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예술은 한 사람의 마음속 어둠을, 삶의 그늘을 밝혀주는 힘이 있다.
캔버스에 스며든 광채, 음악의 반짝이는 선율, 영화와 책에 담긴 눈부신 서사까지.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각자의 일상에서 그러모은 빛의 아름다운 면면.
빌헬름 함메르쇠이 VILHELM HAMMERSHØI

지난 연말 코펜하겐의 한 미술관을 찾아간 날,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작품이 있었다. 햇빛이 얕게 스며든 회색의 공간, 등을 돌린 채 홀로 앉아 있는 여성을 담아낸 회화. 이를 탄생시킨 미술가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덴마크에서 활동한 빌헬름 함메르쇠이였다. 그는 생전 코펜하겐 스트랑아데(Strangade)에 위치한 집에 거주하며 실내 풍경과 아내의 뒷모습을 주로 표현했다. 차분한 색조, 절제된 묘사로 그려낸 정적인 장면들은 다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온, 고독, 여유로움, 우울. 작은 방의 고요가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을 떠올리다 보니, 외부의 소리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귀 기울이게 되었다. 작품 앞에 한동안 머무르며 내 마음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고요’는 나 자신을 살피는 계기가 되어준다는 것을, 그 경험이 삶을 스스로 빛나게 할 힘을 지녔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빔 벤더스 <퍼펙트 데이즈>

지난해 이맘때쯤 국내에 개봉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최근에 다시 봤다.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고지)의 반복적인 일상을 담담히 따라가는 영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캔 커피를 뽑아 마시고, 출근길에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고, 밤이 오면 책을 읽다가 잠드는 정돈된 삶 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불쑥 벌어진다. 한결같아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그의 하루하루가 내 일상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루, 한 달, 1년을 주기로 많은 것이 되풀이되지만 크고 작은 새로움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 의미를 ‘권태’라는 단어로 지워버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앞으로는 내 삶의 촉수를 좀 더 곤두세우고, 사소하게 여겨지는 순간도 온전히 감각해야겠다는 마음이 솟았다. 그렇게 나의 ‘지금’을 성실히 살아가다 보면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가만히 바라보고, 태양의 붉은 빛을 마주하자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표정을 짓던 히라야마의 마음을. 삶의 빛나는 찰나들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한강 산문집 <빛과 실>

“그렇게 내 정원에는 빛이 있다. / 그 빛을 먹고 자라는 나무들이 있다. 잎들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꽃들이 서서히 열린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까. 한강 작가의 단상을 들여다보고 싶어 그의 새 산문집 <빛과 실>을 펼쳤다. 2024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문, 미발표 시와 산문, 북향 집에 들인 식물을 가꾸며 쓴 일기, 직접 찍은 사진을 엮은 책. 소소한 일상을 담백하고 밀도 있게 적어낸 기록을 하나씩 천천히 곱씹었다. 행간에 깃든 생각과 감정, 마침표를 찍기 위해 사유해온 시간을 헤아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책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그가 지닌 삶의 태도를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었다. 내면 깊이 침잠하며 성찰해온 작가가 “(글쓰기로) 인생을 꽉 껴안아보겠”다고, “충실히 살아”내겠다고 전하는 순간. 일상의 눈부신 가치를, 삶의 빛나는 경이를 발견하자 나의 오늘을 잘 살아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언젠가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도록.
숨비 <To. My Lover>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를 굳게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사랑에 대한 궁금증을 줄곧 품어왔다. 그러다 숨비의 첫 번째 EP <To. My Lover>를 들었다. 거칠면서도 맑은 톤으로, 무심한 듯 섬세히 불러낸 5곡은 사랑의 다양한 결을 펼쳐내고 있었다. 설렘, 연민, 슬픔, 그리움 등을 말하던 그는 이내 “나는 너의 전체를 다 사랑하는 것 같다”라고 노래했다. 한 사람의 전부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마지막 곡이 흐를 때, 록 스타일의 트랙 위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강한 여운을 남겼다. “짧은 인연이 너의 두 눈을 슬프게 만들었지만, 그녀와의 커다란 사랑은 영원할 거야.” 수시로 변하는 감정, 유한한 삶을 초월해 오래도록 빛날 사랑의 힘이 느껴졌다. 더 많이, 기꺼이 사랑하고 싶다는 용기가 솟았다. 이 곡을 선공개하며 숨비가 남긴 말처럼 “모든 종류의 사랑을 응원”하면서 말이다.