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연대기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넘어, ‘예술을 어떻게 소환하고 해석할 것인가’라는 성찰을 담고 있다.
20세기 초, 영적 계시와 자연과학의 비약적 발전 사이에서 탄생한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들은, 시대를 앞서간 추상성을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 여정에서,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는 지난 10년간 미술계의 큰 이슈 중 하나였다. 스웨덴에서 태어난 작가는 스톡홀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자연과학과 신지학 같은 영적 탐구 과정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00년대 초, 그가 그린 추상성을 띤 회화 작품들은 ‘추상화의 아버지’라고 불린 칸딘스키보다도 앞서 창작되었으며, 그 획기적인 작업은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는 조류의 상징적 사례로 떠올랐다. 아프 클린트의 작품 세계는 유럽과 미주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재조명되었고,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힐마 아프 클린트: 미래를 위한 그림(Hilma af Klint: Paintings for the Future)>은 약 60만 명의 관람객이 찾으며, 미술관 설립 이래 가장 많은 관람객 기록을 세운 전시로 유명하다. 지난봄, 일본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힐마 아프 클린트: 더 비욘드(Hilma af Klint: The Beyond)>는 오는 7월 19일부터 10월 26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초 순회전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Hilma af Klint: Proper Summons)>으로 이어진다. 부산에서 만나게 될 이번 전시는 작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연대기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넘어, ‘예술을 어떻게 소환하고 해석할 것인가’라는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부산현대미술관 최상호 학예연구사는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업이 가진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20세기 미술이 단절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뿌리이자 미래를 열어가는 중요한 단서임을 보여주고자 한다”라고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도쿄에서 열린 <힐마 아프 클린트: 더 비욘드> 와 다른 접근과 구성을 선보이는 이번 부산 전시에 기대가 크다. 그 이유에 대해 지금부터 힐마 아프 클린트의 생애와 작품과 함께 이야기해보려 한다.
자연에서 출발한 예술
힐마 아프 클린트는 1862년 스톡홀름 북쪽의 솔나시 군사 시설에 딸린 생활 공간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남성들은 대부분 해군이었으며, 항해에 필요한 지도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러시아와 벌인 해전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 할아버지 덕분에 그의 집안은 귀족을 의미 하는 ‘af’라는 미들 네임을 붙이게 되었다. 해군 집안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자연과학적 소양을 쌓은 그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예술적 표현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경력 초기에는 수의학 연구소에서 소묘 화가로 일하며 자연의 세밀한 묘사와 분석을 작품에 담기도 했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스무 살에 스톡홀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882년 당시 많은 유럽의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여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지 않았다. 특히 누드 드로잉 시간에 옷을 입은 여학생이 나체인 남성 모델을 관찰하고 그리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힐마 아프 클린트는 나이가 두 살 더 많은 선배인 안나 카셀 (Anna Cassel)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예술적 교류를 활발히 하며 서로 영감과 지지를 주고받았고, 금세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했다. 이 관계는 20년 넘게 지속되었으며, 카셀은 아프 클린트의 예술적 성장과 탐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근에는 안나 카셀의 작품 역시 여러 전시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자연과학과 영적 세계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다윈이 진화론을 설파하고, 벨이 전화기를 개발하며 과학이 급진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작가는 과학적 탐구와 종교적·영적 체험을 결합하려는 신지학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특히 블라바츠키 같은 신지학 창시자들의 저서를 탐독했다. 그는 이들의 저서에서 제시하는 우주론, 영혼의 존재, 영적 계몽에 관한 사상을 작품 활동과 세계관 형성에 적극 활용하며, 영혼의 직관과 우주적 연결성을 작품에 담아내려 했다. 부산현대미술관의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 첫 번째 챕터에서는 작가의 초기 시기 작품을 집중 조명한다. 큐레이터는 “그의 작업에서 자연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예술적 사유가 탄생하는 원초적인 장이며, 그 안에서 그는 미적 형식의 근원을 탐구했다”라고 설명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작품 리스트를 살펴보면, 아카데미 시절 그린 ‘남성 누드에 관한 습작’(1885), 수의학 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절에 그린 ‘말의 대가리를 그린 습작’(1900~1901), 다양한 식물을 그린 수채화들, 인상주의 기법을 활용한 고전적 구도의 유화 ‘여름 풍경’(1888) 등 작가의 초기 작품들을 깊이 있게 느끼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거대하고 신비로운 연작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열일곱 살 때부터 심령회에 참여하며 영적 세계와의 교감을 시작했는데, 그즈음 그는 열 살 난 여동생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 일이 그가 심령회 활동에 몰두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당시 사회 전반이 남성 중심이던 가운데서도, 심령회 모임에서는 여성들이 초청자, 영매, 총무 등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맡으며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도 가능하지 않았던 특별하고 독립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그의 방법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건 30대 중반에 4명의 여성 동료들과 함께 ‘5인회(De Fem)’이라는 모임을 결성한 때부터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제단을 디자인하고, 특별한 의식을 위해 옷을 맞춰 입으며, 예배 의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신지학 저서를 깊이 탐독하며, 심령회를 통해 높은 차원에서 내려온 알 수 없는 존재들과 교감하려 시도했고, 이를 나선, 원, 타원, 격자 등의 형태를 토대로 한 기하학적 구조로 스케치해 작업에 반영했다.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의 두 번째 챕터에서는 바로 이 시기, 즉 5인회 활동 기간 동안 작업한 다수의 파스텔과 흑연 스케치를 선보인다. 이때부터 힐마 아프 클린트와 안나 카셀은 심령회의 일이나 작업 과정에 관한 기록을 열정적으로 남기며, 작품 제작과 영적 탐구의 긴밀히 연결된 관계를 보여준다.

훗날 70대에 가까워진 힐마 아프 클린트는 자신이 기록한 수많은 공책과 문서를 일부 파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심령회에서 만난 게오르그, 그레고르, 지드로, 에스터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나눈 대화, 그리고 작품 제작을 지시하거나 영감을 준 내용이 가득 담 긴 공책들이었다. 이처럼 파기 작업을 이어가던 중, 1932년에 남긴 공책에는 ‘+x’라는 기호 가 신중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죽고 20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개봉해야만 할 모든 작품에는 위에 언급한 기호가 달려 있을 것이다.” 이는 작품과 공책이 일정 기간 동안 숨겨지고 은폐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이 파기 작업에서도 약 2만6천 쪽이 넘는 기록과, 1천3백 점에 달하는 그림들이 남았다. 다시 5인회 시절로 돌아가보면 심령회에서 그린 자동주의 기법을 활용한 비구상적 그림들이 힐마 아프 클린트의 첫 연작 ‘태초의 혼돈’(1906~1907)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906년 작가는 26점짜리 유화 연작 ‘태초의 혼돈’ 작업을 시작했고, 이번 부산 전시에서는 이 중 10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혀 구상적 형태 없이 순수 비구상적 기법으로 만든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이 자신의 작품에 추상적 시도를 하기 수년 전에 이미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1907년에 ‘에로스’라는 제목의 연작을 시작하며 ‘태초의 혼돈’이 불러 일으킨 창조적 물줄기를 이어갔다. 이 연작은 파스텔 핑크 계열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색조로 채워졌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이 중 세 점이 관람객을 만날 전망이다. 이제 아프 클린트의 작품 세계에서는 이미 초창기 아카데미 시절의 고전주의 양식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그는 근본적으로 추상적이고 영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같은 해, 작가는 또 다른 걸작 연작인 ‘10점의 대형 그림’(1907)을 시작한다. 이 연작은 각각 가로 2.4m 세로 3.28m에 달하는 10점의 거대한 그림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10월 2 일부터 12월 7일까지 빠른 속도로 이 작품들을 완성했다. 이 연작에 사용한 템페라 물감은 달걀노른자를 섞어 만든 것으로, 엄청난 양의 달걀을 사용해 당시 가족이 운영하던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놀랐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0점의 대형 그림’은 어린 시절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여러 단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림에는 거대하고 불가해한 문자가 가득하며, 일부 연구에 따르면 이 문자들은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wu’는 ‘진화’를, ‘mwu’는 ‘믿음’을 의미하며, 동그라미는 ‘단결’, 노란색과 빨간색은 ‘즐거움’과 ‘남성성’을 각각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 작가 자신조차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으며, 그 의미는 여전히 열려 있다. 2023년 봄, 런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열린 힐마 아프 클린트와 피터르 몬드리안의 2 인전 의 하이라이트 역시 이 ‘10점의 대형 그림’이었다. 이 작품들을 감상 하던 순간, 세상과 나의 경계가 찬란하게 무너지는 듯한 황홀감에 휩싸였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번 부산 전시에서도 이 연작은 힐마 아프 클린트 예술 세계 최고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많은 관람객에게 고양감을 안길 것으로 기대한다.
미래를 위한 그림

힐마 아프 클린트는 후기 작품일수록 색채와 구도의 단순화를 꾀하며, 내면의 밀도를 더욱 드러내는 형식적 절제의 과정을 거쳤다. 네 번째 챕터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W 연작’(1913), ‘파르시팔 연작’(1916), ‘원자 연작’(1917) 등을 선보인다. 이 작업들은 원, 십자가, 물결 등의 반복되는 형상을 통해 정신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작가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큐레이터는 “이러한 변화는 작가가 삶의 마지막 단계에 가까워지면서 기존의 복합적 구조와 서사적 연작에서 벗어나 더 작고 명료한 상징을 통해 우주적 진리를 탐구하려 한 내면의 사유적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음 두 챕터는 작가의 시선과 사유를 직접 드러내는 작업 자료와 그가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는 “작가의 창작이 단순히 회화적 행위에 그치지 않고, 언어와 사유의 층위에서 복합적 실천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며 “동시에 그가 당대 미술계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미술사의 중심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배외적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 위한” 것이다.
힐마 아프 클린트가 ‘20년’이라는 단서를 작품에 단 것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당대가 아닌 미래의 관람객에게 넘기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이고 다각적으로 노력한 경험에서 비롯된 깨달음이었다. 아프 클린트는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자, 신지학의 새로운 리더인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작품을 촬영한 사진들과 채색 수채화로 만든 10권의 앨범을 가지고 여러 차례 스위스 바젤 근교에 있는 신지학 본부인 괴테아눔(Goetheanum)을 찾아갔다. 1913년에는 자신이 회원으로 활동하던 심령 주의 협회 주
관 전시회에 참여했고, 1928년에는 여러 번 도전 끝에 런던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슈타이너의 애매한 거절과 대중의 부정적 반응을 겪으며, 작가는 결국 +x라는 기호를 고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힐마 아프 클린트는 낙담하지 않았다. “내 임무가 성공한다면 인류에게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나는 삶의 광경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영혼의 길을 묘사할 수 있다”라고 차분히 기록한 작업 노트는 그의 굳건한 신념을 보여준다.

말년에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위한 건물까지 구상했다. 그것은 ‘진화’, ‘혁명’ 등을 상징하는 나선형 모티프를 중심으로 설계한 작품으로, 방문객들이 하늘을 향한 나선형 계단을 오르며 그가 표현하고자 한 영적 여정을 체험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건물의 핵심 공간에는 ‘10장의 대형 그림’이 배치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힐마 아프 클린트의 비전은 1백 년이 지난 후, 구겐하임 미술관의 초대 관장인 힐라 폰 레베이(Hilla von Rebay)의 구상으로 현실화되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나선형 모티프로 설계해달라고 부탁한 이 미술관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을 전시하며 60만 명의 21세기 관람객에게 영적 아름다움을 선사했고, 그의 예술적 유산은 세상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대하는 바는 바로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이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에 있다. 큐레이터는 “힐마 아프 클린트의 이름이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과장된 신화로 소비되는 현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보다 책임감 있고 신중한 방식으로 소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의 예술은 시대를 앞선 추상성과 더불어 영성과 과학 사이의 긴장 속에서 형성된 복합적 유산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그러한 낭만적 서사를 경계하며, ‘작가를 소환하는 행위 자체’를 전시의 핵심 주제로 삼는다. 나는 부산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의 예술적 여정을 새롭게 이해하는 순간을 기대한다. 기념비적인 서사를 넘어 그의 생애와 작품을 색다른 시각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