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회 칸영화제 초청작 중 한국 장편영화는 없었다. 그럼에도 본인의 영역에서 의미 있는 서사를 완성해 칸의 스크린을 채운 두 명의 한국 영화인을 만났다. 영화 축제가 화려하게 조명하는 부문의 바깥에서 이야기의 힘을 증명한 <안경>의 정유미 감독과 나눈 대화.

정유미 감독

애니메이션 감독. 2006년 <나의 작은 인형 상자>를 만들며 데뷔했고, 2009년 <먼지아이>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받는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며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심리적 여정을 연필 드로잉으로 표현한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이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단편경쟁 부문에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초청받았다.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이 칸영화제에 초청되어 다시 칸을 찾았다.

16년 전, 칸에 처음왔을 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당시 영화제를 찾은 경험이 거의 없어 칸의 거리를 걸어다닐 때 모든 게 어리둥절하면서도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지금도 좀 어색하다.(웃음) 지난밤 파리에서 칸으로 넘어왔는데, 두 도시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더라. 휴양지이자 영화 축제 현장인 이곳에서 <안경>을 최초로 상영하며 관객을 만날 생각을 하니 기대된다.

<안경>을 만들게 된 출발점은 무엇이었나?

몇 년 전, 패션 브랜드 ‘김해김’ 디자이너에게서 DM을 받았다. 메시지를 확인한 후 통화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 작품 <연애놀이>를 보며 영감을 많이 받았다며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고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광고 형태의 짧은 영상을 만들 계획이었는데, 가볍게 소비되는 콘텐츠가 아니라 내 개인 작업으로도 발전시킬 수 있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내 이야기에 김해김의 의상을 녹여내는 방식을 떠올렸고, 2~3년간 틈틈이 작업해 <안경>을 완성했다.

<안경>을 보면서 주인공 ‘유진’의 얼굴이 정유미 감독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웃음) 보통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인물을 본인과 비슷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더라. 다만 이번에는 브랜드와 협업하다 보니 주인공이 이전 작품의 인물들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기를 바랐다.

유진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전작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유진은 내 언니의 이름이다. 주인공을 내 이름으로 부르면 너무 직접적일 것 같았고, 실제로 내가 언니의 이름을 더 좋아한다.(웃음)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시나리오에 적을 이름이 필요해 별 생각 없이 유진이라고 썼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없겠다 싶어 계속 쓰고 있다. 언니는 본인의 이름을 쓰는 걸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데, 조카가 내 작품을 접하고 “엄마 이름이다!”라고 말한 적은 있다.(웃음)

이번 작품은 유진이 깨진 안경을 다시 맞추기 위해 안경점을 찾아가며 시작된다. 이러한 설정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나?

안경점에 가서 시력 검사를 받으면, 들판 위 빨간 집에 시선을 고정하게 하는 검사기가 있지 않나. 그 집이 흥미로웠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가상의 공간 같기도 하고. 언젠가 작품에 활용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 아이디어를 꺼내 쓴 거다. 집이라는 공간이 상징적으로 자아를 가리키기도 하지 않나. 그래서 빨간 집을 유진의 무의식 속 공간으로 설정하고, 그 집에 들어가 내면의 자아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구상했다.

‘자아와의 만남’을 안경이라는 소재와 엮어낼 때 주목한 점이 있다면?

‘색안경을 낀다’ 라는 말이 있지 않나. 특정한 프레임, 관점을 가지면 제한되거나 오염된 시선으로 살아가게 된다. 스스로 싫어하는 자기 내면의 모습을 마주하는 일을 피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한데 그 모습은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의식 안에 버려진 채 계속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유진이 새 안경을 맞추면서 버려둔 자아들을 마주하고 받아들여가는 심리적 여정을 이번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다.

스스로 버려둔 자아를 수용하는 과정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을 듯하다.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맞다. 나도 예전에는 내 특정한 면을 수용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게 잘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쏟지 않나. 그런데 나이 들수록 그 방향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안경>의 주인공처럼 본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보나?

머리가 아닌 마음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많은 생각을 하기보다는 여러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스스로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 자신이 부끄럽고, 타인의 시선이 두렵더라도 그 감각 안에 좀 더 머무는 거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하는 대신 ‘그래도 상관없어’ 하면서 연연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려고 한다. 외부가 아닌 내면에 집중하는 것, 그게 내가 작업하는 큰 동기 중 하나다.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지 않을까 싶다.

칸에서의 일정을 마친 뒤 한국 관객도 만날 예정이다. 6월 11일에 <안경>과 <파라노이드 키드>가 일부 극장에서 연속 상영 형태로 개봉한다. 두 작품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나?

<파라노이드 키드>는 ‘자기 수용’이라는 <안경>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불안, 자의식, 자기혐오 등을 상징하는 캐릭터의 시선을 따라 내면의 성장을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싸이월드에 올렸던 그림일기를 엮어 낸 동명의 그림책을 바탕으로 만든 컬러 애니메이션이다. 당시 생각과 감정의 조각을 어떻게 한 편의 애니메이션으로 이어 붙일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내레이션’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떠올렸다. 배두나 배우의 내레이션을 통해 일기 속 이미지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풀어냈다.

그동안 선보인 작품들을 살펴보니 내레이션뿐 아니라 대사도 거의 없다.

이야기를 전할 때 언어적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면, 대사를 배제하는 방식이 내게 더 맞는 것 같다. 내 작업의 시작점이 시나리오가 아니라 이미지이기 때문에, 대사가 없는 작품을 만드는 게 내게는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림이 어떻게 움직이나?’라는 질문을 자주 떠올리면서 애니메이션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이미지를 모아 만든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림책과 만화책을 즐겨 읽었고, 미술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퀘이(Quay) 형제의 애니메이션을 봤다. 실험적인 퍼핏(puppet) 애니메이션이었는데, 미술 작품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로 표현이 풍부했다. 그 매력이 크게 다가와 ‘이런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이를 계기로 대학 회화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러다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영화와는 다른, 애니메이션만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애니메이션은 회화적 표현과 영화적 서사의 중간 지점에 있다. 영화가 전체적인 줄거리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애니메이션은 그림의 분위기나 표현 방식을 통해 전달되는 것들이 더 많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영역 안에도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이 있다. 대중적인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독립 애니메이션에도 관심을 가진다면, 훨씬 다채로운 표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연필 드로잉’이라는 본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기법을 사용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대학생 때는 물감을 쓰는 컬러 작업을 주로 했는데, 졸업 후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면서 연필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재료를 쓰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게는 연필로 작업하는 게 가장 편했다. 컬러 작업에 비해 과정이 단순하다는 장점이 있고, 흑백으로 세밀하게 묘사한 이미지에 더욱 큰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흑백 작업은 시간대가 과거나 미래 등으로 특정되지 않기 때문에 초현실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따뜻하고 친절하기보다는 낯선 긴장감을 안기면서 보는 이들의 집중을 이끌어내는 효과도 있다. 이러한 특성이 마음에 들어 연필 드로잉 기법을 계속 활용하고 있다.

졸업 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작업 방식에 생긴 변화가 있다면?

초반에는 모든 장면을 연필로 그렸다. 기계를 다루는 데 능숙하지 않아 애니메이션 관련 프로그램을 쓸 줄 모르니 원시적으로 작업한 거다. 한데 이제는 그렇게 작업하면 힘에 부치더라.(웃음) 방식을 조금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최근에는 디지털 작업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결과물에서 흑백의 느낌을 내는 게 중요하지 연필만을 고집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기술을 잘 활용하고 싶기도 하다. 아직은 요령이 생긴 정도다. 다른 애니메이션 작업자에 비하면 여전히 아날로그에 가까운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꾸준히 지켜가고 싶은 아날로그 작업만의 특징이 있다면?

내 작업은 애니메이션 형태의 ‘영화’이기 때문에, 회화처럼 붓의 질감을 비롯한 물성이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물성을 강조하기보다는 표현의 디테일을 살리는 데 주력하고 싶다. 이미지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다 잘 담아내고 싶달까. 그런 이미지가 담긴 영화라면 훨씬 큰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지의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이미지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쉽게 사라지는 지금 시대에 필요한 말인 것 같다.

요즘 AI를 활용한 그림도 나오고 있지 않나. 이미지 제작 방식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개별성 없이 무차별적으로 생산된 창작물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지뿐 아니라 이야기의 개별성에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은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다. 개인의 이야기는 어떤 점에서 보편성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인간이지 않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담아낸 이야기는결국 인간 안에 있는 어떤 보편성에 닿게 되는 것 같다. 그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교집합이 생기고, 관객은 그 틈을 통해 이야기에 들어오게 되지 않을까. ‘내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가 되도록 만드는 일, 그게 창작자에게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 이야기를 작품에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꼭 말하고 싶은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고통일 수도 있고, 오래된 아픔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걸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고, 작품으로 꺼내놓고 나면 한결 나아지는 것 같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내면을 드러내는 일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씩 사라지고,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감각이 든다. 창작은 나에게 그런 해소와 치유의 과정이다.

유수의 영화제가 상업성만을 지향하기보다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에도 주목한다는 점 또한 고무적이다.

맞다. 영화제가 다양한 개인의 이야기를 발굴하기 때문에 창작자들이 본인 이야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 같다. 지난한 시간을 거쳐 만들어낸 작품이 영화제를 통해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느낀다.

더 많은 이들이 본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 같나?

어떤 형태의 작품이든 사람들에게 닿아 영감이나 긍정적 감정을 안기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 비로소 작업의 의미가 생기는 것 같다. 만약 내 작업이 혼자만의 만족에 그친다면 조금 속상할 것 같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작업하는 내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 즐거움을 잘 지켜가고 있는 것 같나?

물론 매번 즐겁게 작업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웃음) 안정적인 직업이 아니라는 부담감을 느낀 적이 있고, ‘다음 작업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에 막막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직업을 대하는 마음이 낙관적으로 바뀌었다. 내가 할 만한 이야기라면 어떻게든 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일을 하고 있음에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도 든다. 만약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삶이 재미없을 것 같다. 내 작업은 평소의 경험이나 사유를 형상화한 일종의 기록이다. 일상이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주변을 더욱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큰 즐거움을 느낀다. 그만큼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