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다. 나는 용감해지는 것에 지쳤다.” (‘망자들이 아는 진실’ 중에서)
우울과 분노의 한 가운데에서, 시와 삶을 일치시켜 온 여자. ‘나’에게서 시작해 ‘우리’에게로 가닿는 ‘홀린 마녀’ 앤 섹스턴의 시 세계.

홀린 마녀, 앤 섹스턴
“나는 홀린 마녀, 밖으로 싸돌아다녔지, / 검은 대기에 출몰하고, 밤엔 더 용감하지 (…) / 외로운 존재, 손가락은 열두 개, 정신 나간, 그런 여자는 여자도 아니겠지, 분명. / 나는 그런 여자 과야” (‘그런 여자 과(科)’)
누군가 자신의 삶을, 그 밑바닥을 내밀하게 고백할 때, 우리 사이엔 필연적인 공명이 발생한다. 20세기 고백 시파를 대표하는 시인 앤 섹스턴에게 언어는 생존이자 저항이었다. 평생을 우울증과 양극성 장애에 시달렸고, 자살 시도 이후 주치의의 권유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자살, 불륜, 정신질환 등 파격적이라 느껴질 법한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문단에서 ‘미친 주부’라 불렸고, 섹스턴은 스스로를 ‘홀린 마녀’라 칭했다.
고백하는 목소리

앤 섹스턴이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시 안에서 선택한 것은 ‘고백’이라는 형식이다.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날 것의 언어로 시를 썼다. 독일의 임상심리학자 알무트 슈말레-리델은 <우울한 게 아니라 화가 났을 뿐>에서 말한다. 여성들은 스스로 화난 줄도 모른 채 우울로 침잠하게 된다고. 화를 낼 수 있을지 망설이고, 내도 변하지 않을 거라 체념하고, 낸 뒤에도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말이다. 앤 섹스턴의 시에 담긴 분노는 여성들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던 감각을 일깨운다. 타인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혼란을 인식할 때, 우리는 강렬한 해방감을 느낀다.
여자로 사는 일이 지긋지긋해
“나는 여자로 사는 일이 지긋지긋해, / 숟가락이 지긋지긋하고 주전자가 지긋지긋하고, / 내 입이 지긋지긋하고 내 가슴이 지긋지긋하고, / 화장품이 지긋지긋하고 실크가 지긋지긋해, / 여전히 내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들이 있었어, / 내가 차려 바친 그릇 주위로 둘러앉는 남자들이,” (‘천사와 사귀기’)
앤 섹스턴의 분노는 단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사회의 억압을 응시하는 방식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 열풍은 백인 남녀가 결혼해 번듯한 집에서 아이를 기르는 가정을 우상화했다. “어떤 여자들은 집과 결혼”(‘가정주부’)해야 했고, ‘그녀들은 종일 무릎을 꿇고 앉아 성실히 자신을 씻어내릴’(앞의 시) 수밖에 없었다. 앤 섹스턴은 고백한다. “사회가 경멸하는 / 내 안의 표정을 응시하는 게 두렵기만”(‘친절님: 이 숲들은요’)하며, “포도와 가시 사이에 / 꼭 박혀 버린 나 자신보다 끔찍한 건 여태 만나지 못했.”(앞의 시)다고. 앤 섹스턴 역시 당대의 시대상과 내면의 괴리 사이에서 방황했지만,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자신을 끝내 바라보려 했던 그의 시도는 억압을 밀어내고 해방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나의 이야기에서 여성의 합창으로

앤 섹스턴은 금기시되던 여성의 욕망을 발화하기도 했다. “손가락에서 손가락으로, (…) 나는 벨처럼 그녀를 두드리네 (…) 밤에, 홀로, 나는 침대와 결혼하지”라며 여성의 자위를 가시화하고, “태어났어야 할 누군가가 / 사라졌다”(‘낙태’)며 낙태를 수면 위로 건져 올린다. 더 나아가 그의 시는 개인의 경험을 넘어, 모든 여성의 합창으로 이어진다. 그는 시 ‘내 자궁을 찬미하며’에서 수많은 여성을 호명한다. “기계를 저주하며 신발 공장에 있”는 여자, “물개를 돌보며 수족관에 있는” 여자, “톨게이트 통행료를 거두”는 여자, “죽어 가지만 아침 식사를 기억하”는 여자, “태국에서 자기 매트를 펼치”는 여자, “아기 궁둥이를 닦”는 여자까지. 어딘가에서 살아 숨쉬고 있을 여성의 삶을 상상하고 적으며 공동체의 목소리를 만들었다.
책상 앞에서, 펜과 타자기로
비록 그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지만, 언제나 ‘쓰는 나’를 잃지 않았다. 삶과 죽음 사이, 역설의 틈에서 피어난 감각을 시로 붙잡았다. “죽음은 오랫동안 / 여기에 있었어”라고 쓰면서도 “그들이 온다면 나는 더 사랑할 거라고 약속해 (…) 살아라, 살아라 (…) 꿈과, 신나하는 재능에 기대어,”(‘살거라’)라며 죽음을 통해 삶을 응시한다. ‘시 안에서 쓰는 단어가 상표, 동전, 벌 떼’(‘시인이 분석가에게 말했다’) 같다고 말했던 그는, 그럼에도 “내가 앉는 책상”과 “내 앞에 앉아 있는 타자기”(‘그 날’)를 바라본다.
아픔을 고백하며 타인에게로 나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세상과의 불화, 내 안의 불화를 견디며 그것을 언어로 옮길 때, 쓰는 이에게는 어떤 힘이 생길까. 앤 섹스턴의 시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쓸 때, 그것은 단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병든 자아를 드러내는 일은 그가 자신을 살리기 위한 방식이었지만, 그렇게 시작된 발화는 더 많은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정치적 언어가 된다. 앤 섹스턴의 시 세계 안에서, 우리는 그가 열어둔 문을 따라 다시 읽고, 쓰며, 서로의 세계로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