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 구병모 소설 <파과> 중에서.
오래 갈망한 이야기, 기다리던 인물이 스크린 위에 새겨졌다. 상실 앞에서 형형하게 살아내는 두 사람, 영화 <파과>의 배우 이혜영과 김성철.



김성철 재킷 Tonywack.


배우 이혜영
한번 나를 던져본 거예요. 두려움을 안고.
<파과>를 보는 내내 이혜영 배우가 아니라면 누가 노년의 여성 킬러 ‘조각’이 될 수 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처음 시나리오를 통해 조각을 마주한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글쎄… 새로운 도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두려움이 훨씬 컸어요. 나는 못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어요. 근데 이 작품을 꼭 해야 한다고 나를 밀어붙인 게 우리 회사 전(재순) 대표예요. 근데 육체적으로 내가 이걸 각오하기가… 편하게 배우 생활을 할까 아니면 도전을 할까 하는 갈등이 있었어요. 하지만 나를 한번 던져본 거예요. 두려움을 안고. 어떻게 보면 최근 작업들이 편한 작업이었죠.
노인, 여성, 킬러. 지금껏 한국 영화에서 이토록 파격적이고 멋진 주인공이 있었나 싶습니다. 이런 새로운 시도가 선생님께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요?
한때는 여배우가 남자의 상대로서만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내가 데뷔하던 무렵이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매우 불행하게도 나는 어울리는 남자가 없어서 남성의 상대적 존재로서 가치가 없었죠. 애초에 탈락된 사람이었던 거죠.
선생님을 받아낼 만한 남자 배우가 없었던 거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상대적 존재인 여성이 아니라 매우 독립적인, 홀로 버티고 서 있는 여자라는 점에서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이번에 함께한 김성철 배우는 연기하고 호흡하는 과정에서 훌륭하게 잘 받아 주었어요.
조각은 살아낸 삶의 여정과 생존의 이유가 너무나 깊고 복잡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외로움과 심연이 깊고요.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조각이라는 인물의 어떤 면을 유심히 바라보고자 했나요?
그의 상실과 고독,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상태를 감독님은 어떤 상황을 연출하기보다 거의 내 얼굴과 표정에서 잡았어요. 내가 특별히 한 건 없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느껴져요.
그게 감독의 역할이죠. 내가 제일 많이 고민한 건 심연의 감정 속 힘주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갑자기 재빠른 동작을 해내야 하는 기술적 부분이에요. 늘 힘들었지. 촬영 내내 매일 불만스러웠어요. ‘오늘 연기가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조금 더 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 감정이 아니’라고 하고… ‘나 오늘 좋았지, 나 멋있었지’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완성본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가서 처음 봤잖아요. 깜짝 놀랐죠. 감독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거구나 싶더라고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현장이자 감독님이 요구하는 게 많은 촬영장이었어요. 그래서 많이 배웠죠.
배웠다는 말이 산뜻하게 들립니다. 지금까지도 현장에서 배우시는 거죠?
그렇죠. 민규동 감독님의 콘티가 완벽히 있었어요. 심지어 조명이나 카메라 동선 등 현장 세팅을 완벽히 마친 뒤 카메라 앞에 배우들을 대신해서 리허설을 하는 또 다른 배우들이 있어요. 나중에 나는 그 자리에 톡 들어가서 연기를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기술적으로 이렇게 할 테니 그 안에서 “선배님만이 할 수 있는 감정을 찾으세요” 하면서 대신 “짧게”.(일동 웃음) 그래서 “내가 오래 연기하고 감독님이 필요한 걸 딱 잘라서 쓰면 되잖아요” 했더니, 모두 약속된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거예요. 나는 이 방식이 생리적으로 좀 안 맞는 스타일인데, 앞으로 계속 배우로 살아가려면 이런 현장에 익숙해져야 하겠구나 싶더라고요. 이렇게 완전히 타이트한 현장이 처음이었어요. 일지 써놓은 걸 읽어봐야 돼. 내가 일지를 거의 매일 썼어요.
뭐라고 쓰셨어요?
어느 날은 막 욕을 하고, 어느 날은 ‘아, 역시 민 감독님 최고!’ 그러면서도 ‘이 촬영이 끝나고 내가 그동안 감독님한테 불평했던 모든 것들이 미안하고 후회하게 되길 바라’라는 생각이었어요. 감독님께서 고집한 만큼 잘 해내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어느 순간 조각의 액션이 끝나지 않길, 계속 보게 되길 바라게 되더라고요. 육체적 어려움도 컸을 텐데요.
권격을 할 것 같지 않은 힘 빠진 모습으로 있다가 순간적으로 액팅을 해야 하는게 더 어려운 거더라고요. 이야기 흐름대로 조각이 노쇠하고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아프고 고통스러운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너무 건강한 몸을 만들어놓으면 그 연기가 안 나올 것 같았어요.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액션을 하려니 어려운 점이 있었죠.
조각을 연기하기 전과 모든 여정이 끝난 지금, 조각이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도 변화했나요?
조각은 우리가 존경할 만한 인물도 아니고. 자기만의 윤리나 신념이 있지만 결국 류(김무열)로부터 계승된 거잖아요. 류가 그렇게 가르쳤고 조각이 배웠죠. 다만 이 여자도 살아남았으니까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마치 류가 환생한 것처럼, 류로서 살아가는 거죠. 그에게는 오로지 류의 존재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 나이가 되도록 그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살 수 있을까? 상처받은 인간이지만 나름 치유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영화가 어떻게 보면 오락 액션물 정도로 가볍게 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치유도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 같아요. 이 한 노인으로부터요.
연기하는 것, 이야기 안에서 한 인물로 살아내는 것, ‘좋은 연기’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는 걸 느끼시나요?
좋은 연기가 뭘까… 감추지 않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 신뢰를 주는 것, 편안한 것. 근데 영화마다 그 기준이 다르잖아요. 아무렇게나 편안하게 말해서 왜 저렇게 잘하지? 싶은 영화가 있는가 하면, 편한 톤의 대사가 어울리지 않는 영화도 있어요. 시를 읊는 게 어울리는 영화도 있고요.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를 할 때 누군가 이런 걸 썼어요. “택시 운전수 목소리가 왜 그렇게 귀부인 목소리 같아?” 이 말이 가슴에 걸리더라고요. 나는 왜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할까. 연극할 때도 목소리 톤 때문에 선택이 좁아지는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거칠게 말해보려 하고, 사투리도 써보고 했는데 안 돼요. 더 어색하고 이상한 거예요. 나중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완성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어요. 그런 면에서 조각은 직업 상 자유로운 인물이니 내가 어떤 소리를 내도 상관없는 거지. 그럴 때 좋은 연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어떤 선입견이 들어오면 관객의 마음이 열리지 않으니까.
선생님, 지금 연극 연습 시작하셨죠?
오늘도 이것 때문에 연습 못 하고, 어제도 그것(영화 제작 보고회) 때문에 연습 못 하고.(웃음)
5월 8일에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오르죠. 초연 13년 만의 재회입니다. 개막을 한 달여 앞둔 지금 어떤 마음인가요?
정말 행복하죠. 나는 연극을 해야 책을 봐요. 책을 안 볼 수가 없어. 역할을 이해하고 무대를 새롭게 생각하고…. 연극은 매번 다르고, 새롭게 연기해야 하죠. 새로 하는 말처럼이요. 한데 결코 쉽지가 않아요. 오늘 벌써 우리가 대여섯 시간 여기 있잖아요. 이러면 나는 지치거든요. 근데 무대는 탁 올라가서 어떻게 됐든 끝까지 달려가면서 세 시간에 끝내잖아요. 그 일회성이 너무 좋아요.
그럼에도 고행의 시간들이 필요하잖아요. 연습량도 상당하고, 매일 무대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고요.
배우로서 보면… 즐겁지 않아요. 모든 역할이 그래요. 어떤 역할을 한다는 건 고통이에요.
고통 속에 스스로 투신하는 것이죠. 왜 자꾸 그 속에 본인을 밀어넣는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행복한 적이 없어서 고통이 편한 거 아닐까? 모르겠어…. (잠시 침묵)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들을, 나를 그리고 먼저 떠나간 사람들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이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거죠. 어떤 인물, 역할을 이해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까불고 즐거워하면서 산 적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때로는 그 고통이 무시당하기도
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잖아요. 배우가 고통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들이 저평가된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조각도 고통스러웠어요. 모든 촬영이 끝나고 사람들은 환호하는데, 나는 눈물이 왈칵 나더라고. ‘왜! 왜! 끝났어, 왜 끝난 거야!’ 이런 기분.(웃음)
50여 년간 연기해도 고통에 내성은 생기지 않는가 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가 누가 고통을 잘 이기느냐’가 배우로 살아남는 일일 것 같아. 그거 잘 못 견디는 사람은 배우를 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코믹한 역할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배우라는 존재가 얼마나 예민해야 할 수 있는 건지, 지극히 예
민한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정말.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선생님을 뵙기 전부터 이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왜 지금까지 계속 배우로 살고 계신 것 같으세요?
나는 이제는 고맙죠. 조금만 일찍 죽었어도 조각을 못 만났겠죠. 민규동 감독님을 만나고, 이 프로덕션을 만난 뒤 느끼는 만족과 기쁨이 있어요. 근데 왜 배우를 하나… 오래 배우를 했지만, 나의 가장 친한 지인 중 한 분이 그러더라고. “혜영이는 분명히 좋은 배우인 건 맞아. 근데 너를 생각하면, 너의 대표작은 뭐야? 뭐라고 말할 수 있어?” 생각해보니까 나는 좀 있는 것 같은데, 상대방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 좀 더 해야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로지 꿈을 이루려고 배우가 된 것이니, 내가 꿈을 가졌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사람으로 계속 살고 싶어요.
그래서 조각과 이혜영 배우의 접점이 영화 안에서도 느껴져요. 한 가지 일을 오래 해온 이들의 장인적 면모가요. 두 레전드가 한 프레임 안에 있는 듯이요.
삶을 지나왔다는 게.(웃음) 살아남아 살았고, 또! 살았고. 그 와중에도.




톱과 오른쪽 실버 링과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 김성철
촬영이든 공연이든 감정을 쏟고 나면 제 안의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게 되거든요. 그때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모든 것이 다 사라졌을 때, 그때 온전히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영화 <파과>로 처음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첫 상영 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던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나요?
영화제 하면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잖아요. 영화제에 출품한다고 해서 모두 좋은 작품은 아니고, 출품하지 못한다 해서 나쁜 작품은 아니지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초청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작품이 좋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끔 하니까요. 거기서 오는 안심이 있었죠. 상영 후 다 같이 박수 쳤던 기억이 나요. 베를린에 작품을 처음 보게 된 거라 굉장히 집중해서 봤어요.
영화 <파과>는 예상보다 훨씬 더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이야기더라고요.
찍을 때도 그랬어요. 보통 액션 장면의 디렉팅은 무술 감독님의 의견이 크게 작용하는데, 언제나 최종적으로 민규동 감독님이 오케이를 해야 신이 마무리됐어요.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감독님이 생각하는 액션의 드라마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오케이가 나지 않았어요. 촬영하면서도 어떤 영화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액션 장면이 드라마적으로 잘 담긴 것 같아요.
액션을 단지 시각적 쾌락을 위한 장치로만 기능하지 않게 한 거죠?
그렇죠. 우리 영화에서 액션은 드라마의 정점이에요. 감정의 클라이맥스가 액션 장면에 있어요.
시나리오를 처음 읽은 순간도 궁금했어요. 이 영화의 어떤 점을 높이 샀나요?
시나리오와 구병모 작가님의 원작 소설을 같이 봤는데, 모르겠어요.(웃음) 왜 자꾸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는데요. 힘들 걸 알고 있었지만 ‘투우’라는 캐릭터가 너무 매력 있는 거예요. ‘투우’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느낌, 정제되지 않고 성숙하지 않은 이 청년이 좋았어요. 반전 있는 캐릭터를 선호하거든요. 이야기 내내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행동을 하나, 저 표정은 도대체 뭘까 하고 궁금하게 만든 뒤에 마지막에 그 의문들이 다 해소되는 캐릭터를요. 그런 면에서 투우는 제 바람에 완전히 부합하는 인물이에요. 그리고 조각과 투우의 대결을 상상해보면… 60대 여성과 30대 남성이 싸움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하지만 이 작품 안에서는 말이 되겠다 싶었어요. 그 점이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었고요.
맞아요. 조각과 대립하며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투우의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모습이 드러나죠.
저 드라마나 영화 보면서 잘 울거든요.(일동 웃음) 언제 눈물이 나는가 하면 불쌍한 아이들 있잖아요.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쟤는 왜 이렇게 삐뚤어? 이상해!’ 이러다가도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 하고 말하면 눈물이 확 나거든요. 근데 투우가 정확히 그 지점이 있어요. 중학생이 되어서야 세상에 태어나 처음 챙김이라는 것을 받은 아이잖아요.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투우의 어떤 면을 제일 사랑했나요?
짐승의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단순하고 본능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 투우가 마치 짐승 같았으면 했어요. 영화 안에서 날것을 표현한다는 말 자체가 불가능하잖아요. 라이브로 행해지는 무대 위에서는 그 캐릭터로서 존재한다면 뭘 해도 용인이 되죠. 하지만 영화는 여러 각도를 담기 위한 반복된 촬영이 있기 때문에 테이크의 반복 속에서 날것의 느낌이 희석되기도 해요. 한데 <파과>는 돌이켜보면 중요한 신(scene)에서는 민규동 감독님이 늘 첫 테이크에 오케이를 해주셨어요. 처음의 생생함을 좋게 생각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투우가 잘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저도 나름의 접근 방식을 바꿔보기도 했어요. 보통 연기할 때 상대 배우의 대사를 포함해 해당 신 전체를 외우거든요. 그 안에서 생겨날 수많은 경우의 수를 어느 정도 계산하고 상대 배우의 애드리브 까지 유연하게 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전체 틀과 중요한 대사만 외우고 현장에서 많은 것을 함께 만들어갔어요.
무엇보다 이야기 속에서 상대 역할인 ‘조각’은 그 세계에서 레전드적 인물이잖아요. 동시에 이혜영 배우님 자체도….
레전드죠.
두 레전드를 마주하는 일은 어땠나요?
촬영하는 내내 ‘선생님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연기를 얼마나 사랑하기에, 작품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어느 정도이기에 저렇게까지 하실 수 있을까 하고요. 이혜영 선생님과 조각이라는 캐릭터의 접점이 있잖아요. 마치 ‘이 일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고, 이 일을 잘 수행해내는 것이 나의 몫이다’ 싶은. 조각이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방역을 해야 해’ 하는 것처럼 선생님 역시 ‘나는 연기를 계속해야 해’ 하는 느낌인 거죠. 제가 인터뷰 때마다 하는 자주 하는 말이 ”죽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어요”거든요.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평생 연기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보았나요?
전혀요. 여쭤본 적이 없습니다.(일동 웃음) ‘이 작품에서 연기를 어떻게 하셨어요?’ 혹은 ‘삶이 어떠셨어요?’ 같은 질문을 제가 잘 못 해요. 반대로 생각했을 때, 저한테 갑자기 어떤 후배가 와서 ‘어떤 삶을 살아오셨어요?’라고 묻는다면 답하는 게 고통스러울 것 같거든요. 그저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해야지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연기를 하며 아무 불순물 없이 온전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날들도 있어요? 아무 잔감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행복이요.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감정을 표출하는 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은 더욱이요. 학교에 다닐 때 연기를 처음 접하면서 어떤 감정들이 해소되는 걸 느꼈어요. 그때는 지금만큼 잘 알지 못했는데 이제 저도 여러 경험을 거치며 사람마다 품고 있는 고유의 에너지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됐잖아요. 저라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에너지가 큰 것 같아요. 감정을 느끼는 에너지가 큰 편이기 때문에 이를 표현하지 않으면 제가 건강하지 않다고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운동도 많이 하고, 작품도 끊이지 않게 하는 것 같아요. 촬영할 때는 이게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오히려 제가 건강해지는 방법이에요. 물론 사전적 의미의 ‘헬스’, 건강은 좀 안 좋죠. 밤을 새울 때도 있고, 먹는 것도 잘 못 챙기니까요. 그렇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건강해져요. 촬영이든 공연이든 감정을 쏟고 나면 제 안의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게 되거든요. 그때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모든 것이 다 사라졌을 때, 그때 온전히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행복의 전제는 모든 것을 쏟아냈을 때일 텐데요. 그렇지 않은 날도 있겠죠?
않은 날이 훨씬 많죠. 그럼에도 다 쏟아내는 날을 위해서 버티는 거죠.(웃음) 내일은 괜찮겠지 하면서.
배우는 어떤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 애쓰죠. 투우는 외로움의 골이 유난히 더 깊은 인물입니다. 그 마음에 어떻게 닿으려 했어요?
‘사람마다 가진 에너지의 성질이 다르다’는 생각과 연결돼 있는데요. 저는 성격이 극단적이에요. 남들은 요 정도 느낄 만큼의 외로움을 저는 이~렇게 느끼거든요. 이해하고 접근하며 계획하기보다 그냥 믿어버리는 거예요. 눈앞의 음식이 그렇게 맛있지 않아도 엄청나게 맛있다고 믿어버리는 거죠. 우리가 하는 일이 그거니까. 그리고 많은 텍스트와 캐릭터를 경험하다 보면 뭘 어떻게 세세히 이해하겠다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태도에 더 가까워져요.
투우도 그럴 수도 있지.(웃음)
그럴 수 있지, 다 그럴 수 있지로 가요. 하지만 최초에는 ‘왜 저러지?’죠.(웃음) 요새 삶이 재미있어요. 예전에는 제 모든 일상이 연기밖에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나이가 한 살씩 얹어지고, 이러다 보면 마흔 살, 쉰 살 금방 되겠다 싶어요. 근데 만약에 그 나이가 됐을 때 누군가 ‘어땠어?’라고 묻는다면 ‘일만 했어’라고 답할 것만 같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일상을 더 잘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오늘 촬영 마치고는 어떤 일상을 보낼 계획인가요?
우선 필라테스를 해야 하고요. 그러고는 글쎄요. 날씨가 좋으면 매일 집 뒤의 남산이나 매봉산에 가요. 그리고 요즘 최은영 작가의 소설 <밝은 밤>을 읽고 있어요. 3분의 2 정도 봤어요.
정제된 삶을 살고 있네요. 네. 행복해요.
의외예요.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생각했어요.
어릴 땐 그랬어요. 밖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노는 것도 좋아했는데 이제는 거기서 오는 도파민이나 희열을 좇기보다 많은 것을 내 안에서 풍성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요새 스스로를 좀 채워야 할 것 같아서 자꾸 책을 읽게 돼요.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대본 보고, 연기하고, 운동하는 게 끝이거든요. 전시도 가고, 책도 읽어야지 싶어요.
<밝은 밤>, 끝까지 완독하세요. 좋더라고요.
완독할게요. 이틀 정도 더 걸릴 거 같아요.


김성철 재킷 Tonywack, 이어 커프와 네크리스 모두 Tom Wood, 안에 입은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