 새로운 인공 호수가 생겼다. 자갈 채취장이던 곳을 공공 호수로 개방한 것인데, 슬로바키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라 온 마을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록 로맨틱한 지중해 해변 같은 곳은 아니지만(웃음), 아이들과 할아버지들이 나란히 누워 수영을 즐기는 편안한 공간이다. 평소 정원에서 닭과 고양이하고만 지내던 내게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어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지난여름에 매일 호수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번 전시는 그때 마주한 풍경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호수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무엇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나?.
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몸과 그 몸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관심이 많다. 물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가장 인간다운 순간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옷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고 신체의 결점을 가려주지만, 모두가 살을 드러내놓고 나른하게 누워 있는 이 호수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백만장자든 텃밭을 가꾸는 농부든, 물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하게 자유롭고 행복할 뿐이다.
전시 제목 <두 여름의 폭풍 사이 지역 철학자(Local Philosopher Between Two Summer Storms)>에는 어떤 의미를 담았나?
호수 근처에는 언제나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앉아 있다. 그분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불쑥 말을 걸거나, 어린아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담은 조언을 건넨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말이다.(웃음) 그런 할아버지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리게 됐고, 장난스럽게 ‘지역 철학자’라고 부르게 됐다. 한편 ‘두 여름의 폭풍 사이’라는 표현에는 최근 사회를 바라보며 느낀 개인적 감정을 담았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지금 대규모 시위를 비롯해 불안한 사건이 계속되고 있고, 이 시기가 지나면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뙤약볕 아래에서 여름을 즐기고 있다. 여유로운 태도로 마치 두 개의 거대한 폭풍 사이를 지나고 있는 듯해 그런 분위기를 전시 제목에 담고 싶었다.
내 작품이 ‘아름답게’ 느껴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내길 기대한다.
벌과 애벌레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지,
꽃가루를 옮기는 작은 생명들이
생태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120×100cm, 2025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벽면 전체에 여러 작품이 콜라주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전시 배치에는 어떤 의미를 담고자 했나?
콜라주 형식으로 설치한 작품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제작한 것들이다. 하나의 거대한 아카이브처럼 시간과 주제가 충돌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일부는 10년도 더 된 작품이고, 올해 초에 완성한 신작들도 포함되어 있어 시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서로 교차하고 부딪치는 느낌을 준다. 슬로바키아의 중세 교회에서는 프레스코 벽화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를 보고 있으면 성경에 담긴 여러 이야기가 한 공간 안에서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런 효과를 기대했다. 하나의 작품이 단일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품이 중첩되면서 더욱 풍부한 해석을 만들어내기를 바랐다.
작품에 ‘벌’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벌을 그리기 시작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
2021년 겨울부터 벌을 그리기 시작했다. 팬데믹으로 2년 넘게 집에 머물면서, 봄과 여름이면 꽃 주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벌들이 그리워지곤 했다. 그 감정을 담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자연스럽게 작업의 한 축이 되었다. 이 과정 자체가 내게는 치유의 경험이었다. 현대미술가라면 사회적으로 중요한 주제나 거시적 화두를 다뤄야 한다는 압박이 있지 않나. 한때는 벌이나 무당벌레, 애벌레 같은 작은 생명체들을 조명하는 내 작업이 너무 사소하고 가벼워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그려나가면서 오히려 이 작업이 생태계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하나의 장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정물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을 주로 그려왔다. 그들의 어떤 특성이 당신을 그리고 싶게 만드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에 관심이 간다. 정물이나 건축물을 탁월하게 담아내는 아티스트들을 존경하지만, 직접 시도해보니 내겐 영 맞지 않았다.(웃음) 그보다는 일렁이는 물의 표면이나, 빛에 따라 색과 질감이 변하는 피부 같은 것들을 볼 때 아름답다 느끼고, 그 순간 그리고 싶다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또한 살아 있는 존재들은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벌과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한 계절을 살다 가는 벌처럼, 인간의 삶도 멀리서 보면 짧은 계절과 같지 않을까. 그래서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생생하게 기록하고, 또 기념하고 싶다.
성장기의 소년이나 번데기가 되기 전의 애벌레처럼, 작품에 과도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존재들을 자주 그려왔다.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의 상태에 이끌리는 듯하다.
아마도 스스로를 아직 작은 애벌레 같다고 느끼기 때문일 거다.(웃음) 결국 모든 그림에는 내 모습이 투영될 수밖에 없으니까. 변태(變態)의 과정은 어릴 때부터 내게 신비로운 주제였고,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느낀다. 솔직히 말하면, 어른이 된다는 게 아직도 두렵다. 신분증에 적힌 생년월일을 볼 때마다 ‘내가 정말 이렇게 나이 들었나?’ 하고 새삼 놀랄 정도다.(웃음)
미완의 상태가 지닌 아름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직 온전히 성숙하지 않은 존재들은 그 자체로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아이들을 보면 어떻게 자라날지 기대하게 되지 않나.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든 중요한 건 그 찰나에만 간직하고 있는 희망이다. 이는 내 작업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물처럼 희석한 아크릴물감을 활용해 밑그림 없이 단번에 그린다. 한번 붓질을 시작하면 그 위에 덧칠도 거의 하지 않는다. 처음 그린, 미완성에 가까운 붓질에 가장 강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거기에 희망과 가능성이 담겨 있고,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원에서 벌이 꽃을 찾아와 꽃가루를 퍼뜨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혹시 지금, 꽃도 어떤 오르가즘 같은 걸 느끼지 않을까?” 하고 상상한다.(웃음)
이 과정이 곧 꽃의 번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꽃 위에 내려앉은 벌을 그린 작품들에서 방금 이야기한 붓의 표현 방식이 두드러진다. 꽃가루의 색감과 질감을 표현할 때 어떤 점을 고려했나?
전시장에 걸린 작품 중에는 온몸에 꽃가루를 뒤집어쓴 벌을 포착한 그림이 여럿 있다. 꽃이 수분되는 순간을 담은 그림이다. 정원에서 벌이 꽃을 찾아와 꽃가루를 퍼뜨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혹시 지금, 꽃도 어떤 오르가즘 같은 걸 느끼지 않을까?” 하고 상상한다.(웃음) 이 과정이 곧 꽃의 번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꽃가루의 다채로운 색감을 구현하기 위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을 활용했고, 이 부분만큼은 물감을 두껍게 올려 눈에 확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 지점이야말로 생명 사이의 교류가 일어나는 곳이니까.
초기작에는 주로 어두운 계열의 색을 활용했다면, 최근 작품에서는 색이 한층 다채로워졌다. 색의 변화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
처음부터 색을 자유롭게 다룰 줄 알았던 건 아니다. 억지로 익혀야 했다. 배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색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 과정이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아직 배울 게 많다고 느끼지만, 가끔은 내 작업을 보며 ‘이거 좀 괜찮은데?’ 싶을 때도 있다.(웃음) 그럼에도 여전히 ‘이런 색을 써도 괜찮을까?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보이거나 마냥 예쁘기만 한 건 아닐까?’ 하며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그저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다다르고, 다양한 색을 마음껏 조합해 그 색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걸 보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게 화가의 역할 아닐까.
전시를 찾은 관객이 당신의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주길 바라나?
전시 오프닝 날이면 갤러리 한쪽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의 모습을 지켜보곤 한다. 누군가는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바쁘고, 어떤 사람들은 캔버스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든 내 작품에 흥미를 느끼고 작품을 즐겨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플루언서들이 내 작품을 단순히 셀피의 배경으로 활용하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 방식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원치 않는 건 극소수의 관객만이 “흠, 이건 정말 깊은 의미가 담겨 있군” 하며 한껏 심각한 얼굴로 감상하는, 그런 지루한 전시를 만드는 거다.(웃음)
당신의 작품은 인류가 환경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작품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나?
그림 한 점으로 기후변화를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순진하진 않다.(웃음) 생태계는 분명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지만 이를 그대로 묘사하거나 직접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방식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 작품이 ‘아름답게’ 느껴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내길 기대한다. 벌과 애벌레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지, 꽃가루를 옮기는 작은 생명들이 생태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런 대화가 결국 작은 행동의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각자의 정원이나 발코니에 다년생식물을 하나라도 더 심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웃음) 그런 것이야말로 내 작품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변화 아닐까.
안드레이 두브라브스키, <두 여름의 폭풍 사이 지역 철학자(Local Philosopher Between Two Summer Storms)>
기간 3월 13일~4월 19일
장소 핌서울(서울시 용산구 유엔빌리지길 11 2F)
인스타그램 @fimseoul
웹사이트 galleryf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