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영화에 대한,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헌사의 시간.
패션 매거진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단독 영화제를 개최해온 마리끌레르는
올해도 어김없이 영화와 극장에 대한 애정을 촘촘히 엮어 열두 번째 영화제를 연다.
제12회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세심하게 엄선한 총 17편의 작품을 선보인다. 개막작인 마리게리타 비카리오 감독의 <글로리아!>를 시작으로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미개봉작으로 꾸린 ‘마리끌레르 초이스’, 그리고 자신만의 존재감으로 빛을 발하는 배우들의 대표작을 다시 볼 수 있는 ‘마리끌레르 액터스 앤 비욘드’를 통해 관객을 만나는 귀한 자리를 마련했다.
국내 영화계와 극장은 올해 또 한 번 큰 부침을 겪는 중이다. 그래서 여전히 여기, 영화를 향한 사랑이 있음을 마주하는 순간은 더없이 소중하다. 관객과 감독, 배우가 한자리에서 영화를 매개로 마음을 주고받는 시간이 지속되기를 응원하며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올해도 축제의 출발선에 섰다.
제12회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CGV 용산아이파크몰과 CGV 씨네드쉐프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다. 올해 영화제에는 포스터의 주인공 탕웨이 배우를 비롯해 이혜영, 김우빈, 임지연, 조현철, 백현진, 노상현, 남윤수 배우, 그리고 문상훈과 실리카겔 김한주 등이 영화제 현장에 함께할 예정이다. 상영작 관련 정보는 마리끌레르 웹사이트(www.marieclairekorea.com/mcff2025)에서 확인할 수 있다.
Opening Film
글로리아!
Gloria!

이탈리아, 스위스 | 2024 | 110분 | 컬러 | 뮤지컬, 드라마
감독 마르게리타 비카리오
주연 갈라테아 벨루지, 카를로타 감바, 베로니카 루체시
프랑스혁명으로 혼란스럽던 18세기 말의 유럽, 이탈리아 베네치아 인근 수녀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발칙하고 당돌한 여성영화이자 음악영화다. 당시 수녀원에 있던 여성들에게 악기와 음악을 가르치던 교육 방식은 수많은 재능 있는 여성 작곡가와 음악가를 배출했지만, 음악의 역사는 이들의 존재와 성과를 무시하고 배제했다. 배우이자 가수인 감독은 자신의 장점과 상상력을 더해, 당대 분위기를 보여주는 고전음악에 현대적 감각의 리듬과 멜로디를 덧입히는 발칙한 음악적 전복을 통해 여성을 규제하는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던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와 창조성을 기억하려 한다. 이종(異種)의 음악이 충돌하며 선사하는 즐거움과 남성으로 대변되는 권위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도발과 전복의 순간들이 주는 쾌감이 충만한 영화.
Marie Claire Choice
해피엔드
Happyend

일본 | 2024 | 113분 | 컬러 | 드라마
감독 네오 소라
주연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하야시 유타, 시나 펭, 아라지
근미래의 도쿄가 배경이지만 오늘날 현실을 꿰뚫는 성장의 기록과도 같다. 유타(쿠리하라 하야토), 코우(히다카 유키토), 아타(하야시 유타), 밍(시나 펭), 톰(아라지), 이들 5명은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만끽한다. 어느 날, 누군가 교장의 슈퍼카를 수직으로 세워놓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장난에 분노한 교장은 학교에 AI 감시 체제를 도입한다. 결국 학생들은 새로운 체제에 반발하며 교장실에서 밤새 대치하기에 이른다. 점멸등이 깜빡이는 고요한 오프닝부터 이 영화는 청춘들의 들끓는 에너지보다 억누르는 압력에 더 집중한다. 일상에 도사린 지진의 위협, 총리의 비상계엄 선포, 디지털 감시 시스템과 학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재일 외국인에 대한 차별, 집단 시위 같은 디스토피아적 설정은 일본 사회의 불안을 반영한다. 이전의 청춘영화에서 봐온 무력감 혹은 꿈을 향한 열정은 사라지고, 사회와 시대 변화 앞에 연대하는 이들의 우정이 자리한다. 각자 진로를 결정하고 미련 없이 각자도생을 준비하는 모습도 이 시대 청춘의 초상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로 이름을 알린 네오 소라 감독의 첫 극영화. 어린 시절 음악과 영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습관을 익혔다는 감독의 공감각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
The Seed of the Sacred Fig

독일, 프랑스, 이란 | 2024 | 168분 | 컬러 | 가족, 인권, 사회
감독 모함마드 라술로프
주연 미사그 자레, 소헤일라 고레스타니, 세타라 말레키, 마사 로스타미
2022년 히잡 착용 규정 위반으로 체포된 마흐사 아미니가 의문사하면서 촉발된 시위는 이란 전역으로 확산되며 해방과 인권을 위한 ‘여성, 생명, 자유’ 운동으로 발전했고,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는 영화다. 혁명 법정 판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시위대에 공감하는 딸들의 갈등을 통해 세대와 성별 간 충돌을, 그리고 개인과 국가 사이의 대립을 가족 드라마의 형식으로 담아낸 영화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이란 사회에 맞서 자유와 변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여성들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를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수상했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국제장편상 후보에 지명되며 영화가 지닌 메시지의 보편성, 그리고 밀도 있는 연출과 섬세한 연기가 빚어낸 높은 완성도를 인정받은 수작.
블랙 독
Black Dog

중국 | 2024 | 110분 | 컬러 | 드라마
감독 관후
주연 펑위옌, 동려아
중국 북부 고비사막 인근의 작은 도시. 살인죄로 복역하고 막 출소한 랑(펑위옌)이 돌아온 고향은 이전과 다른 모습이다. 아버지는 문 닫은 동물원에 머물며 병들어가고, 뱀 농장 주인은 랑에게 과거 일로 복수를 거듭하려 들고, 출소한 랑을 바라보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게다가 재개발을 앞둔 마을은 사람보다 버림받은 개들이 많을 지경이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랑은 유기견 순찰대에 합류해 광견병에 걸렸다는 ‘검은 개’를 잡게 된다. 그런데 어쩐지 그 개를 쉬이 보내줄 마음이 들지 않는다. 모두가 위험하다고 피하라는 검은 개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절망 속에서 기대하지 않은 존재를 보며 삶의 애착을 되찾는 이야기와 고비사막, 들개 떼가 어우러진 장관을 담은 장면이 경이롭다는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제7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엣 더 벤치
At the Bench

일본 | 2024 | 86분 | 컬러 | 드라마
감독 오쿠야마 요시유키
주연 히로세 스즈, 나카노 타이가
공원에 덩그러니 남은 나무 벤치 하나를 둘러싸고 다섯 가지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4명의 작가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야기를 쓰고,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이 총 프로듀싱과 연출을 맡은 옴니버스 영화. 일본의 만담 퍼레이드 같은 특색도 느껴진다. 최근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이어가며 일본 대세 배우로 자리 잡은 히로세 스즈가 첫 번째와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하고, 이후에도 최근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키시이 유키노, 오카야마 아마네 등 청춘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 선뜻 연애를 시작하지 못하는 오랜 남녀 친구 사이, 연애 4년 만에 권태기를 맞은 커플, 벤치에서 노숙하는 언니를 찾아온 여동생, 벤치가 된 아빠를 만나러 온 외계인, 결혼한 커플이 만들어내는 기발한 상황과 다채로운 캐릭터를 보는 맛이 있다. 이야기는 다양하지만 결국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소통의 중요성이다. 은연중에 내비치는 속마음, 정면 돌파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을 통해 결국 진심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드러난다.
대도시의 사랑법(드라마)
Love in the Big City(Drama)

한국 | 2024 | 93분 | 컬러 | 로맨스
감독 홍지영
주연 남윤수, 진호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이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대도시의 사랑법》중 <재희> 챕터를 담았다면, 동명의 드라마엔 <재희>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4개의 챕터를 각각 2회씩 총 8부작으로 담았다. 원작자인 박상영 작가가 각본을 맡고, 허진호, 홍지영, 손태겸, 김세인 감독이 각 챕터의 연출로 참여하며 화제를 모았다.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선 그중 5~6화인 홍지영 감독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상영한다. 주인공 영(남윤수)과 바텐더 규호(진호은)의 만남과 연애, 이별을 담은 회차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진실된 연애를 그려내며 호평받았다. 친구랑 같이 왔냐는 규호의 질문에 “혼자 왔는데요. 님 보러”라는 영의 답으로 시작되는 관계는 오랜 비밀을 털어놓는 편안하고도 단단한 연인이 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잠시 소원하기도, 또다시 애정으로 채워지다 끝내 “너는 내가 없어도 상관없어?”라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며 이별하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LGBTQ라는 수식을 지우고 온전히 사랑하는 두 사람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누구나 울고 웃게 만드는 당연한 사랑이 담겨 있다.
백현진쑈 문명의 끝
The Bek Show: End of Civilization

한국 | 2024 | 62분 | 컬러+흑백 | 실험
감독 박경근
주연 김고은, 한예리, 장기하, 문상훈, 김선영
배우, 가수, 화가, 연극 연출가로 활동해온 백현진의 예술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박경근 감독은 2023년 단 3일간의 공연 <백현진쑈: 공개방송>을 기록했고, 추가로 촬영한 장면과 함께 한 편의 영화로 엮어냈다. 무대 위 백현진은 원시인이자 가수, 그리고 해설자로 존재한다. 사람들의 울부짖음, 한 여성의 독백, 립싱크로 흐르는 노래 장면 등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미지들이 인터뷰, 연극 메이킹, 현장 스케치와 뒤섞인다. 한예리와 백현진의 연기 장면은 연극 바깥에서 또 다른 서사를 부여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선다. 진솔한 인터뷰와 해체적인 장면들은 하나의 코멘터리이자 새로운 퍼포먼스로도 보이고, 결국 백현진이라는 예술가의 내면을 바라보게 한다. “어떻게 될지 사실은 저도 모르겠어요.” 그의 말처럼 이 영화는 결과물이라기보다 새로운 감각 자체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퍼포먼스다. 창작하는 사람과 그의 생각, 모든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우연과 정동(情動)의 힘을 느끼게 한다.
너와 나의 5분
404 Still Remain

한국 | 2024 | 103분 | 컬러 | 성장 드라마, 음악, 로맨스
감독 엄하늘
주연 심현서, 현우석
VHS 테이프와 CD가 디지털 파일로 대체되기 시작하던 2001년, 일본 문화에 심취한 열일곱 살 경환(심현서)은 영천에서 대구로 전학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취향이 비슷한 반장 재민(현우석)을 만난다. 경환과 재민은 학교에서는 물론, 방과 후까지 함께 보내며 즐거움을 넘어 설레는 마음까지 감지하지만, 둘 중 누구도 선뜻 사실대로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나마 서로에게 내밀 수 있는 건 함께 좋아하던 일본 밴드 글로브의 음반. 헐값에 처분되던 CD 한 장에 말로 다 하지 못한 마음을 꾹 눌러담았을 듯하다. 직접 만질 수 있는 아날로그의 물성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온다. 엄하늘 감독은 제목의 ‘5분’이 가리키는 음악을 영화에 사용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였다. 이 덕분에 영화의 중간과 끝에 가사와 함께 전곡을 넣어 어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과 애틋함을 한층 더 풍요롭게 채웠다. 누구나 마음속 한편에 간직하고 있을 기억을 꺼내보게 하는 영화다.
파과
The Old Woman with the Knife

한국 | 2025 | 122분 | 컬러 | 액션, 드라마, 미스터리
감독 민규동
주연 이혜영, 김성철, 연우진
구병모의 소설 <파과>가 뮤지컬에 이어 액션영화로 새롭게 탄생했다. 제7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부문에 초청받으며 세계 무대에 첫선을 보인 뒤, 강렬한 캐릭터와 탄탄한 서사에 이목이 쏠렸다. <파과>라는 제목은 ‘흠집 난 과실’ 혹은 ‘여자의 나이 16세’라는 뜻으로, 작중 점차 퇴물 취급을 받는 60대 여성 킬러 조각(이혜영)을 가리킨다. 바퀴벌레 잡듯 살인을 일삼아온 40년 차 청부 살인 업자 조각은 어느 날 작은 호의에 마음이 동한다. 베테랑 킬러에게 사소한 감정은 외면해 마땅한 약점이 되고, 결국 그를 주시하던 혈기 왕성한 킬러 투우(김성철)가 조각의 숨통을 조여온다. 배우 이혜영은 푸석한 은발의 킬러로 변신해 우아한 목소리, 날카로운 눈빛뿐만 아니라 격투, 추격 연기까지 펼치며 육탄전을 펼쳤다. 이 덕분에 조각과 투우의 핏빛 대결은 한층 긴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한 액션 드라마로 완성됐다. 실제 배우의 연륜과 캐릭터의 상황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노쇠하는 인물의 삶이 진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민규동 감독은 멜로, 휴먼 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공포 등 다양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모든 장르의 특색을 부여하는 연출력을 입증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