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현대미술계에서 독자적 작업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여성 예술가들의 존재를 더욱 널리 알리고자 마리끌레르 프랑스와
아트 파리가 공동 주최한 여성 예술가 상(Her Art Prize). 첫 번째 수상의 영예를 안은,
우크라이나 문화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예술이라는 무기를 택한 자나 카디로바(Zhanna Kadyrova)와 나눈 대화.


자나 카디로바, 전장의 예술가
짙은 갈색 앞머리, 맑고 푸른 눈, 그리고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미소. 작가 자나 카디로바에게서는 잔 다르크의 용맹한 기운이 느껴진다. 우크라이나 키이우(Kyiv) 인근에서 자란 그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자신의 예술을 순수한 ‘저항’의 행위로 전환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그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각종 전시와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작가의 작업은 언제나 장소성과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작품이 놓이는 공간의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을 읽어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는 방식이었다. 침공 전날 밤, 자나는 자신의 신체 절반이 불길에 휩싸이는 불길한 꿈을 꿨다. “젖은 풀밭에 몸을 눕혀 불을 끄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다음 날 아침, 러시아군의 전차가 우크라이나로 진입했다. 그날 이후 자나의 삶도, 우크라이나 국민의 삶도 통째로 달라졌다. 그는 전쟁을 작품의 유일한 배경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피란처를 찾아 불길에 휩싸인 도시를 떠난다는 선택지는 그에게 애초에 없었다.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키이우에 남아 작업을 이어가야 했죠.”
침공 직후 몇 달간 이어진 혼란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11세에 소련식 미술학교에 입학해 19세에 조각가로 데뷔한 그는 2000년대 초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당시 예술가 집단에 참여하며 예술과 정치 사이의 긴장과 가능성을 일찍이 목격했다. 하지만 폐허와 죽음이 쌓여가는 현실 앞에서, 자나는 자신의 예술적 참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2022년 인도주의 프로젝트 ‘팔랴니차(Palianytsia)’를 시작하며 작업에 전환점을 맞이했고, 일에 대한 사명감을 되찾았다. 팔랴니차는 전쟁 초기부터 러시아인이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정체를 구분해내는 암호처럼 사용된 우크라이나 전통어로, ‘감사합니다’라는 뜻이다. 자나는 카르파티아 지역의 강가에서 수집한 돌을 자국의 전통 빵 모양으로 조각해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의 생명력을 표현했다.
파리, 베를린, 베네치아를 거쳐 전 세계 67곳에서 작업을 선보인 그는 35만 유로에 달하는 작품 판매 수익을 전부 우크라이나군에 기부했다. “전쟁 전에는 평화주의자였어요.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싸우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니까요.” 많은 예술가 친구들이 전선에 나섰고, 몇몇은 돌아오지 못했다. 불과 사흘 전에도 그는 키이우에서 전사한 지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전쟁에서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2024년, 자나는 2010년대 초에 시작한 도자기 연작을 꺼내 들었다. 과녁처럼 생긴 둥근 표면에 균열을 내어 별자리 무늬를 만들어낸 원형 조각으로, 작가는 실제 칼라시니코프 소총으로 총탄 자국을 남긴 뒤 ‘샷(Shots)’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무기를 쥔 채 전쟁이라는 현실에 깊이 몸담으면서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이어가는 작가만의 방식이다. 자나의 오랜 친구이자 파리로 망명한 러시아 출신 큐레이터 엘레나 소로키나(Elena Sorokina)는 “자나는 비극적인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하지만, 본인의 예술적 의도를 결코 잊지 않아요. 그의 작품은 치열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죠. 재능과 용기, 진정성을 모두 갖춘, 온몸과 영혼을 다해 헌신하는 작가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자나 카디로바가 이번 아트 파리에서 선보인 사진 연작 ‘Refugees’는 그 진정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학교, 병원, 도서관 등 최전선에 자리한 공공건물이 폭격으로 파괴된 모습을 생생히 기록한 이 작업은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폐허를 둘러본 그의 체험에서 비롯됐다. 황폐한 공간에 방치되어 있던 화분에서 생명의 흔적을 발견한 자나는 그 식물들을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돌봤다. 식물이 자라난 자리와 화분, 그리고 식물이 자신의 목소리로 난민의 삶을 고백하는 듯한 내레이션 텍스트를 나란히 전시해 폭력의 현장에 작지만 분명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예술가로서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었고, 이 작품이 여성 예술가 상 심사위원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재 파리 갈레리아 콘티누아(GALLERIA CONTINUA)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는 이 사진 연작과 함께 설치 작품 ‘Ressources’를 공개했다. 위장복 천으로 감싼 통나무는 우크라이나 군인의 존재를 상징하고, 자나는 이 조각을 전쟁에 동원되는 본질적 자원인 인간으로 재해석해 풀어냈다. 자나에게 조각은 하나의 물리적 육체다. 그의 모든 작품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그것이 자나가 관객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지난 4월, 그는 그랑 팔레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마리끌레르 프랑스가 주관한 여성 예술가 상을 수상했다. 이어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문화예술상인 타라스 셰우첸코 국가상을 받으며 20년 만에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 예술가로 기록됐다. 그에게는 한 가지 특권도 주어졌는데, 바로 키이우의 위인들과 나란히 묻힐 수 있는 묘지 자리다. 전쟁 중에 받은 이 씁쓸한 선물에 자나는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삶과 죽음이 맞닿은 일상 속에서 그는 여전히 작업을 이어간다. 자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과 관심을 우크라이나의 목소리가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는 생생한 증거로 받아들인다. 예술가이자 용맹한 전사, 자나 카디로바는 아직 무기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