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끌레르 영화제가 12회씩 이어진 하나의 절대적 이유는 사랑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쏟아지고, 낯설고, 이상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마주할 때의 황홀감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영화 예술에 평생을 헌신하는 사람들의 꿈과 상상을,
육체적 노고와 정신적 고통, 좌절을 마리끌레르가 존경하기 때문이다.

올해도 깨끗한 마음으로 영화제를 꾸렸다.
극장의 기분 좋은 소란함이 계속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3일의 기록.

지난달 제12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이런 글을 썼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8일 뒤면 제12회 마리끌레르 영화제가 열린다. 영화제를 매해 거듭 준비할수록 앞선 선배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2012년 국내 패션 매거진으로는 유일하게 순수 영화제를 열겠다고 각오했던 무모하고도 대찬 용기를, 아무도 우리의 존재를 모를 때에도 묵묵히 영화제를 살찌우고 키워냈던 노력들을 상상하게 된다. 그렇게 지난 시간을 거스르다 보면 영화제를 하지 않을, 포기할 이유는 꽤 많이 발견된다. 무수한 핑계들을 잠식하게 하는 단 하나의 절대적 이유는 역시 사랑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쏟아지고, 낯설고, 이상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마주할 때의 황홀감을 마리끌레르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영화 예술에 평생을 헌신하는 사람들의 꿈과 상상을, 육체적 노고와 정신적 고통, 좌절을 마리끌레르가 존경하기 때문이다. 올해도 깨끗한 마음으로 영화제를 꾸렸다”라고. 영화제를 마친 지금, 마리끌레르 영화제가 지속되는 이유에 하나를 더 덧붙이고 싶다. 이 작은 영화제에 쏟아지는 다정한 호의에 대해서다. 한 편의 영화를 상영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는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 그리고 홍보사, 감독과 프로듀서, 배우와 그들의 매니지먼트까지. 이들이 나눠주는 너그러운 애정과 애씀 덕분에 제12회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올해도 어김 없이 관객과 기쁘게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올해 역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미개봉 국내외 작품을 상영하며 시대와 장르, 세대와 성별을 넘어 충실하게 다르고 다양한 이야 기들을 한 바구니에 담고자 했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 지아장커 감독의 <풍류일대>, 야마나카 요코 감독의 <나미비아의 사막> 등 우리의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보내줄 열일곱 편의 영화와 탕웨이, 이혜영, 김우빈, 임지연, 노상현 등 14명의 배우 그리고 최동훈, 민규동, 우민호, 네오 소라 등 12명의 감독이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CGV 용산아이파크몰과 CGV 씨네드쉐프 용산아이파크 몰에 모였다. 올해 역시 티켓 오픈과 함께 대부분의 영화가 빠르게 매진되며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작지만 강한 힘을 보여주었다.

마리끌레르 영화제 파이오니어 상 시상자와 수상자로 만난 배우 배두나와 탕웨이.
마리끌레르 상을 수상하는 배우 노상현.
민규동 감독과 김우빈 배우.
마리끌레르와 깊은 인연을 이어온 배우 권해효와 오민애.
각각 시상과 수상 후 무대에서 내려오는 배우 배두나와 탕웨이.
영화 <해피엔드>의 배우 쿠리하라 하야토와 히다카 유키토.

특별히 올해는 개막식 시상식이 열리는 해이기도 했다. 2023년 제10회를 기점으로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개막 시상식은 격년제로 진행한다. 4월 25일 금요일 오후 5시, 2백30여 명의 영화 산업 관계자와 패션·뷰티 브랜드 담당자들이 CGV 용산아이파크몰 4관에 모였다. 이날 사회를 맡은 배우 김도연의 단단한 목소리가 극장 안을 가득 채우며 시상식은 시작됐다. 가장 먼저 <마리끌레르> 발행인 손기연 MCK 퍼블리싱 대표가 무대에 올랐다. 인사를 마친 그는 “요즘 누가 페이퍼 북을 보냐, 누가 극장에 가느냐 하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 일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특별한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화제를 해나갈 수 있도록 많은 용기를 북돋아주시기 바랍니다”라며 제1회 마리끌레르 영화제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지속해온 것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상은 총 네 부문에 걸쳐 감독과 배우에게 전해졌다. 가장 먼저 ‘마리끌레르 상’은 패션, 뷰티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과 보다 나은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온 마리끌레르가 영화인들을 응원하는 의미를 담은 상이다. 배우 부문은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깊고 빛나는 연기를 보여준 오민애 배우가 시상자로 무대에 올라 영화 <대도시 사랑법>의 노상현 배우에게 수여했다. 이후 감독 부문 시상을 맡은 <마리끌레르> 박연경 편집장은 “세계 각국의 <마리끌레르>가 공유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마리끌레르>는 저널리즘 의식을 갖고, 우먼 임파워먼트(Women’s Empowerment), 즉 여성들의 인권 문제에 앞장서며, 더불어 인클루시비티(Inclusivity), 즉 포용력을 갖고 사회 문화를 주도해나가자는 의식을 갖춘 매거진인데요. 이 부문에서 꼭 시상하고 싶은 감독님입니다”라며 영화 <힘을 낼 시간>의 남궁선 감독을 호명했다.

수상 소감을 전하는 배우 탕웨이.
래디언스 상을 수상한 배우 임지연.
포옹을 나누는 배우 오민애와 노상현.
감사 인사를 전하는 배우 김우빈.
배우 배두나.
영화 예술 발전에 기여한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파이오니어 상을 수상하는 홍경표 촬영감독.
홍경표 촬영감독과 우민호 감독.
포옹을 나누는 배우 탕웨이와 배두나.

이어 영화적 번뜩임으로 모두를 놀라게 한 작품에 수여하는 작품상 ‘스파크 오브 더 이어’의 시상이 이어졌고, 영화진흥위원회 한상준 위원장이 시상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한국적 가족의 의미, 전통 가치관의 변화와 붕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한국 독립영화의 기념비적 성과를 얻은, 이견 없을 올해의 독립예술영화인 <장손>의 오정민 감독과 강승호 배우가 스파크 오브 더 이어 상을 수상했다.

세 번째로는 한국 영화의 가장 빛나는 현재를 보여주는 감독과 배우에게 전하는 ‘레디언스 상’ 시상이 이어졌다. 배우 부문 시상을 위해 마리끌레르의 오랜 친구 권해효 배우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오랜 시간 배우로 살아가며 여러 배우들의 삶의 궤적을 보기도 합니다. 오늘 이 두 배우를 호명하려 하니 그들이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기울인 지난 노력이 느껴져 마음이 벅차네요”라고 말하며 배우 김우빈과 임지연을 각각 호명했다. 김우빈 배우는 지난해 <외계+인>과 <무도실무관>으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말하며 함께 자리한 최동훈 감독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다. 이어 임지연 배우는 “영화제에 초대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영화를 처음 시작한 때 같은 긴장과 설렘을 느꼈다”며 기쁨을 표했다.

레디언스 상의 감독 부문 시상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이자, 영화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 한국 사회의 현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하며 한국 영화 뉴웨이브를 이끈 ‘감독들의 감독’ 박광수 감독이 함께했다. 그는 영화 <하얼빈>의 우민호 감독과 영화 <파과>의 민규동 감독을 무대 위로 초대하며 두 감독과의 인연을 전했다. 무대에 오른 민규동 감독은 박광수 감독에게 영화를 배우던 지난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며 수상의 기쁨과 감동을 전했다.

영화 <장손>의 배우 강승호.
개막식 사회를 맡은 배우 김도연.
김우빈 배우와 파이오니어 감독 부문 시상을 위해 자리한 최동훈 감독.
<마리끌레르> 코리아 박연경 편집장.

“세계 각지의 마리끌레르 에디션이
공유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저널리즘 의식을 갖고, 여성들의 인권
문제에 앞장서며, 포용력을 갖고 다양성의
문화를 주도해나가는 것입니다.”

마리끌레르 코리아 편집장 박연경

시상자로 무대에 오른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한상준.

MCK 퍼블리싱 대표 손기연.

“지속적으로 이 일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특별한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화제를 해나갈 수 있도록
많은 용기를 북돋아주시기 바랍니다.”

MCK 퍼블리싱 대표 손기연

배우 임지연.

이날의 마지막 시상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한국 영화 산업에 이바지한 감독과 배우에게 전하는 ‘파이오니어 상’이었다. 배우 부문에는 2023년 제10회 개막 시상식에서 파이오니어 상을 수상한 배두나 배우가 무대에 올라 올해의 수상자로 탕웨이 배우를 호명했다. 두 배우가 무대에서 다정히 포옹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어느 매체보다 여성 영화인의 행보에 응원과 지지를 보내고자 하는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탕웨이 배우는 마리끌레르 영화제 포스터 촬영을 위해 방문했던 1백30년 역사의 오래된 극장을 떠올리며 영화관이 존재하는 이유와 그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화를 향한 꿈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파이오니어 상 감독 부문의 시상에는 마찬가지로 제10회 개막 시상식 파이오니어 상 수상자인 최동훈 감독이 함께했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개척해온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며 홍경표 감독이 이룩한 아름답고도 황홀한 그의 촬영 예술 세계를 관객들에게 전했다. 무대에 오른 홍경표 감독은 “앞으로도 좋은 감독님들과 함께 새로운 도전, 두려움 없이 해나가겠습니다” 하고 담백하면서도 힘 있는 인사를 남겼다.

래디언스 상을 수상한 민규동 감독.
영화 <장손>의 오정민 감독.
래디언스 상 시상을 위해 참석한 부산국제영화제 박광수 이사장.
영화 <힘을 낼 시간>으로 마리끌레르 상을 수상한 남궁선 감독.
영화 <하얼빈>의 우민호 감독.
마리끌레르 상 배우 부문을 시상하는 배우 오민애.

“오늘처럼 누군가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일은 무척 복된 일인 것 같습니다.
제가 호명하는 배우는 이 기운을 잘 받아서 승승장구하길 바랍니다. 저 기도발 좋습니다.(웃음)”

배우 오민애

모든 시상이 끝난 뒤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기획과 운영을 맡은 유선애 <마리끌레르> 피처 디렉터와 김영우 수석 프로그래머가 무대에 올라 시상식 후 상영하는 개막작 <글로리아!>를 소개하며 시상식을 마무리했다. 수녀원을 배경으로 낡은 제도와 억압을 딛고 굳건하게 피어나는 여성의 연대를 뭉클하게 그려낸 음악영화인 <글로리아!>는 마리끌레르가 지향하는 연대의 모습을 잘 담아낸 작품으로 영화제의 의미를 더했다.

열두 번째 마리끌레르 영화제를 준비하는 동안 ‘2025년에 영화란, 극장이란 무엇인가’라는 케케묵은 질문을 자주 던졌다. 이는 곧 마리끌레 르 영화제가 앞으로 걸어갈 행보와 결을 같이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극장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보다, 어떻게 그 영화 를 보기로 마음먹었는지 등 저마다의 맥락을 영화 자체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이제 더이상 영화관은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갈만한 곳이 된 것이다. 예술영화, 재개봉 영화의 약진이라는 최근의 현상도 같은 이유에서 나온 것일 터다. 영화제가 열리는 3일 내내 빽빽이 들어찬 관객석을 바라보며 마리끌레르 영화제가 내년에도, 후년에도 해야할 일은 ‘극장으로 가야겠다’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부추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의 기분 좋은 소란함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다시 내년을 준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