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욕망이 뒤엉키고, 충돌하고, 엇갈린 자리에 생겨난 균열. <파인: 촌뜨기들>의 세 배우, 류승룡, 양세종, 임수정이 갈라진 틈새에서 건져 올린 것들.

임수정 재킷과 팬츠, 울 니트 브이넥 스웨터, 레이스 러플 블라우스 모두 Chloé, 스레드 컬렉션의 멀티 셰이프
다이아몬드 이어링과 링 모두 Graff.
양세종 스트라이프 재킷 Acne Studios, 블랙 티셔츠 Auralee, 블랙 와이드 팬츠 Jacquemus.
류승룡 재킷과 니트 톱 모두 Zegna, 안경 Gentle Moster.

실크 톱과 미디스커트, 레이스 타이츠 모두 Valentino, 레이스 글러브와 카프스킨 펌프스 모두
Valentino Garavani, 트리니티 이어링 Cartier.
비대칭 실크 드레스 Ferragamo, 에메랄드 이어링과 다이아몬드 링, 화이트 골드 브레이슬릿 모두 Repossi.

일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캐릭터와 배우가 얼마나 맞아떨어지는지 어떤 감을 주기도 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이 생각나 이번 작품 <파인: 촌뜨기들>에서 맡은 배역의 이름을 가장 먼저 찾아봤는데, ‘양정숙’이더군요. 우리가 아는 임수정 배우와 어쩐지 거리가 느껴지는 이름이라 더 궁금했어요. 임수정 배우가 양정숙 사모님이 되는 과정이요.

실은 저도 그랬어요.(웃음) 대본을 받았는데, 단박에 몇 회분이 휘리릭 읽힐 정도로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서사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흥미로웠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제안받은 인물이 양정숙이라는 거죠. 내가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이름부터 이 사람이 움직이는 방식까지, 저와 맞닿은 부분이 없는 거예요. 양정숙은 돈을 무지무지 사랑하고 돈밖에 모르는 사람인 데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그래서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한데, 연기할 생각을 하니 좀 주춤주춤하게 되더라고요.

고민의 시간을 지나 이 작품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강윤성 감독님 덕분이죠. 확실히 감독님들은 배우에게서 드러나지 않은 어떤 면모를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 필모그래피 속 인물들과는 결이 많이 다른 캐릭터인데도, 감독님은 제가 할 수 있을 거라 보셨대요. 원작에 그려진 양정숙은 냉철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 좀 미스터리한 여성이에요. 그런데 감독님이 재해석한 양정숙은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꾼들을 다 진두지휘할 정도로 굉장히 똑똑하고 리더십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이런 면을 임수정 배우라면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다는 거예요. 그 말에 용기를 내서 “한번 해보겠습니다” 한 거죠.

영화 <거미집>의 ‘이민자’보다 헤어 볼륨이 훨씬 커진 것 같던데요. 양정숙의 욕망만큼이나 큰.(웃음)

엄청나죠. 메이크업도 되게 화려해요. 눈썹도 각을 탁 만들고, 눈꺼풀에는 블루, 옐로, 퍼플 같은 센 컬러를 잔뜩 올렸어요. 감독님이 제 눈두덩이의 색이 진해질수록 신나 하셨던….(웃음) 연기하면서 그런 분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초반에는 캐릭터와 제가 일체가 될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셋업을 하고 나니 그 인물이 되는 게 빨라지더라고요.

<파인: 촌뜨기들>의 출발점은 ‘욕망’입니다. 모든 인물이 각자 욕망을 품고 있는데, 이를 어떤 식으로 드러내고 이것이 어떻게 충돌하고 뒤섞이는지가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아요. 양정숙은 자신의 욕망을 어떤 식으로 풀어내는 인물인가요?

모든 것을 본인이 다 쥐고 모든 사람을 통솔하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어요. 피라미드로 치면 제일 위, 꼭짓점에 서고 싶은 거죠. 다만 그 마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진 않아요. 그의 진짜 욕망은 혼자 있을 때 드러나요. 어쩌면 이 판에서 가장 큰 그림을 그리는 인물일 수도 있겠네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인물일 수도 있어요.(웃음)

예전에 “아직 꺼내지 못한 욕망을 표적 삼는 캐릭터를 만난다면 덥석 물 거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 딱 들어맞는 인물을 만난 듯해요. 양정숙을 만난 소감이 어떤가요?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자신밖에 모르는 캐릭터가 쉽게 만나지는 인물은 아니라는 점에서요. 더불어 <파인: 촌뜨기들>을 통해 ‘배우 임수정이 이런 캐릭터도 하네’, ‘이런 인물도 잘 어울리네’라는 반응이 온다면 아주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런 반응이 제가 앞으로 해나갈 역할을 확장하는 데 큰 힘이 될 테니까요.

욕망이 가득한 인물을 만난 김에, 임수정 배우의 욕망도 하나 드러내본다면요?

그럼 저는 양정숙 프리퀄을.(웃음)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데 빠질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를 중심으로 작품의 서사가 흐르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자기밖에 모르는 이상한 사람, 양정숙의 이야기를 따로 만들어봐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결국 얘기인즉, 이야기를 제가 이끌어가보고 싶다는 거죠.(웃음) 양정숙이랑 비슷해요.

<파인: 촌뜨기들>에 출연하면서 양정숙에게 점점 스며든 것 같은데요?(웃음)

완전!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처음에는 제가 약간 어색해하는 것 같더래요. 그런데 뒤로 갈수록 점점 생각지 못한 말투며 표정이 나오면서, 현장에 들어오는데 이미 포스가 그냥 양정숙이라는 거예요, 하하. 다들 현장에서 “사모님 오셨다!” 그러고, 류승룡 배우도 “어휴, 무서워” 하고. 어느 순간에는 ‘내 안에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그걸 꺼내준 감독님께 너무 감사하죠.

또 하나 궁금한 작품이 있어요. 임수정 배우가 제작자로 참여한 영화 <두 번째 아이>요. 어떤 계기로 제작자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된 건가요?

정확하게는 처음부터 제작자로 참여한 건 아니고요, 논의하다가 제작에 들어가기까지 기간이 좀 길어졌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 작품이 만들어지는 데 함께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지난해에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을 받게 됐고, 완성할 때까지 같이 하게 됐어요. 요즘 영화제작이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뭐라도 힘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고, 앞으로도 꼭 제작자가 아니더라도 어떤 역할이든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얘기한 대로 영화 시장이 힘든 시기라 더 귀한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힘든 상황이니까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커요. 둘러보면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님들, 감독님들이 아주 많거든요. 관객으로서도 배우로서도 저를 콕콕 찌르는 창의적인 작품을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죠. 올해 단편을 제외하고 칸영화제에서 상영한 한국 작품이 없었잖아요. 제작하는 작품 수도 현저히 줄었고요. 상황의 심각성이 이제 피부로 느껴질 정도라, 어떻게 해서든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서 곳곳에서 다들 열성을 기울이고 있거든요. 저도 그중 하나인 거죠.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계속 숨을 불어넣어야 하잖 아요.

또 하나,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분야가 있죠. 책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간간이 접했는데, 결과물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이루고 싶은 몇 가지 작업 중 하나이긴 한데,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어요. 아유, 너무 어려워요. 요청이 와서 가끔씩 추천사를 쓰는데, 그것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이미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아버린 욕망이라, 하긴 해야 돼요.

양정숙의 욕망, 그리고 임수정 배우의 욕망. 이를 꺼내놓고 난 후 욕망은 더 커지나요, 아니면 소멸되나요?

커지죠.(웃음) 돌아갈 수 없어요. 한번 커진 욕망은 소멸될 수 없어요. 이제 숙명이다 생각하면서 안고 가야죠.

양세종 그레이 셋업 Jil Sander, 티셔츠 Auralee, 블랙 더비 슈즈 Our Legacy.
임수정 더블브레스트 웨이스트코트와 오버사이즈 셔츠, 시폰 스커트 모두 McQueen,
쎄뻥 보헴 빈티지 옐로 골드 이어링과 링, 멀티 링 모두 Boucheron.
류승룡 트렌치코트와 셔츠, 타이, 팬츠 모두 Fendi,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