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밀라노는 예술의 열기로 들끓는다.
그 촉발점인 이탈리아 최대 아트 페어 ‘미아트(miart)’에 다녀왔다.

메타크릴레이트(유리 아크릴)를 활용해 자연과 환경에 관한 작업을 펼치는 지노 마로타(Gino Marotta)의 세계가 펼쳐졌다.
Photo: Nicola Gnesi Studio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축제 밀라노 디자인 위크(Milano Design Week)가 시작되기 전, 도시는 이미 예술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도심의 크고 작은 갤러리들은 새 전시와 행사 준비로 분주했고, 작가의 이름이나 갤러리 로고가 프린트된 에코백을 멘 사람들(갤러리스트나 아트 저널리스트가 대부분이었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으며, 거리 곳곳엔 근사한 디자인의 포스터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제야 열기의 정체를 알아챘다. 올해 제29회를 맞이한 이탈리아 최대 아트 페어 ‘미아트(miart)’였다.

Photo: Nicola Gnesi Studio

Courtesy l’artista e MAAB Gallery, Milano

©Leiko Ikemura, VG Bild-Kunst 2025 and Galerie Peter Kilchmann, Zurich/Paris. Photo: Sebastian Schaub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캐비닛 밀라노(Cabinet Milano)의 디렉팅으로 완성했다.
아시아 갤러리의 진출이 적어 비교적 국내에는 생소한 미아트는 이탈리아 각지의 갤러리를 비롯해 런던, 베를린, 파리 등 아트 신의 주요 거점이 되는 도시, 더불어 페루나 남아공, 조지아 등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나라까지 다양한 갤러리의 작가와 작품을 모아 소개하는 페어로 매년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보다 앞서 열린다. 2020년부터 아트 디렉터 니콜라 리차르디(Nicola Ricciardi)의 지휘 아래 본격적인 확장을 거듭한 미아트는 올해 31개국, 1백79개 갤러리를 한자리에 모았다. 미국의 현대미술 거장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의 탄생 1백 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철학을 전시장 안팎에 담아낸 올해 미아트는 ‘Among Friends(친구들 사이에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계 없는 예술, 연대와 협업으로 완성한 예술을 선보였다.
이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섹션은 작년에 새로 개설된 ‘포털(Portal)’이었다. 로마 폰타치오네 멤모(Fondazione Memmo)의 큐레이터 알레시오 안토니올리(Alessio Antoniolli)가 꾸린 이 섹션은 지리, 언어, 시간성 등에 대해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고착화된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는 갤러리 열곳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가나의 예술대학 쿠마시(KNUST) 내에서 설립된 예술 집단 멤버들의 작품으로 구성한 아팔라초 갤러리(Apalazzo Gallery), 1960~1980년대에 전시 방식의 파격을 선언한 작가 루시 오터(Lucy Otter)의 작품을 선보인 프란코 노에로 갤러리(Galleria Franco Noero), 사회적 흐름과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작업에 반영하는 독일 작가 요조나스 로스마이슬(Jonas Roßmeißl)의 개인전을 소개한 클렘스(Klemm’s) 갤러리 등 각기 다른 흥미로운 주제를 지닌 이 섹션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던 건 전통적 개념을 거스르거나 전복하는 관점이었다. 이 섹션의 하이라이트는 P420 갤러리에서 소개한 카메룬 세라믹 아티스트 빅터 포트소 니예(Victor Fotso Nyie)의 작품이었다. 아프리카 토착 문화와 지금 자신이 머무는 현대화된 세계 사이의 연결점을 고민하며 과거와 미래, 영적과 물질적 시공간 사이 어딘가로 관객을 이끄는 작가의 작품은 페어가 이어지는 내내 가장 많은 질문을 받으며 관심을 모았다.

갤러리 부스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관람객의 모습.
Photo: Nicola Gnesi Studio
도전과 실험을 상징하는 신진 갤러리가 모인 섹션은 대개 전시장 주 공간에서 조금 벗어난 공간에 자리하는 편인데, 올해 미아트는 ‘이머전트(Emergent)’ 섹션을 가장 먼저 만나도록 초입에 두었다. 덕분에 입장과 동시에 젊은 갤러리스트와 작가의 상쾌한 기세를 가득 흡수할 수 있었다. “현대미술과 이를 소구하는 장에서 가장 뜨겁게 일어나는 담론을 포착한 곳입니다.” ‘이머전트’ 섹션을 구성한 큐레이터 아틸리아 파토리 프란키니(Attilia Fattori Franchini)의 말처럼 독특하고 생경한 구조의 작품들은 도전 정신에만 머물지 않고 역사, 기술, 탈자본주의 등 그 안에 각자의 담론을 피력하고 있었다.
미아트의 메인 섹션인 ‘이스태블리시트(Established)’는 무려 1백44개의 갤러리에서 동시대 미술의 현재를 확인하는 동시에 아트 페어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자리였다. 수시간에 걸쳐 찬찬히 둘러보며 발견한 지점은 다양성과 개방성이었다. “방문객들은 점점 더 전통적이지 않은 경로를 탐험하는 데에 열려 있습니다.” 디렉터 니콜라 리차르디의 설명은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설치, 디지털 아트 등 장르의 확장과 소재와 매체의 다양성이 반영된 작품 구성을 보니,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수많은 갤러리가 모인 메인 섹션의 묘미 중 하나는 전 세계 전시장을 찾아다녀야만 가능한 유명 작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데에 있는데, 미아트 역시 이 즐거움을 곳곳에 배치해두었다. 갤러리 부흐홀츠(Galerie Buchholz)에서는 이자 겐츠켄(Isa Genzken), 루츠 배커(Lutz Bacher),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 등 독일 작가의 작품을, 리아 룸마(Lia Rumma) 갤러리에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시린 네샤트(Shirin Neshat) 등 여성 아티스트들의 사진 작품을, 카디 갤러리(Cardi Gallery)에선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의 작품이 감상에도 웨이팅이 필요할 정도로 많은 관람객의 관심을 모았다. 참고로 VIP 데이 다음 날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은 32만 달러에, 이탈리아 상징주의 미술가 펠리체 카소라티(Felice Casorati)의 작품은 약 16만 달러에 판매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Courtesy l’artista e Francesca Minini, Milano Foto Andrea Rossetti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미아트가 단순한 박람회가 아니라 밀라노 문화 경관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미아트가 보다 확장될 수 있도록 긴밀한 연대와 협력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디렉터의 다짐은 미아트가 전시장에 머물지 않고, 밀라노 곳곳에의 전시로 이어지는 데에 힘을 실었다. 폰다치오네 프라다(Fondazione Prada), 밀라노 현대미술관(GAM), 노베첸토 박물관(Museo del Novecento), 피렐리 안가르 비코카(Pirelli Hangar Bicocca) 등에서는 사흘간의 페어 여정이 끝난 이후에도 밀라노에 생동하는 예술의 활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미아트로 촉발된 도시의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유독 오래 머물게 되는 갤러리가 겹치는 이들은 각자 좋아하는 나라의 갤러리를 서로 소개했고, 가장 마음에 드는 섹션을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는 밀라노에서 가장 예술적인 스팟에 대한 순위 매기기로 이어졌다. 장벽과 경계를 허물고 계속해서 확장되길 골몰하는 미아트의 바람이 바로 이런 장면이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