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 소라가 영화 <해피엔드> 곳곳에 심어둔 테크노를 향한 애정. 영화의 미학을 완성하는 <해피엔드> 속 음악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개봉 한 달여 만에 어느덧 9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피엔드>를 둘러싼 열기가 여전히 뜨겁습니다. 영화는 아버지 류이치 사카모토의 생전 마지막 연주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연출한 네오 소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대지진의 공포가 짙게 깔린 근미래의 도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0대 주인공 ‘유타’와 ‘코우’ 그리고 음악연구동아리 학생들의 우정과 균열을 그립니다. 영화를 향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 주요한 요소 중 하나인, <해피엔드> 속 음악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DJ 유스케 유키마츠와의 협업
이 영화를 오프닝 장면으로 기억하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겁니다. 아마추어 DJ로 활동하는 유타와 코우가 불법 테크노 클럽에 숨어들고, 경찰의 기습 진압으로 현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죠. 그 와중에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테크노 DJ 셋은 묘한 해방감을 안깁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 장면의 신스틸러는 DJ 유스케 유키마츠(¥ØU$UK€ ¥UK1MAT$U). 최근 ‘보일러룸’과 ‘HOR Berlin’ 등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은 언더그라운드 테크노씬의 아이콘입니다.
네오 소라 감독은 뉴욕에 거주하던 시절 유키마츠의 음악을 즐겨 들었고, 직접 찾은 라이브 공연에서 그와 인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음악뿐 아니라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던 두 사람은 일본의 시네마테크에서 여러 차례 마주치면서 친분을 쌓아나가다, 결국 감독이 출연을 제안하게 되죠. 각본 초기부터 유스케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힐 만큼 확신에 찬 캐스팅이었기에, 오프닝 장면 속 유스케의 존재감은 영화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해냅니다.
음악 감독 ‘리아 우양 루슬리(Lia Ouyang Rusli)’는 누구?
<해피엔드>의 음악 감독 ‘리아 우양 루슬리’는 영화 <프라블러미스타>(2023), 시리즈 <판타스마스>(2024) 등으로 A24, HBO 시리즈와 협업해온 작곡가이자 ‘OHYUNG’이라는 이름으로 솔로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뮤지션입니다. 클래식부터 테크노, 익스페리멘털 팝과 엠비언트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오가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왔죠.
네오 소라는 ‘유타와 코우가 30대가 되어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본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배경음악을 작업하길 의뢰했고, 루슬리는 피아노 앞에서 즉흥적으로 연주를 이어가며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갔습니다. ‘젊음에 대한 향수’와 ‘언젠가는 세상의 억압과 마주해야만 한다는 느린 깨달음’을 주요 테마로 삼아, 간결하고 절제된 피아노 선율에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결합한 사운드트랙이 완성됐죠. 루슬리 감독은 이번 작업을 “테크노에 바치는 러브레터”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테크노로 대변한 ‘불안정한 청춘’의 단상
그렇다면 왜 테크노였을까요? “나의 유년 시절과 음악, 테크노는 불가분의 관계로 뭉쳐져 있다”고말하는 네오 소라 감독의 개인적인 애정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테크노라는 장르가 태동한 배경과 음악에 깃든 정신이 <해피엔드>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절묘하게 겹쳐지며 방황하는 청춘들의 서사에 개연성을 더합니다.
테크노는 198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의 쇠락한 공업지대에서, 인종 차별과 실업난 속에서 더 나은미래를 꿈꾸던 흑인 청년들이 저항의 메시지를 담아 처음 만들어낸 음악입니다. 이처럼 저항의 배경 위에서 탄생한 테크노는 극중 AI 감시 체제를 도입한 학교와 차별과 혐오를 일삼는 극우 정권에 맞서는 <해피엔드> 속 인물들이 마주한 불확실한 미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극중 사회로부터 소외된 존재들이 겪는 불안과 고립의 정서가 테크노라는 장르와 자연스럽게 공명하는 것이죠.
여기에 더해 테크노 특유의 반복적인 비트는 영화 전반을 감도는 지진의 위협, 이로 인한 ‘진동’의 감각과도 연결됩니다. 잦은 미세지진은 실제로 인물들의 세계를 뒤흔드는 물리적인 현상이면서, 동시에 끈끈했던 관계가 균열되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을 환기시키는 장치로도 작용하죠. 이처럼 <해피엔드>는 사운드와 서사를 촘촘히 교차시키며 저마다의 불안을 안고 혼란한 시기를 통과하는 불안정한 청춘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네오 소라 감독이 영감을 얻은 플레이리스트
영화 곳곳에 배치된 음악적 장치를 통해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내비친 네오 소라 감독은 <해피엔드> 제작 과정에서 영감을 얻은 60여 곡의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테크노를 중심으로 앰비언트, 재즈,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로 구성된 이 리스트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디스토피아적인 정서와도 맞닿아 있는데요. 이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해피엔드>가 남긴 여운을 이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