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 정적이 내려앉은 얼굴. 배우 장률이 꿈속에서 마주한 것들.

블랙 셋업과 셔츠 모두 COKIE, 블랙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셋업과 셔츠 모두 COKIE, 구두 Berluti, 블랙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재킷과 팬츠 모두 COKIE,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금까지 작품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장률 배우의 낯선 얼굴을 생각하며 이번 화보를 준비했어요. 촬영하면서 카메라 앞에서 떠올린 감정이나 장면이 있었나요?

아까 조금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준비해주신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는데,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누군가 앞에 서는 기분이 들었어요. 촬영하는 동안 영화 <화양연화> 삽입곡을 틀어주셨잖아요. 홍콩 영화의 장면들이 떠올랐어요.

오늘처럼 스타일에 큰 변화를 주는 촬영도 즐기는 편인가요?

네. 오늘 화보를 위해 모인 스태프들이 제게 새로운 캐릭터를 입혀주신 거잖아요. 어떤 인물을 연기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평소에는 집에서 대본을 읽거나 산책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웃음) 이렇게 촬영하거나 연기할 때마다 새롭고 즐거워요.

연기는 결국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일이잖아요. 거기에서 오는 재미도 클 것 같아요.

맞아요. 일상에서는 쉽게 겪기 힘든 감정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같은 감정이라도 작품 안에서 조금 더 강도 높게 표현해내야 할 때, 그 감정의 결을 상상하고 채워가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겪어보지 못한 감정을 미리 체험해보는 기분도 들고요.

미리 체험해본다는 건 어떤 의미예요?

인물에 대해 계속 상상하고 준비하다 보면, 직접 겪어보지 못한 감정에도 깊이 가닿는 순간이 찾아와요. 언제나 그 순간을 향해 가는 것 같고요.

그 순간을 처음 마주한 때를 기억해요?

고등학생 시절 연극 <우리 읍내>를 공연할 때였어요. 제가 맡은 ‘조지’라는 인물이 어린 시절부터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작중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당시 저는 열여덟 살이었으니 그 상실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연습할 때 우는 시늉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올라 준비한 연기를 하는데,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거예요. 그때 연기란 참 신기한 일이구나 싶었어요. 관객의 눈빛, 조명, 음악, 무대의 공기 같은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저를 몰입의 순간으로 데려다 준 거죠.

연기에 처음 깊이 빠져든 그때를 지금 떠올리면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나요?

가끔은 그때만큼 순수하게 인물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지금도 같은 마음으로 작품과 인물을 대하려 노력하지만, 그 시절에만 가지는 순수함이 분명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와 지금 연기를 대하는 제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나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마음도 들고요.

그 마음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얼마 전 모교인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어요. 축제에 와서 후배들에게 인사를 해주면 좋겠다고요. 제가 학교에 다닐 땐 조승우 선배, 황정민 선배가 오셔서 집에 가서 가족들한테 막 자랑했거든요.(웃음) 이번엔 그 자리에 제가 초대받은 건데, 한참을 망설이게 되는 거예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릴 때의 저를 만나러 가는 게 두려운 거더라고요. 그 시절의 저와 같은 마음으로 앉아 있을 학생들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어른일 수 있을까 싶었어요. 어렵게 마음을 정하고 가기로 했죠.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그날 밤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털어놨어요. 스무 살 때부터 연기 공부를 함께해온 친구인데,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지금 모습 그대로도 손색없으니까, 부끄러운 마음을 지닌 채 다녀오라고요. 그 말을 듣고 한참 울었어요. 배우로서 쌓은 커리어를 떠나 한 사람으로서 손색없다는 말로 들렸거든요. 그 말에 큰 용기를 얻었어요.

한편으론 존경하던 선배들이 섰던 자리에 서는 거잖아요. 스스로를 칭찬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선배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요?(웃음) 어쩌면 어떤 상을 받는 것보다도 값진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요즘 제가 그런 흐름 속에 있는 것 같아요. 다시 초심을 생각하고, 하루하루 더 순수한 마음으로 작품을 바라보려 해요.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는데, 몇 달 전 드라마 <춘화연애담> 라운드 인터뷰 때 서른 명이 넘는 기자님들에게 일일이 손 편지를 썼어요. 첫 순간을 잘 기억하면서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나아가겠다고요. 계속 그렇게 연기하고 싶어요.

언젠가 “배우는 계속해서 꿈을 꾸는 직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어떤 의미였나요?

매번 새로운 인물이 되어보려 애쓰는 거잖아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도요. 앞서 말한 체험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 그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과정이 꿈같다고 느껴요. 꿈속에 사는 거죠. 매일매일.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화이트 팬츠 COKIE, 구두 Berluti,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화이트 팬츠 COKIE,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홀터넥 톱과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플레어 팬츠 LMOOD, 그린 슬리브리스 톱과 벨트, 장갑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작품마다 새로운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실이 벅찰 때는 없나요?

한 작품이 끝나면 마음만은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새롭게 경험하고 습득하는 것들이 있겠지만, 그것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 내가 가진 기술만으로 연기하는 순간이 오면 이 일을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예전에 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면 보는 사람들도 금방 알아챌 거예요. 저 자신은 당연히 알 테고요. 이런 가치관이 꼭 정답 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약속하고 싶어요.

과거의 자신을 복제하지 않으려는 마음,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려는 의지가 그간 맡아온 배역에서도 느껴져요. <마이 네임>의 ‘도강재’, <몸값>의 ‘고극렬’, <춘화연애담>의 ‘최환’ 등 한 가지 결로 설명되지 않는 인물들을 연기해왔죠. 이렇게 서로 다른 역할을 오가며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있나요?

특정한 결의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는 것도 배우로서 큰 강점이겠지만, 여러 장르를 오가며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기쁨이 있어요. 어떤 가능성을 계속 열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사실 연기할 때 느끼는 쾌감이란 건… 없어요. 다 어렵고 힘들어요.(웃음) 그럼에도 극단적으로 다른 인물들을 연기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죠. ‘이 사람이 이 사람이었어?’ 이런 피드백을 접할 때 특히 즐거워요. 결국 작품은 봐주는 분들이 완성하는 거니까요.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다 보면 나에 대한 감각이 흐릿해질 때도 있는지 궁금해요.

20대 때 한창 연기 공부에 몰두하던 시절에는 연기란 게 스스로를 지우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에 집중했고요. 한데 요즘은 오히려 연기를 하면 할수록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더 선명해진다고 느끼고, 그렇게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각이 바뀐 계기가 있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저는 이 대본을 그렇게 해석한 거잖아요. 그 해석을 담아 연기하는 거고요. 점점 배우는 작품과 인물에 자신의 시선을 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라는 사람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가 자연스럽게 작품에 묻어나는 거죠.

하지만 배우는 때로 타인의 시선에 의해 다양한 이미지나 수식으로 정의되기도 하잖아요. 맡은 배역이 배우의 인상을 결정하기도 하고요. 그런 반응들을 마주할 때는 어떤가요?

아주 즐겁죠. 모두 저를 향한 관심이고 애정이니까요. 결국 사랑받기 위해 이 일을 택한 것 같거든요. 20대 때는 혼자 연기를 짝사랑하면서 애정을 막 갈구했는데, 그에 대한 응답이 없다고 느꼈어요. ‘언젠가 봐주겠지’ 하고 기다린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 그런 응답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반응을 직접 살펴보기도 해요?

힘들 때마다 찾아서 봐요. 예전에 써주신 댓글들도 다시 들여다보고요. 그런데 저는 좋은 것만 봐요.(웃음) 부정적인 글은 딱 느낌이 오거든요. 그러면 바로 스크롤을 위로 올려버려요.(웃음)

재빠르게.(웃음) 20대는 연기에 대한 갈증이 커서 여백이 부족한 시기로 기억된다고요.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대하고 있나요?

그때는 연기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느라 스스로에게 무척 빡빡하게 굴었어요. 나와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한 것 같아요. “더 훈련해! 더 갈고닦아!” 이런 식으로요.(웃음) 갈증이 큰 만큼 이를 해소할 기회도 많았어요. 예술대학에 다녔으니까 고개만 돌려도 작품이 있었고,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서도 연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죠. 주변에 섭취할 게 흘러넘쳤어요. 그런데 서른을 넘기면서는 어떤 부분을 비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제 안에 여백을 남겨두고, 그 자리를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의 의견과 에너지로 채우는 게 중요하다는 걸 점점 배우고 있어요.

여백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요?

더 부드러운 상태로 현장에 놓이기 위해 노력해요. 내게 부족한 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채워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낳을 때가 많더라고요. 그렇게 마음을 열고 나니 현장을 채운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각자의 역할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하나의 장면을 함께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무척 아름다운 일 같아요. 앞으로도 그 미학 안에 머무르고 싶어요.

먼 미래를 그려볼 때, 배우로서 이루고 싶은 꿈도 있어요?

웃음이 끊이지 않는 현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로빈 윌리엄스처럼 주변 사람들을 안아주는 힘이 있는 배우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해요. 아까는 다 지나간 얘기처럼 말했지만, 연기에 대한 욕망이나 열정 같은 건 아직도 제 안에서 막 들끓거든요.(웃음) 아닌 척, 괜찮은 척하면서 여전히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하고요. 그런데 요즘은 함께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하하호호 웃으면서 해나가는 게 제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장률이 있는 현장에 가보고 싶다!” 이런 말을 듣는 게 제 꿈이에요. 아하하. 꿈이 너무 크죠?(웃음)

언제쯤 이룰 수 있을까요, 그 꿈.(웃음)

글쎄요. 한 10년 뒤?(웃음) 잘 모르겠어요. 아직 뚜렷한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데 어떤 방향을 향해 가고는 있는 것 같아요. 사방에 안개가 자욱하지만, 계속해서 노를 저어 나아가는 느낌이에요.

언젠가 그 목적지에 닿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함께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 마음을 듣는 거죠. 외적인 기준이나 업계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들여다보고 싶어요. 배우는 사람의 근원적인 감정에 대해, 순수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직업이니까요. 이 순수함을 놓치면 제 시선이 어떤 면에서는 거짓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봐요. 저는 거짓되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