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한국과 이란, 일본과 이탈리아 등 세계 곳곳의 동시대성을 담은 영화 17편을 상영한다.
4명의 영화계 인사가 이 중 함께 보고 싶은 아홉 편의 작품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스크린을 아름답게 수놓을 장면과 이야기들을 다 함께 극장에서 마주할 날을 기다리며.

writer
장성란 영화 저널리스트
<엣 더 벤치>
감독 오쿠야마 요시유키
출연 히로세 스즈, 나카노 타이가

누군가 벤치를 찾는다. 거기서 무얼 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이 둘 이상이고 서로 아는 사이라면 대개는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엣 더 벤치>는 그 대화의 기록이다. 마치 벤치에 귀가 달리고, 기억력을 지녀 지난 1년 동안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인 다섯 가지를 꼽아 그 풍경을 돌이켜보는 듯하다.
도쿄 다마가와강이 내다보이는 널찍한 공터 한가운데, 낡은 나무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제목 그대로, 영화는 이 벤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리코(히로세 스즈)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노리(나카노 타이가)를 벤치로 불러내 장소에 얽힌 기억을 나누는 첫 번째 에피소드 ‘남겨진 것들’ 을 시작으로, 4년째 교제 중인 연인이 벤치에서 초밥을 먹다 의미심장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는가 하면 (‘쌓여가는 초밥’), 한 자매가 흠뻑 젖은 벤치 주위를 맴돌며 격렬한 대화를 펼친다(‘지키는 역할’). 네 번째 에피소드 ‘라스트신’에 이르러 영화는 벤치를 점검하는 구청 직원의 모습에서 시작해 서사의 틀을 거듭 넓히며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뒤이어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 리코와 노리가 그로부터 1년여 뒤 벤치에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마지막 에피소드 ‘슬픈 감정은 계속된다’로 끝을 맺는다.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풍경”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이 영화의 탯줄과도 같은 정서다.
잘 만든 옴니버스영화가 그렇듯, 편마다 색깔이 확연히 다르면서도 그 기저에는 공통된 정서가 흐른다. 작중 대사를 빌리자면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풍경”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이 영화의 탯줄과도 같은 정서다.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은 어릴 적 자주 찾았던 벤치가 언제 철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변화하는 도쿄 풍경 속에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벤치를 배경으로 사계절을 따라 누군가의 사사로운 대화를 담아내는 구성을 떠올렸다. 다섯 편 모두 실제 그가 아끼는 벤치에서 촬영하고, 직접 연출했다.
네 번째 에피소드를 제외한 네 편의 시나리오 작업을 서로 다른 작가에게 맡긴 덕에 에피소드마다 인물의 관계와 상황, 대화 내용과 분위기가 각양각색이다. 그런데도 각 에피소드 모두 우리가 실생활에서 나누는 대화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긴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영화나 드라마 속 대화가 대개 한 줄 한 줄 목적이 뚜렷한 것과 달리,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받는 대화는 이리저리 곁길을 헤매거나 모호한 여지를 남길 때가 많다. 이 영화가 들려주는 대화도 그렇다. 두서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인물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대사가 불쑥 튀어나오고, 그 대사가 대화의 방향을 묘하게 바꾼다. 우리는 카페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흥미진진한 대화에 짐짓 아닌 척하며 귀를 쫑긋 세우는 기분으로 인물들의 대화에 몰입하게 된다. 영화 속의 벤치도 아마 그런 마음으로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으리라. 어긋나고 헤매는 말과 말을 타고 맴돌다, 어느 순간 서로에게 가닿는 진심, 그 풍경. 그것을 정겹게 여기는 태도가 변화무쌍한 도시에서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벤치를 바라보는 감독의 애틋한 눈길과 자연스레 이어진다. 거기에서 이 영화만의 고즈넉한 정서가 피어오른다.
영화를 기획하고 연출한 오쿠야마 감독은 2011년 사진작가로 데뷔해 광고, 뮤직비디오, 전시의 영역을 넘나들며 사진과 영상 작업을 활발히 펼쳐오고 있다. 일본 영화계의 떠오르는 기대주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2007)의 실사영화 를 연출해 올가을 공개를 앞두고 있다. 일상의 순간을 특별하게 붙잡는 감각으로 정평이 난 감독은 <엣 더 벤치>에서도 그 저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9월의 해질 녘 노을빛 아래 리코와 노리가 서로를 흘끗 살피는 모습이나, 따사로운 가을볕이 나나와 칸타를 포근히 감싸안은 듯한 풍경이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는다.
<너와 나의 5분>
감독 엄하늘
출연 심현서, 현우석, 공민정, 이동휘, 온주완

영화가 시작부터 말하듯, 21세기의 첫해는 2000년 이 아닌 2001년이다. 바로 그해, 고등학교 1학년 경환(심현서)은 영천에서 대구로 이사를 가 잊지 못할 1년을 보낸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해이자, 누군가를 좋아해 설레면서도 동시에 가슴 아픈 사랑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는 해. 그 모든 깨달음의 과정에는 재민(현우석)이 자리한다.
<너와 나의 5분>은 시작과 동시에 관객을 24년 전의 대구로 데려간다. 차진 사투리, 그리고 당시만 해도 인터넷에서 몰래 다운로드해 들어야 했던 일본 음악을 통해서다. 반 친구들은 일본 만화와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경환을 ‘오타쿠’라 부르지만, 재민은 다르다. 경환이 듣는 음악이 일본의 삼인조 밴드 글로브의 곡이란 걸 알아채고, 그의 귀에서 이어폰 한쪽을 빼내 함께 듣는다. 그날부터 경환은 매일 재민과 함께 버스를 탄다. 이어폰을 나눠 끼고, 5분 남짓한 노래를 함께 듣기 위해. 이 장면을 기점으로 글로브의 ‘Departures’와 ‘Faces Places’가 영화 내내 주제곡처럼 흐르며 애틋한 감성을 돋운다.
장면이 지닌 서정적 감수성을 즉각적으로 끌어올리는 힘은 영화를 쓰고 연출한 엄하늘 감독의 장기다. 감독은 이를 단편 <피터팬의 꿈>(2020)에서 이미 톡톡히 증명해냈다. <너와 나의 5분>은 감독이 오래도록 품고 있던 시나리오로 만든 첫 장편 연출작으로, 대구에서 보낸 자신의 10대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영화 속 세계를 그려냈다.

영화는 경환과 재민을
‘비운의 연인’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비추어 보며 자신을 알아가는,
그렇게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존재로 그린다.
<너와 나의 5분>은 <피터팬의 꿈>과 마찬가지로 두 소년의 사랑 이야기다. 나눠 낀 이어폰을 타고 경환과 재민의 귀에 흐르는 노래에 마음은 점점 더 일렁이고 노랫말이 더욱 간절히 다가올수록, 둘 사이를 갈라놓는 요소들이 속속 등장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주위에서 이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손가락질하고 괴롭힌다. 그러나 영화는 ‘두 소년 대 세상’의 구도로 그 시절과 주인공의 서사를 단순화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절대적이며, 그것을 흘겨보는 사회는 모질기 짝이 없다고 편을 갈라 몰아붙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경환과 재민을 둘러싼 것들을 복합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오해와 이해가 함께 있고, 두 소년이 각자 풀어내야만 하는 문제가 자리하며, 마냥 슬프다고만 할 수 없는 감미로움과 평온이 깃들어 있다. 그렇게 영화는 경환과 재민을 ‘비운의 연인’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비추어 보며 자신을 알아가는, 그렇게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존재로 그린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은 2001년에 서로를 만난 것이 두 주인공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지 비추는 형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흔히 첫사랑을 돌아볼 때 당시 느낀 애틋함을 간절히 되찾고 싶은 마음과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듯, 어떤 기억을 오래 곱씹어야만 느낄 수 있는 달콤쌉싸름함이 영화의 끝맛으로 남는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배경으로 그 시절의 추억거리를 소환해 그 속에서 피어나는 첫사랑을 더없이 순수하게 그리는 작품들 사이에서 <너와 나의 5분>이 남기는 여운은 이런 이유에서 퍽 남다르다. 이 영화에서 2001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아름다운 첫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동화 속 세계가 아니라 주인공의 현재와 맞닿은, 주인공의 지금을 가능케 한 시간이다. 그것이야말로 첫사랑을 돌이켜보는 온당한 시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